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네오나치란것은 히틀러를 추종하는것인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네오 나치(Neo-Nazi)는 자신들을 '나치의 후계자'라고 자칭하며 민족사회주의를 숭배하는 사람들로, 보통 극도의 국수주의, 제노포비아와 인종차별, 반유대주의[4], 백인우월주의와 결합하는 때가 많으며, 드물게 몽골처럼 유색인국가에서 네오 나치를 표방할 경우 극단적인 국수주의랑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대표격 국가인 독일, 오스트리아 같은 나라뿐만 아니라 같은 추축국이었던 이탈리아, 일본 및 이들과 연루된 인도, 이란을 비롯해 추축국과 적대적인 미국, 러시아, 우크라이나, 몽골 등등을 포함해 전세계에 걸쳐 골고루 분포한다. 심지어는 이스라엘에서도[5] 그 존재가 확인된 바 있다.사실, 실제 나치들과 마찬가지로 본인들도 "나치"라고 불리는 건 싫어하고 정식명칭인 국가사회주의자라고 불리는 것을 선호한다. 우연히도 바이에른의 뮌헨 지방에서 농부 이름으로 흔한 이름 이그나츠(Ignatz)의 약칭이기도 해서 수구꼴통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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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북전쟁의 원인이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미국이 노예 해방 문제를 둘러싸고 남북으로 분열됐다. 공업이 발달한 북부 지방에서는 노예제를 폐지하자는 여론이 강했는데, 이는 농장에 묶여있는 노예를 해방시켜야 자본가들이 고용할 수 있는 공장 노동자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반면에 노예를 이용한 플랜테이션 농업이 성행했던 남부에서는 농장주들이 노예제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전쟁은 4년 동안 계속된 끝에 공업 생산력이 우세한 북부의 승리로 끝나 미국 전체에서 노예제가 폐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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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가 관악산 밑으로 이전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캠퍼스 이전과 종합화(1976~1985년)=1975년 서울대는 관악산 기슭으로 캠퍼스를 옮기면서 거대한 변화를 맞는다. 서울 동숭동·정릉, 수원 등에 흩어져있던 단과대학들이 하나의 공간에 모이면서 명실상부한 종합대학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이는 단순히 캠퍼스의 지리적, 공간적 통합의 의미를 넘어서 우리나라에 근대 대학시스템이 도입되는 계기가 됐다.문리과대학이 인문과학·사회과학·자연과학으로 나눠진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학문에 '과학'적인 시스템이 도입됐다. 대학 내부에서는 학문의 실용성이 강조되고 사회에서는 산업화에 따른 기능적인 인재를 필요로 했다. 이 시기에 서울대는 대학원 체제를 본격적으로 갖추고 학위를 엄격하게 주는 미국식 대학교육으로 전환되어 갔다. 이러한 서울대의 움직임은 다른 대학으로 전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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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의 다양한 나라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산업혁명으로 영국이 근대화의 기초를 닦은 최초의 국가가 되면서 영어의 영향력과 영국의 문화적인 수준 또한 이 시기부터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최고를 향해 나아갔다. 그렇게 되면서 영어는 국제어로의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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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은 처남 4명을 죽게했다는데?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태종이 공신들을 숙청할 때에는 죽이기보다 적당한 곳으로 귀양을 보내놓고 방치하거나 직위를 강등시키는 등, 간접적인 수법으로 실권을 빼앗았다. 그러나 왕실의 외척에 대해선 이상할 정도로 자비가 없어서 처가인 여흥 민씨 네 명의 처남을 다 죽여버렸고, 나중엔 사돈 가문(세종의 처가인 청송 심씨)마저 박살을 내버렸다.죽인 사람 자체는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태종에게 피도 눈물도 없는 대숙청을 벌인 군주라는 이미지가 있는 이유가 바로 외척 말살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숙청은 대체로, '평소 절친한 인척들을 갑자기 불문곡직하고 잡아들인다 → 뜬금없이 역모 혐의를 뒤집어 씌운다 → 혹독하게 고문해서 강제로 자백을 받아낸다 → 일사천리로 죽인다'는 과정으로 진행됐다.