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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달한파리매77
활달한파리매77

우리나라의 최초의 숙박업체의 역사에 대해서 긍금합니다

여름 휴가가 다가오니 다양한 숙박관련해서 확인중인데 문득 우리나라 최초에 숙박할수 있는 시설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역사가 가장긴 숙박시설도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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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개의 답변이 있어요!
    • 굉장한비오리121
      굉장한비오리121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근대적 여숙의 발달과 함께 외국인(특히 서양인)상대의 호텔도 생기게 되었는데 서울에 있어서 최초의 호텔은 1902년의 손탁호텔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은 1888년에 인천에 세워진 대불(大佛)호텔이다.

      이에 대한 기사를 『개항과 양관역정(洋**歷程)』에서 살펴보면

      「…벽돌 3층의 이 양관(洋館)은 일본인 호리, 리기타로오(굴력태랑(掘力太郎))가 1887년 건축에 착수하여 1888년에 낙성시킨 것인데 얼핏보면 청관(淸**, 청국지계(淸國地界)) 같으면서도 기실(其實) 일본지계(日本地界) 첫머리라는데 또한 흥미가 있다. 일본지계 제일 첫 집이 호리씨 자택이고 그 당시 가장 하이칼라로 지었노라는 이 벽돌집이 둘째 번인데 외국인 특히 한국을 찾아드는 구라파인 혹은 미국인 상대의 양식호텔로 설계했다는 점에서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註62] 」

      라고 표현되고 있다. 이 대불호텔의 영업이 번창(繁昌)하게 되자 바로 길건너의 청국인 이태(怡泰)라는 사람 역시 외국인 상대의 여관업을 시작하였는데 그는 아래층에서 양잡무상(洋雜貿商)을 하면서 2층에「스튜어드 · 호텔(steward Hotel)」을 개업하였다. [註63]

      이와 같이 인천에 서울보다 먼저 서양인을 상대로 한 호텔이 생긴 것은 교통이 불편한 당시로서는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이 원산이나 부산으로 올 경우 서울까지 오기에 여러 가지 불편이 많았기 때문에 먼저 인천으로 오게 되었고, 인천으로 와서는 서울까지 오기에는 꼭 인천에서 하루쯤은 머물러야 다음날 일찍 서울로 향할 수 있었던데 그 원인이 있었다. 그러나 1899년 경인선이 개통된 이후 반드시 인천에 묵을 필요가 없게 되니 대불호텔은 수지가 맞지 않아 사양길을 걷다가 후에 청국인에게 매각되었다.

      다음으로 서울에서 제일 먼저 세워진 양식호텔은 1902년에 독일 여인 손탁이 정동에 세운 손탁호텔을 들 수 있다. 이 건물을 세운 미쓰 손탁(Miss Sontag)은 당시 주한 러시아공사 웨베르(W ber)의 처형으로 1885년 10월 웨베르가 공사로 부임할 때 같이 서울에 왔다. 그녀는 원래 「알사스로렌」출신으로 머리가 뛰어난 여자였다. 한국에 온지 얼마 후에 웨베르의 추천으로 궁정의 외인접대의 일을 맡게 되었는데 아울러 고종 및 양반의 서양식기 · 서양식 실내장식품류의 구입에도 관여하였다. 그리고 가끔씩 왕비에게 초청되어 말상대가 되어 주기도 하였는데 그녀는 영어 · 불어 및 한국어에도 능통하여 왕비는 물론 고종에게까지 안내되기도 하였다. 또한 그녀는 각 방면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는데 특히 외국인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활약하던 배일지(排日紙)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인 영국인 베델(T. Bethell), 미국인 육영공원의 교사 헐버트(H. B. Hulbert), 전차를 부설한 콜브란(Collbran)같은 사람들과 가까이했다. [註64]

      손탁은 1895년에 고종으로부터 경운궁(慶運宮)에서 도로 하나 건너편에 있는 서쪽의 땅과 집을 하사 받았다. [註65] 당시 그의 저택은 외국인들의 집회소 역할을 하였으며 청일전쟁 후에는 미국이 주축이 되어 조직한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로 이 집이 사용되어 외교의 중심가가 되었다. 그러다가 1902년 10월에는 옛집을 헐고 그 자리에 양관(洋館)을 지어 호텔로 경영하였는데 윗층에는 귀인들의 객실로 사용하였고 아랫층은 보통 객실과 식당으로 사용하였다. [註66] 1904년 3월과 1905년 11월에는 이등박문(伊藤博文)이 이 호텔에서 숙박을 했으며 [註67] 또한 러일전쟁 시에는 후에 영국의 수상이 된 처칠(Churchill)이 이 호텔에서 하룻밤을 숙박하였다. [註68]

