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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넉한기린210
넉넉한기린21023.12.12

나폴레옹은 어떻게 영웅이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프랑스의 작은거인 나폴레옹은 어떻게 영웅이 되었나요? 다른나라와 치뤄진 전쟁에서 모두 이겨서 영웅이 된건가요? 아니면 다른이유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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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다.'라는 명언으로 유명한 나폴레옹은 코르시카섬 출신의 하찮은 외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프랑스 역사 뿐만아니라 세계 역사에서 영웅으로 칭합니다. 16세에 소위로 입관하여 1789년 프랑스대혁명 어려운 시기를 겪었습니다. 그는 왕당파가 영국을 끌어들여 혁명파와 싸운 툴롱전투에서 지형을 잘 파악한 보고서를 통해 당시 실력자인 로페스피에르의 동생의 마음을 사로잡아 승리로 이끌어 24살에 대위에서 포병대 지휘관으로 고속승진합니다.

    로베스피에르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혼란한 시기 폴리라스 총재는 나폴레옹에 구원을 요청하자 그는 포병부대로 왕당파 무리를 박살내고 26살에 파리총사령관으로 등극하게 되었습니다. 1799년 프랑스에서 나온 개념인 쿠테타를 나폴레옹이 일으켜서 30세에 통령이 되고 1804년 35세 국민투표로 황제에 등극했습니다. 교황을 즉위식에 초청했는데 왕관을 빼앗아 자기가 스스로 씀으로 자기 스스로 황제가 되었음을 알렸습니다. 프랑스 혁명 사상을 바탕으로 나폴레옹 법전을 공포합니다. 비록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배하여 엘베섬으로 귀양을 가지만 그전까지 전쟁에서 나폴레옹은 프랑스인의 자존심을 극대화시킵니다.

    특히 빈체제 이후 부르붕 왕정 복구된 이후 프랑인들의 나폴레옹에 대한 향수는 깊어만 갔습니다. 1830년 7월 혁명으로 성립된 7월 왕정과 루이 필립에 대한 실망도 한 몫했습니다. 프랑스인들에게 나폴레옹은 점점 영웅으로 부각되었으며, 그 결과는 루이 나폴레옹이 대통령이 되고 황제가 될 수 있게 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의 사회적 격동기 후 제1제정을 건설했고 제1통령으로 국정을 정비하고 법전을 편찬하는 등 개혁정치를 실시했으며 유럽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며 세력을 팽창하였기에 프랑스의 영웅이 된 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현대 프랑스에서는 국가의 영웅이라는 찬사와 나라를 전쟁으로 이끈 전쟁광이라는 비난이 공존하고 있는 논란의 대상이다.

    허나 좋게 보든 나쁘게 보든 봉건주의의 잔재를 완전히 종식시킴과 동시에 프랑스 혁명 이후 극도로 불안정했던 프랑스의 정국을 안정시키고 근대 유럽의 시작을 알리며 시대의 흐름을 넘어 미래를 내다본 인물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법치주의를 내세우며 만든 《나폴레옹 법전》으로 현재도 《대륙법》체계의 원형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전까지 프랑스 법률 체계는 고대 로마로부터 잔존한 《로마법》의 잔재를 기초로 지역과 상황에 따라서는 《교회법》이나 지방의 《관습법》이 통용되고, 거기에다가 왕이 공표하는 칙령이 뒤섞인 아주 복잡한 구조였다. 단지 복잡하기만 한 게 아니라 너무나 방대하고 지방이나 상황에 따라서 다르기도 해서 상당히 혼란스러웠는데, 이걸 전부 다 《나폴레옹 법전》 한방으로 완전히 갈아엎어 버렸다. 또한 이 《나폴레옹 법전》의 편찬으로 절대왕정의 요람이던 유럽에 시민 평등 사상이 널리 퍼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나폴레옹 법전》은 현재 바빌로니아 함무라비 대왕의 《함무라비 법전》, 동로마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때 편찬된 《로마법대전》과 더불어 세계 3대 법전으로 불리고 있으며 나폴레옹 본인도 "나의 진정한 영광은 마흔 번에 걸친 전쟁의 승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 민법전을 말살할 수 없는 데 있다."며 한때 전 유럽을 군사적으로 제패한 것 보다《나폴레옹 법전》편찬을 더욱 자랑스러워 했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법의 구성과 기본 논리는 모두 《나폴레옹 법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가문이나 혈연이 아닌 능력 위주로 운영되는 관료제를 확립하고 이러한 인재를 키워내기 위한 근대적 엘리트 육성 교육 제도인 그랑제콜 제도를 도입하였으며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나폴레옹 지적법(Napoleon's Cadastre)을 제정하여 토지 측량 및 관리 체제를 확립함으로써 근현대적인 지적 측량 및 부동산 등기 체제의 효시를 세웠다. 또한 현대 정치 체제의 근간인 정교분리 역시 나폴레옹 시대에 비로소 완전히 확립된 것이다.