정작 유배형에 그쳐 그나마 목숨이라도 건진 것은 실제로 잘못한게 있는 이거이와 김한로 정도였고, 자기가 보기에 나중에 왕실을 위협할 권세를 가질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가문이라면 아무 잘못이나 욕심이 없어도 가차없이 박살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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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고기로 만든다는 하몬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돼지가 고대 스페인으로 처음 들어왔을 때에는 냉장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더운 날씨에 상하지 않고 오래도록 먹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소금에 절여 말린 데에서 시작되었으며, 따로 익히지 않고 생으로 먹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비슷한 건조 육류인 살라미 등과 비교하면 기름기가 적은 편이다. 따로 익히지 않고 생으로 먹을 수 있으며 샐러드나 샌드위치 등에 끼워 먹거나 치즈 등과 함께 술안주로 먹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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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이 무엇때문에 친일을 하게 된건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약육강식의 법칙을 미국에가서 몸소 배우고, 강자에 붙은거죠. 그래서 을사조약으로 나라를 팔아먹고 자신은 실리와 패권을 잡은거지요~ 약자로서는 뜻을 펼칠수 없었으니 나라를 팔아서라도 강자가 되고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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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대동법에 관하여 질문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대동법이란공납을 지방 특산물에서 미곡으로 바꾸어 통일한 조선의 조세제도. 1608년 경기도에서 처음 시행되기 시작하여 1708년에 완성되었다. 호역으로서 존재하던 각종 공납과 잡역의 전세화가 주요내용이었다. 대동법에서는 공물을 각종 현물 대신 미곡으로 통일하여 징수했고, 과세 기준도 종전의 가호에서 토지의 결수로 바꾸었다. 따라서 토지를 가진 농민들은 공납의 부담이 다소 경감되었고, 토지가 없는 농민이나 영세농민들은 이 부담에서 제외되었다. 대동세는 쌀로만 징수하지 않고 포나 전으로 대신 징수하기도 했다. 대동법의 시행은 조세의 금납화로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을 촉진시켰으며, 임진왜란 이후 파국에 이른 재정난을 타개할 수 있었다. 또한 공인들의 활동에 의해 유통경제가 활발해지고 상업자본이 발달했으며, 공인의 주문을 받아 수요품을 생산하는 도시와 농촌의 수공업도 활기를 띠었다.정의대동법 시행 기념비 탁본대동법 시행 기념비 탁본 1659년 대동법의 성과를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비의 탁본. 대동법은 공납을 특산물에서 미곡으로 바꾸어 통일한 납세제도로, 상품화폐경제를 촉진시키고, 임진왜란이 야기한 재정난을 타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대동법 시행 기념비는 영의정 김육이 세웠으며, 기념비는 경기유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되어 있다.ⓒ Eggmoon/wikipedia | CC BY-SA 3.0조선의 조세제도. 지역의 공납을 토지의 결수를 기반으로 산정하고, 지방 특산물과 같은 현물납을 미곡이나 전포로 바꾸어 납세하도록 한 조세제도이다. 1608년(광해군 즉위) 경기도에서 처음 시행되기 시작하여 1708년(숙종 34)에 완성되었다. 시행 초기에는 ‘경기선혜법(京畿宣惠法)’이라는 명칭으로 반포되었으나 후에 '대동법'이라는 명칭으로 통일되었다.배경대동법은 호역(戶役)으로서 존재하던 각종 공납(貢納)과 잡역(雜役)의 전세화(田稅化)가 주요내용이었으며, 이는 중세적 수취체계에 있어 획기적인 변화였다. 조선정부 재정수입의 하나인 공물은 농민의 생산물량을 기준으로 한 과세가 아니라 국가의 수요를 기준으로 한 과세였기 때문에 과세량에 무리가 있었다. 또한 고을에 따라서는 생산되지 않거나 이미 절산(絶産)된 물품이 부과됨에 따라 방납(防納)이 성행하게 되었다.그래서 임진왜란 이전부터 이미 공물의 과중한 부담과 방납의 폐단, 군포부담의 가중 등이 겹쳐서 농민층의 유망(流亡)이 증가하던 터였다. 그리고 전쟁 후 정부가 재정 파탄을 수습하기 위해 재정수입을 급격히 확대시키는 과정에서 농민들의 공물 부담이 늘어나면서 그 징수의 기반마저 붕괴될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이와 같은 폐해를 조정하여 농민의 유망을 방지하면서 한편 국가 재정수입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대동법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동법의 실시는 방납의 폐해를 조정하기 위한 논의 과정에서 점차 구체화되었다. 