아하
검색 이미지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17

광복 직전 결성된 '조선 건국 동맹'은 어떠한 일들을 하였나요?

일제 강점기에 독립을 위해서 수많은 단체와 조직들이 결성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광복 직전 결성된 '조선 건국 동맹'은 어떠한 일들을 하였나요?

55글자 더 채워주세요.
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여운형은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일본에 다녀오면서 일본의 패망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확신하였다. 1944년 8월 여운형, 조동호, 이만규 등이 중심이 되어 비밀리에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였다. '일본 제국주의세력을 타도하고 조선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함과 동시에 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내용으로 하는 건국강령을 제정하였다.

    조선건국동맹은 불언(不言)ㆍ불문(不文)ㆍ불명(不名)을 3대 철칙으로 삼고, 다음과 같은 강령을 제시하였다. 첫째, 일제의 축출과 우리 민족의 완전한 독립을 회복하며, 둘째, 대일연합전선의 형성과 모든 반동세력을 박멸하고, 셋째, 민주주의 원칙에 의한 정치와 노농 대중의 해방에 치중한다. 전국 10개 도에 조직망을 형성하고 대중적인 지지 기반의 확대를 위해 양주, 양평, 관주, 여주, 홍천 등지에 농민동맹을 조직하였다.

    1945년 3월에는 노동군의 편성을 위해 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징용 및 징병 실시 방해, 민심 선동 및 교란, 전쟁 물자수송 방해 등의 활동을 하였다. 국외 조직망을 만들기 위해 만주군관학교에 파견하였던 박승환에게 유격대를 편성하도록 하고, 북중국 및 상하이에도 연락 책임자를 임명하였다. 연안의 조선독립동맹과는 상호 연계가 이루어졌으나 충칭의 임시정부와는 미처 연락이 닿기 전에 해방의 날이 다가왔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항복을 선언하면서 국내에서 활동하던 유일한 건국 조직인 조선건국동맹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확대되었다. 국내외에서 대다수의 민족지도자들은 일제의 패망 후에 보통 선거를 통한 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을 수립한다는 데 뜻을 같이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건국동맹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 누리함
    누리함23.05.17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건국 동맹은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을 예견하고 여운형, 조동호, 현우현등이 현우현의 집인 서울 경운동 삼광의원에 모여 비밀리에 조직한 단체였습니다. 건국 동맹은 일제가 패망한 후 도래할 해방 정국을 주체적으로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그 주된 목적으로 하였습니다. 건국 동맹은 강령으로 첫째, 각인각파를 대동단결하여 거국일치로 일본 제국주의 제세력을 구축하고 한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할 것, 둘째, 대일 연합 전선을 형성하고 한국의 독립을 저해하는 일체 반동 세력을 박멸할 것, 셋째, 건국 부문에 있어서 일체의 행위를 민주주의적 원칙에 의거하고 특히 노농 대중의 해방에 치중할 것을 천명했습니다.


    결성 후 조직원을 확대하면서 1944년 10월에는 여운형을 위원장으로, 내무부에 조동호와 현운호, 외무부에 이걸소, 이석구, 황운, 재무부에 김진우, 이수목 등 중앙 부서를 선임했다. 당시 중앙 조직은 직업별로는 화가 김진우, 군인 박승환, 한의사 현우현, 문필가 김세용⋅이여성, 체육인 이상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참가했습니다. 건국 동맹은 각 지방에도 조직을 결성하였는데, 충청도에 신표성, 장준 등을 비롯해서 경상도, 전라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에 지역 책임자를 선임하였습니다. 이 중에는 이유필과 같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장관을 역임한 서북 지방 기독교 계열의 민족주의자도 포함되어 있었고, 황태성, 정운해, 이증림 같은 공산주의자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10월에는 경기도 용문산에서 여운형⋅김용기⋅이장호 등 13명이 모여 농민동맹을 결성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청년 학생 그룹들이 가담했으며, 노동자들과 부녀들의 조직과 교원에 대한 조직도 준비하였습니다. 건국 동맹은 점조직과 이명동체로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피해 조직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철저한 감시 때문에 조직을 확대하지는 못했습니다.