    군사 면에서도 기동력을 중시하고 국민군의 전투력을 애국심의 고취로 끌어올리는 등 19세기 전쟁의 개념과 체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이것이 지금도 전쟁의 신으로 추앙받는 이유다. 즉, 단순히 잘 싸우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전쟁의 개념과 방식 자체를 바꿔 버린 인물이라는 것.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대륙 봉쇄령으로 물가를 최고점으로 끌어올리는 등의 결과로 당시 최강국으로 성장했던 영국을 얼어붙게 하기도 했다. 참고로 당시 영국의 경제력은 동원 가능한 재원 기준 나폴레옹 프랑스의 거의 10배에 가까웠다. 쇼미더머니를 치고 끝까지 나폴레옹을 잡으려고 든 영국의 경제력이 사기였다.

    그의 몰락을 기회삼아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등 유럽의 구(舊) 세력들은 유럽을 프랑스를 혁명 이전의 구(舊) 체제로 돌려놓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나폴레옹 몰락으로부터 한 세기 만에 19세기 중후반 유럽은 각종 혁명이 발발하며 나폴레옹의 비전은 대부분 실현되고 유럽 대부분 국가의 왕정, 제정 체제는 붕괴했다. 또한 나폴레옹이 도입한 법률과 제도 역시 워낙 각 국가들의 사정에 잘 맞게 짜여져 있던 까닭에 나폴레옹의 흔적을 지우고 싶어 안달이던 그의 정적들조차 나폴레옹이 남긴 유산을 크게 바꾸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폴레옹이 근대 유럽사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나폴레옹의 역사적 위치는 영국의 역사학자 토머스 칼라일에게 영향을 주어 영웅이 역사를 만들고 이끌어간다는 영웅사관을 창시할 정도였다. 즉, 한 사람의 어마어마한 존재감 때문에 역사를 보는 관점마저 영향을 받았다.

    나폴레옹은 백일천하 동안 불리한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자유주의자들과 동맹하여 "자유 제국"을 약속했다. 짧은 지배기간 때문에 사실상 이 약속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실제로 그 약속을 지킬 의지가 있었는지도 의문이지만... 실제로 나폴레옹은 몰락 이후 "내가 그런 헌법 만든다고 시간이나 낭비했다니! 어차피 다시 유럽의 지배자가 되면 전부 없애버릴 의회였는데!"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도 이 약속 때문에 그는 "자유주의 황제"라는 하나의 환상을 추가했다. 특히 부르봉 왕조 복고 왕정의 무력함과 혁명의 성과를 부정하려는 퇴행성은 나폴레옹에 대한 향수를 강하게 불러일으켰고 결국 군국주의와 내셔널리즘, 자유주의, 혁명과 일인 독재가 결합한 "보나파르티즘"이라는 프랑스 특유의 기묘한 정치사상을 만들게 된다. 그의 조카 나폴레옹 3세가 보나파르티즘을 통해 권력을 획득했고, 나폴레옹 3세까지 몰락한 뒤에도 그 영향력은 지속되었다. 국가 내 계급과 출신 배경에 따른 봉건적 사회적 차별 관계를 시민 개병제를 통해 평등하게 만들고 이러한 자유주의적 사회적 비전을 강력한 1인 군사 독재자의 권위를 통해 이룩하자는 얼핏 보면 진보적이면서도 그 방법은 지극히 권위주의적인 정치적 풍조는 19세기, 20세기 들어 유럽, 나아가 세계사 전반에서 강력한 영향을 발휘해왔다. 20세기 전간기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를 비롯한 중동부 유럽의 군사정권, 내셔널리즘과 평등 사상이 기묘하게 결합된 파시즘, 박정희나 장제스 같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소위 스트롱맨 군사 독재자들, 극우적 내셔널리즘과 과격한 평등주의를 설파하며 하층 대중의 지지를 끌어모으는 21세기의 우파 포퓰리스트에 이르기까지, 보나파르티즘의 영향을 받은 사상들은 근대 세계사 속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풍조로서 굳어졌음을 볼 수 있다. 사실상 현대의 독재자의 기준을 만든 인물이라고 볼 수 있으며, 후술하겠지만 독재자들에게 있어 나폴레옹은 동경의 대상이기도 하다.

    혼란스러웠던 프랑스 초기의 공화정이나 무기력하고 퇴행적인 부르봉 왕조의 복고 왕정과 비교해 보면 나폴레옹 시대는 문제도 많았지만 분명 영광과 번영이 있었던 시대였다. 그러나 그 번영은 무수한 전쟁을 통해 주위 나라들에게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받아내며 일구어낸 것인 만큼 무작정 칭송하기는 곤란하다. 나폴레옹이 법전의 완성을 위시하여 여러 선구자적 정책들을 도입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당시 사회의 난맥상은 단기간에 해결하긴 어려운 것들이었다. 결국 정부 재정의 문제나 당대 사회의 혼란들을 해결한 것은 그런 선구자적 정책이나 제도 개혁이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의 승리였다. 그 승리가 계속되었을 때는 아무 문제도 없어 보였지만 지속적인 전쟁은 착실히 국력의 소모를 불러왔고 전쟁에서 패배했을 때 그는 너무나 쉽게 몰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