      이 호텔은 1917년 이화학당에서 구입하여 대학과 교실, 기숙사로 사용하다가 1922년에는 이 건물을 헐고 3층건물로 교실, 기숙사, 실험실을 비롯한 각종 부속시설이 포함된 프라이 홀(Frey Hall)을 세웠다. [註69]

      이와 같이 당시의 호텔을 거의 모두가 외국인(특히 일본인)에 의하여 세워졌던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은 이러한 신식여관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를 살펴보면, 신식여관의 긴요(緊要)를 상업의 기관으로 보고있는데

      「여관의 제도를 완비하게 함은 자못 외인의 편리만 위할 뿐 아니라 실로 국가의 경제상 기관과 외교상 수단을 위함이로다」 [註70]

      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외국과 무역할 때 외국의 실업가나 상인들이 체류할 신식여관이 없어 막대한 손해를 보고 있다고 하여 신식여관을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1910년 이후로는 우리나라의 숙박시설도 점차 많은 변화를 가져와 노동자들의 합숙소인 하숙업을 비롯하여 조금 발전된 여인숙 등이 새로운 형태의 숙박시설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는 여관들이 대개 숙식을 겸하던 전과는 달리 잠만 자는 곳으로 변하기도 하고 또 더러는 간단한 약까지를 구비하는 곳도 생겼다. 하여튼 1910년 이후로는 농촌사회의 변화로 많은 사람들이 도회지로 몰려들게 되었으며 그들을 수용하는 새로운 의미의 숙박시설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


    •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 나라의 전통적 숙박시설은 그 기능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였지만, 신라시대에는 ‘역(驛)’이라는 형태로, 고려시대에는 ‘역’·‘객사(客舍)’라는 형태로, 조선시대에는 ‘역’·‘원(院)’·‘여각(旅閣)’ 또는 ‘객주(客主)’라고 불리면서 발전해왔다.

      뿐만 아니라 장터를 내왕하는 장사꾼이나 나들이를 하는 서민을 위해 길가나 동네 어귀에서 술과 음식을 팔고 나그네를 유숙시키는 ‘주막’이라는 것도 있었다. 이러한 초기 숙박업에 관한 사서(史書)의 기록을 보면, 신라 문무왕 때 차득공(車得公)이 지방을 여행하면서 지방 이속(吏屬)의 집에서 유숙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유사≫ 문무왕조에 보이고 있어, 그 당시에 민박과 같은 형태의 숙박시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숙박제도에 관해서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서방(西方)에 우역(郵驛)을 두고 소사(所司)에 명하여 관도(官道)를 수리하게 하였다.”는 최초의 기록이 있다.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 이후 부산 등 개항장을 중심으로 객주 및 여각들의 동업조직인 객주회 등이 구성되어 조합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였고, 영국·프랑스 등 해외열강의 한국진출이 활발해지자 외국인의 숙박은 물론, 직접 외국상품을 거래하는 무역 등의 상업적 기능까지 담당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서울에는 근대적 여관으로서 추원정(萩園亭) 등 4, 5개가 있었으며 대부분이 남산 기슭에 있었다. 1907년경 서울에 있던 1등급 여관은 성관(城館) 외 12개 소, 2등급 여관은 구주관(九州館) 외 12개 소, 3등급 여관은 구분여관(口分旅館) 외 9개 소 등 32개 소가 산재하고 있었다. 1930년 전후 서울을 중심으로 우리 나라 사람에 의하여 경영되던 100명 이상 수용할 수 있는 여관으로는 제일여관·남선여관(南鮮旅館) 등이 있었다.

      근대호텔로는 1888년에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인천의 대불(大拂)호텔이 최초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서울에 제일 먼저 세워진 양식 호텔은 1902년 독일인 손탁(Sontag)이 정동에 세운 손탁호텔이며, 1909년에는 프랑스인의 소유였던 하남(何南)호텔이 역시 정동에 세워졌다. 1914년에 조선호텔이 생기고 1936년에는 서구식 형태의 반도호텔이 세워져, 우리 나라 호텔산업의 전환기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