    한편 전세가 연합국에 유리하게 돌아가던 1945년 3월경 건국 동맹의 조동호, 이석구, 이걸소 3인은 공산주의 그룹의 최원택, 정재달, 이승엽 등과 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일제의 통신 시설 및 철도 선로 파괴 등 후방 교란을 위한 무장 활동을 계획하였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실행 단계에는 들어가지는 못했다. 건국 동맹은 해외 독립운동 단체와의 연계에도 노력하였습니다. 그 주된 대상은 화북 조선 독립 동맹이었습니다. 건국 동맹은 이영선⋅이상백 등을 파견하여 베이징 등지에서 화북 조선 독립 동맹의 연락원들과 접촉하였고, 항일 투쟁 방침과 국가 건설 노선 등에 대해 협의하였습니다. 이 외에도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연락을 추진했지만 접촉에 실패하여 성사되지 못하였습니다. 1945년 7월 대한애국청년당의 부민관 폭파 사건이 발생하였고 그 여파로 8월 4일 건국 동맹의 이걸소⋅황운⋅이석구⋅조동호 등 1차 중앙 간부 다수가 검거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여운형은 2차 중앙 간부로 최근우⋅김세용⋅이여성⋅이상백⋅김기용⋅이만규를 새로 선출했습니다.

    8⋅15 해방이 되면서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朝鮮建國準備委員會)가 결성되어 혼란기의 치안 유지 및 신국가 건설을 준비하였습니다. 8월 17일 결성된 건국준비위원회 1차 중앙 간부에는 건국 동맹의 조동호, 최근우 등이 참여하였습니다. 이후 건국 동맹의 이여성⋅이상도 등은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활동하였고, 이만규, 이걸소(이기석), 이상백, 현우현, 이석구 등은 건국 동맹에 남아 건국 동맹의 조직 확대에 주력하였습니다. 해방 후 건국 동맹은 전국적 지도자로 급부상한 여운형의 위상과 건국준비위원회에서의 활동 때문에 급속히 조직을 확대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건국준비위원회를 통한 신정부 수립이 좌절되고, 9월 재건파공산당 주도의 조선인민공화국 결성을 둘러싸고 좌우가 심각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건국 동맹은 정당으로서 변신을 모색하게 됩니다. 그리고 11월 조선인민당이 결성되면서 해소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건국동맹은 불언, 불문, 불명을 3대 철칙으로 삼고 일제의 축출과 우리 민족의 완전한 독립을 회복하며, 대일연합전선의 형성과 모든 반동세력을 박멸하고, 민주주의 원칙에 의한 정치와 노동 대중의 해방에 치중합니다.

    전국 10개도에 조직망을 형성, 대중적인 지지 기반의 확대를 위해 양주, 양평, 관주, 여주, 홍천 등지에 농민동맹을 조직했습니다.

    1945년 3월 노동군의 편성을 위해 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징용 및 징병 실시 방해, 민심 선동 및 교란, 전쟁 물자수송 방해 등의 활동을 했으며 국외 조직망을 만들기 위해 만주군관학교에 파견하였던 박승환에게 유격대를 편성하도록 하고 북중국 및 상하이에도 연락 책임자를 임명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항복을 선언하면서 국내에서 활동하던 유일한 건국 조직인 조선건국동맹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확대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건국 동맹은 해외 독립운동 단체와의 연계에도 노력하였다. 그 주된 대상은 화북 조선 독립 동맹이었다. 건국 동맹은 이영선⋅이상백 등을 파견하여 베이징 등지에서 화북 조선 독립 동맹의 연락원들과 접촉하였고, 항일 투쟁 방침과 국가 건설 노선 등에 대해 협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