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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을미 사변을 일으킨 이유는 무엇인가요

일본이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시해하였는데요 . 국왕도 아닌 왕비를 굳이 안 살해할 이유가 있었는 배경과 원인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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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94년 청일전쟁을 일으키며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은 조청산민수륙무역장정을 폐기하고 조선 정부에 친일내각을 구성시켰습니다.

    전쟁에서 북양군을 와해시킨 후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해 조선의 자주, 독립 및 요동 반도와 타이완 섬 할양, 전쟁배상금을 받아내자 러시아는 독일 ,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게 요동 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할 것을 요구, 3개 열강의 압박으로 일본은 요동반도를 반환하게 됩니다.

    그 동안 러시아와 우호적인 외교를 해왔던 고종과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통해 일본을 견제할수 있을 것으로 보고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를 자주 불러 조-러간의 공조를 논의했고 인아거일의 노선을 적극적으로 추진합니다.

    이에 따라 친일내각에 대한 축출을 단행, 일본 공사관 및 일본인 고문단의 지지를 받던 어윤중, 김윤식 등 친일 성향의 관료들이 고종과의 마찰, 박영효가 주도한 조의연 파면 등에 책임을 물어 축출되고 이완용을 중심으로 한 친러 성향의 관료들이 중용되게 됩니다.

    그러자 친일 대신이었던 박영효는 명성황후가 자신의 숙청을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은 뒤 명성황후의 암살을 모의하지만 이후 을미사변에 가담하는 유길준의 내부 고발로 실패, 일본으로 도주하고 박영효가 명성황후 암살미수 사건 혐의로 수배되면서 상당수 친일 관료들이 중앙에서 쫓겨나면서 일본의 입지가 좁아지게 됩니다.

    망명한 박영효의 말에 따라 일본은 조-러 간의 비밀협약 의혹을 신빙성있게 여겨 일본의 향후 외교방침 전환을 위해 이토내각과 정계, 육해군부 내에서 갑론을박이 오갔는데 이때 유신지사이자 당시 조선공사 이노우에 가오루의 오랜 정적이었던 다니 다테키의 추천을 받아 새로 조선공사로 부임한 퇴역 육군 중장 미우라 고로가 조-일 외교의 전면에 등장, 배후로 추정되는 일본 당국 관계자들은 미우라로 하여금 명성황후를 시해함으로써 국면을 전환하고자 합니다.

    연이어 친일관료가 실각되자 미우라의 전임인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가 직접 입궐해 고종과 황후에게 상당한 거액의 자금을 바치고, 부임 직후 약속했던 것처럼 일본은 언제나 조선 왕실의 안전과 통치권을 보장한다며 협조를 부탁하지만 고종 내외는 거절했고 은밀히 러시아에 원조를 요청하는 동시에 박영효를 비롯한 친일 내각을 실각시키고 새로운 친러 내각을 구성합니다.

    이에 일본 측은 조선에서의 영향력 회복을 위해 명성황후를 살해할 계획을 논의하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그것은 일본이 내정 간섭을 하는데 있어 명성황후가 방해가 됐기 때문입니다.

    이는 흥선대원군과 이해관계가 맞아서 민비 시해 사건에 흥선대원군도 일정 부분 협조를 했습니다.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갑오개혁을 통하여 조선 내정에 관여하게 된 일본은 청일전쟁에 승리한 뒤 박영효(朴泳孝)·김홍집(金弘集)을 중심으로 한 제2차 김홍집·박영효 내각을 만들어 조선 침략을 위한 영향력 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이때 프랑스·러시아·독일 등 3국은 일본의 대륙침략 저지를 위해,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이 차지한 랴오둥반도[遼東半島]를 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한, 이른바 '삼국간섭(三國干涉)'으로 일본의 세력 확장에 제동을 걸었다.


    그동안 일본의 강압하에 내정개혁을 추진한 조선은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Karl Ivanovich Weber)와 제휴하고 친일세력을 제거하기 시작하였는데 명성황후가 이를 주도하였다. 이에 친일세력인 박영효는 1895년 7월 명성황후 시해 음모를 계획하였다가 발각되어 일본으로 달아나고 친일파는 세력을 상실하였다. 8월, 조선은 민영환(閔泳煥)을 주미전권공사(駐美全權公使)로 등용한 동시에, 친일계인 어윤중(魚允中)·김가진(金嘉鎭) 등을 면직시키고 이범진(李範晋)·이완용(李完用) 등의 친러파를 기용하여, 제3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어, 친미·친러세력이 우세하게 되었다. 게다가 주한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조선에 약속한 증여금 300만 원을 일본이 제공하지 않자, 조선에서는 배일세력이 증가하였다.

    일본에서는 이노우에 가오루 대신 육군 중장 출신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를 주한일본공사로 파견하였다. 조선은 일본의 강압에 따라 제정한 신제도를 구제도로 복구하고, 일본인 교관이 훈련시킨 2개 대대의 훈련대도 해산하고자 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우라는 명성황후를 시해할 계획을 세우고, 1895년 10월 2일 하수인으로서 한성신보사(韓城新報社)에 있는 낭인(浪人)을 이용하고자 사장 아다치 겐조[安達謙藏]를 공사관으로 불러 6,000원의 자금을 주고 명성황후 시해의 전위대로 삼아, 공덕리(孔德里) 아소정(我笑亭)에 있는 흥선대원군을 궁중으로 호위하는 일을 시켰다. 그 외 일본군 수비대와 일본인 거류지 담당 경찰관 및 친일 조선인까지 동원할 계획을 세우고, 훈련대의 우범선(禹範善)·이두황(李斗璜)·이진호(李軫鎬) 등 3대대장과 전 군부협판(軍部協辦) 이주회(李周會)를 포섭하였다.


    한편 정부에서는 군부대신 안경수(安駉壽)를 일본공사관에 보내어 훈련대 해산과 무장해제, 민영준(閔泳駿)의 궁내부대신 임명을 통고하였다. 일본은 상황이 급변함을 직감하고 명성황후 시해계획을 10월 8일 새벽으로 결행하였다. 일본인 자객들은 서대문을 거쳐 우범선·이두황이 지휘한 조선 훈련대와 합류하여 광화문을 통과하였다.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洪啓薰)과 군부대신 안경수가 1개 중대의 병력으로, 이들의 대궐 침범을 제지하다 사망하였다. 흉도(兇徒)들은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과 홍계훈을 살해한 다음, 이어서 왕비의 침실인 옥호루(玉壺樓)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시신에 석유를 뿌려 불사른 뒤에 묻었다.

    출처 :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