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대약탈 사건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1500년대에 일어났었던 사건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개신교였던 사람들이 불만을 품고 일으켰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정확한 역사적 배경은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520년 유럽은 종교개혁의 횃불이 타오른 이래 가톨릭이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상황으로 더욱이 동쪽으로는 이슬람 세력인 오스만 제국이 1526년 동유럽 최후의 보루 헝가리를 멸망시키고 유럽 내륙까지 진출해 있었으며 교황령이 위치한 이탈리아 반도를 둘러싸고 유럽 최대의 두 세력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 5세와 프랑스 왕국을 지배하고있던 발루아가의 프랑수가 1세가 치열하게 격돌 중에 있었습니다. 이를 이탈리아 전쟁이라 하는데 황제 카를 5세가 스페인의 왕이기도 했으므로 프랑스 VS 신성로마제국+스페인의 구도 였습니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재임하고 있던 40대의 젊은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요동치는 국제정세에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 사이를 교대로 오가며 줄타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는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합스부르크에 맞서 프랑스 왕국, 잉글랜드 왕국, 베네치아 공화국, 밀라노 공국, 피렌체 를 끌어모아 코냑 동맹을 창설, 즉 합스부르크가문 VS반제국엽합의 구도가 형성됩니다.
이미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제국군에게 왕이 사로잡히는 참패를 겪은 프랑스는 자력만으로 제국과 맞설수 없음을 인지하고 있어 흔쾌히 동맹 제의에 응했으며 과거 제국과 혼인을 통해 친분 관계를 맺었던 잉글랜드의 왕 헨리 8세조차 이를 놓칠수 없는 대륙 진출의 호기라 여겼기에 몇 차례 퇴짜를 맞아가면서까지 기어이 동맹에 가담합니다. 다만 의회의 반대를 끝내 꺾지 못해 군대 파견까지 이르지는 못했고, 십자군 전쟁 이래 교황 중심의 동맹 세력으로서는 가히 최대 규모였으며 이로써 결성된 코냑 동맹과 합스부르크 제국 간의 전쟁을 코냑 동맹 전쟁이라 합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로마 약탈(1527)은 코냑 동맹전쟁(1526~1530)이 진행 중이던 1527년 5월 6일에 교황령의 수도 로마를 침략한 신성 로마 제국군 가운데 일부가 통제에서 벗어나 로마 시내에서 무차별적으로 약탈을 자행한 사건을 말하는데요. 약탈로 인한 피해는 과거에 있었던 그 어떤 로마약탈(사코 디 로마)사건 보다 처참하고 컸으며 성도 로마는 도시로서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어 버렸다고 합니다. 교황권의 붕괴라는 역사적 상징성과 더불어 끔찍한 참혹성 덕에 유명해졌다고 합니다. 물론 독일 지역에 기반을 둔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이긴 했지만, 명색이 로마 황제가 보낸 군대가 실제 로마를 초초화 시킨 사건 입니다.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코 디 로마는 직역하면 “로마 약탈”을 의미하며, 역사상 여러 차례 일어났습니다.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1520년대의 유럽은 종교개혁의 횃불이 타오른 이래 가톨릭이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상황이었다. 이탈리아 전쟁 당시 '프랑스 vs 신성 로마 제국+스페인'의 구도였다고 합니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재임하고 있던 40대의 젊은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요동치는 국제 정세에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 사이를 교대로 오가며 줄타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합스부르크에 맞서 프랑스 왕국, 잉글랜드 왕국, 베네치아 공화국, 밀라노 공국, 피렌체를 끌어모아 코냑 동맹을 창설했습니다. 즉 '합스부르크 가문' vs '反 제국 연합'의 구도가 형성된 것입니다. 이미 1525년의 파비아 전투에서 제국군에게 왕이 사로잡히는 참패를 겪은 프랑스는 자력만으로 제국과 맞설 수 없음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흔쾌히 동맹 제의에 응했으며, 과거 제국과 혼인을 통해 친분 관계를 맺었던 잉글랜드의 왕 헨리 8세조차 이를 놓칠 수 없는 대륙 진출의 호기라 여겼기에 몇 차례 퇴짜를 맞아가면서까지 기어이 동맹에 가담했습니다. 다만 의회의 반대를 끝내 꺾지 못해 군대 파견까지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십자군 전쟁 이래 교황 중심의 동맹 세력으로서는 가히 최대 규모라 할 만했다고 합니다. 이로써 결성된 코냑 동맹과 합스부르크 제국 간의 전쟁을 코냑 동맹전쟁이라 합니다.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527년 제국 군사들이 걷잡을 수 없이 날뛰며 로마를 약탈하는 가운데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바티칸의 비밀 지하 통로를 따라 산탄젤로 성으로 피신한 사건은 유럽을 충격에 빠뜨리고 황제 카를 5세의 수치가 되었다.
