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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파리매91
똑똑한파리매9123.02.22

찰리채플린은 왜 공산주의자로 몰렸나요

찰리채플린은 영화를 만드는 배우로 알고 있는데 왜 갑자기 공산주의자로 몰렸었는지 궁금합니다 답변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반공주의자들은, 파시즘에 반대하고

    인류애와 평화의 신념을 이야기했던 〈위대한 독재자〉의 후반부 연설

    장면을 두고도 공산주의자라고 그를

    매도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영국 국내정보부가 1950년대 초 미국 연방수사국의 요청으로 찰리채플인의 출생기록, 사생활을 조사했는데

    MI5의 내부 문서에 따르면 미국에서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던 당시 FBI는 채플린을 공산주의 동조자로 확신하고 국외로 추방하기 위한 확실한 증거를 수집하여고 영국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MI5는 조사 결과 채플린을 위험 인물로 볼 만한 근거가 없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럼에도 미 당국은 1952년 채플린의 입국을 거부하고 채플린은 스위스에 정착해 세상을 떠날 때 까지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미 의회는 자본주의를 비난하는 영화 모던타임스와 독재자를 희화화한 위대한 독재자 등에 출연한 채플린을 좌익이념을 지지하는 대표 인사로 낙인 찍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태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은 그의 작품에서 공산주의적인 요소를 자주 다루었기 때문에 그의 정치적 견해에 대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특히 그의 1940년대 후반 작품 'The Great Dictator'(위대한 독재자)에서는 나치 독일과 히틀러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을 담았습니다. 이러한 작품들로 인해 그는 미국 정부의 맥카시즘 운동과 공산주의 추적의 대상이 되었고, 1952년에는 미국에서의 활동 금지 처분을 받게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일단 그때의 미국내 상황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일명 매카시즘이라고 합니다.미국 위스콘신주(州) 출신의 공화당 상원의원 J.R.매카시의 이름에서 나 온 말입니다.50년 2월 “국무성 안에는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매카시의 폭탄적인 연설에서발단한 것이져. 1949년 이래 수년에 걸쳐 매카시가 상원의 비미(非美)활동특별조사위원회를 무대로 하여 행한, 공산주의자 적발 추방의 선풍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냉전이 심각해지던 상황에서 전통적인 미국자본의 시장이던 중국의 공산화와 잇달아 발생한 한국의 6 ·25전쟁 등 공산세력의 급격한 팽창에 위협을 느낀 미국국민으로부터, 그의 주장이 광범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매카시즘이 먼저 공격목표로 삼은 것은 중국정책에 영향력이 컸던 외교관, 국무성 및 중국통 정치학자 오언 래티모어, 국제법학자 제삽 등이었는데, 대통령 H.S.트루먼도 공산주의자에게 약하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당시 국무장관 J.F.덜레스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매카시즘의 공포에 떨었고, 그 때문에 미국의 외교정책이 필요 이상으로 경색된 반공노선을 걷게 되었다. 유력한 정치가나 지식인들도 매카시즘에 두려
    움을 느끼고 그에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매카시는 육군에 도전하게 됩니다.군대에도 공산주의자가 있다고 하지만 그게 큰 타격이었습니다.급격히 힘을 잃게 됩니다.

    채플린도 매카시 열풍을 벗어날수 없었습니다. '무슈 베르두'상영. 미국 여러 주에서 상영금지. 비미국행위 조사 위원회(C.U.A)에 의해 몇 번에 걸쳐출두 명령을 받았으나 불응. 하원의원 존 랑킨은 채플린을 미국에서 추방하고 그의 영화를금지하도록 국회에서 요구하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찰리 채플린은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주장하였지만, 그의 작품들과 행동들이 공산주의적인 것으로 인식되어 공산주의자로 몰렸습니다.

    1920년대에는 미국에서 레드스케어(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공포와 반발이 컸는데,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채플린은 공산주의 시사회를 참석하고 공산주의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을 제작해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특히 그가 감독 및 주연을 맡은 1940년 영화 '독재자'는 소련을 모티브로 한 영화로, 그의 공산주의적인 시각을 나타내었습니다.

    또한 1940년대 후반에는 맥카시즘(적폐청정 운동)의 일환으로, 채플린이 공산주의자로 몰리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 시민권을 박탈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채플린 자신은 이러한 비난을 부인하며, 자신의 작품에서는 인류애와 자유주의를 주제로 다루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