이 가운데 임진왜란 이전부터 검토되어왔던 것은 공물을 미곡으로 대신 거두는 대공수미(代貢收米)의 방안이었다.1569년(선조 2) 이이(李珥)에 의해 건의된 대공수미법은 징수된 공납미를 정부가 지정한 공납 청부업자에게 지급하고, 이들로 하여금 왕실·관아의 수요물을 조달케 함으로써 종래 불법적으로 관행되던 방납을 합법화시켜 정부의 통제하에 두고 이를 통하여 재정을 확충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러한 방안이 논의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15세기 후반 이후 계속된 유통경제의 성장이 자리잡고 있었다.경과그러나 대공수미의 방안은 당장은 실현되지 못하다가 전쟁으로 전국의 토지결수가 줄어 재정수입이 감소하게 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다시 제기되면서 광해군 즉위년(1608년) 5월, ‘경기선혜법(京畿宣惠法)’이라는 명칭으로 실시하게 되었다.대동법은 1608년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주장에 따라서 우선 경기도에 시험적으로 시행되었고, 이후 찬반양론의 격심한 충돌이 일어나는 가운데 1623년(인조 1)에는 강원도에서 실시되었다. 그리고 17세기 중엽에는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순으로 확대되었고, 1708년에 황해도까지 실시됨으로써 평안도·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시행되기에 이르렀다.이와 같이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실시되는 데 100년이란 시간이 걸린 것은 새로운 토지세인 대동세를 부담하게 된 양반지주와 중간이득을 취할 수 없게 된 방납인들의 반대가 심했기 때문이었다.대동법 하에서는 공물을 각종 현물 대신 미곡으로 통일하여 징수했고, 과세의 기준도 종전의 가호(家戶)에서 토지의 결수로 바꾸었다. 따라서 토지를 가진 농민들은 1결 당 쌀 12두(斗)만을 납부하면 되었으므로 공납의 부담이 다소 경감되었고, 무전농민(無田農民)이나 영세농민들은 일단 이 부담에서 제외되었다.대동세는 쌀로만 징수하지 않고 운반의 편의를 위해서나 쌀의 생산이 부족한 고을을 위해 포(布)나 전(錢)으로 대신 징수하기도 했다. 따라서 충청·전라·경상·황해의 4도에서는 연해읍(沿海邑)과 산군(山郡)을 구별하여 각각 미 혹은 포·전으로 상납하도록 했다. 이와 같이 공납의 전세화를 기본으로 하는 대동법은 지금까지의 현물징수가 미·포·전으로 대신됨으로써 조세의 금납화(金納化)를 촉진했다. 농민들로부터 거두어진 대동미·대동포·대동전은 처음에는 지방관아의 경비로서 절반이 유치되고 나머지는 중앙으로 보내어지다가 점차 대부분이 중앙으로 상납되었다.이를 관리하는 전담기관으로서 선혜청(宣惠廳)이 신설되었고, 여기서는 징수된 대동미를 물종에 따라 공인들에게 공물가로 지급하고 필요한 물품을 받아 각 궁방과 관청에 공급했다(선혜청). 따라서 공물의 조달은 선혜청으로 일원화되었다.의의대동법의 시행은 조세의 금납화로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을 촉진시켰으며, 임란 이후 파국에 이른 재정난을 일정하게 타개할 수 있었다.그리고 공인들의 활동에 의해 유통경제가 활발해지고 상업자본이 발달했으며, 또한 공인의 주문을 받아 수요품을 생산하는 도시와 농촌의 수공업도 활기를 띠었다. 공인의 상업자본가로의 성장과 수공업자의 상품생산자로의 변신은 조선후기 사회경제 발전의 일면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한편 대동법 시행에 따른 농촌수공업의 발전은 농민층분화를 촉진시켜 토지소유 관계의 변화를 가져옴으로써 새로운 지주층의 성장도 가능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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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록들은 믿을만한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물론 역사라는게 전해져오면서 조금은 과장되거나 왜곡될 수도 있으나, 전혀 사실관계가 없는 허무맹랑한 사건이나 사실을 기록하지는 않습니다.승자의 기준에서 기록하기때문에 보는 시각이나 느낌이 다르게 여겨질 수도 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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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운동회의 유래는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안타깝게도 일제의 잔재입니다. 그 옛날 학창시절 가을 운동회가 되면 온동네 사람들이 어린이나 어른 할것없이 학교 운동장에 모여 함께 즐겼던 잔치!~~ 일제강점기 일본의 문화입니다.그러나 이제 우리 고유의 문화로 계승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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