부르봉 공작은 프랑스와 교황이 신성 로마 황제에 대항하여 맺은 코냐크 동맹에 맞서기 위해 이탈리아에서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군사를 이끌고 있었다. 1527년 4월, 봉급이 제때 지불되지 않자 군대는 폭동을 일으켰고 로마로 진군해 갔다. 독일의 '란츠크네히트'(용병 부대)가 습격에 앞장섰는데, 이들 대다수는 루터파였으므로 부패한 교황의 도시를 약탈한다는 데에서 기쁨을 느꼈다.
클레멘스 교황의 탈출을 도운 것은 교황의 개인 호신병인 스위스 호위대였다. 5월 6일 황제의 군사들이 바티칸을 습격했을 때 거의 200명의 호위병 중 고작 42명만이 살아남았다. 사흘간 노략질과 살인이 판을 치는 가운데 교회와 수도원, 궁전은 약탈당했고, 추기경과 고위 성직자들은 공격당했으며, 수녀들은 겁탈을 당했다. 이들은 6월 6일 클레멘스가 40만 더커트라는 배상금을 내겠다고 약속했을 때에야 물러났다. 로마의 약탈은 카를 5세가 도저히 막을 수 없던 일이었으며 그가 이를 꾸짖기는 했지만, 최후의 르네상스 군주 겸 교황이었던 유약한 클레멘스 7세가 당한 곤경에 대해 애도를 표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는 몇 달 동안 카를의 포로로 붙들려 있었으며, 자유의 몸이 되자 제국에 대한 모든 저항을 접었다. 1530년 그는 볼로냐에서 카를에게 대관식을 거행했는데, 이는 역사 속에서 교황이 신성 로마 황제의 대관식을 올린 마지막 순간이었다.
출처 : 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계 역사 1001 Days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코 디 로마(Sacco di Roma)는 직역하면 “로마 약탈”을 의미하며, 역사상 여러 차례 일어났다. 이중 가장 유명한건 1527년 카를 5세의 로마 약탈로서, 교황권의 붕괴라는 역사적 상징성과 더불어 끔찍한 참혹성 덕에 유명해졌다. 물론 독일 지역에 기반을 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긴 했지만, 명색이 로마 황제가 보낸 군대가 실제 로마를 박살내 버린 사건이었으니...
역사가들의 추산에 의하면 타격이 네로 시절의 로마 대화재마저 능가한다. 대화재 당시엔 어떻게든 불을 끄려 했고, 후에 재건축과 확장사업으로 원래보다 더 커다란 스케일의 로마를 만들었으나 이 사건은 로마 일대가 완전히 폐허가 된 후에야 끝을 보았기 때문에, 재건축은 개나 줘버린 듯 부서진 잔해와 과장 좀 보태서 타다 남은 재까지 약탈해갔다. 14세기 아비뇽 유수가 교황권이 내리막길로 향함의 상징이었다면 이 사건은 교황권 실추의 정점이자 몰락의 상징이라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