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는 언제 지어졌는지 알고 싶어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청와대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집무실 및 관저로 사용되었던 시설이며, 영빈관 등은 여전히 실무에 활용된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로 1(세종로)에 위치한다. 광복 이래 이승만 정부부터 문재인 정부까지 청와대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그 공무를 수행하는 대통령 집무실과 퇴근 후 기거하는 대통령 관저 기능을 가진 대통령궁(大統領宮)이자, 나아가 헌법기관인 대통령을 보좌하는 비서진 및 공무원들이 근무하는 행정기구 대통령부(大統領府)를 의미했다.2022년 윤석열 대통령 집권 후 부터는 청와대 영빈관 같은 부분적 실용적 시설만 회의, 포럼 등 일부 실무와 행사용 목적으로 적극 사용하고, 그 외 대부분 시설은 국민에게 전면 개방하여 집무실 기능은 하고 있지 않다. 개방 후 청와대는 문화체육관광부 청와대 관리활용추진단이 운영한다.[1]이에 국가기관으로서의 대통령, 또는 대통령비서실을 줄여서 청와대, 청(靑)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2] 집무실이 이전된 이후에는 청와대라는 표현을 쓸 수 없고 용산 청사의 특별한 이름이 없어 이러한 고유명사보다는 기능적 명칭인 대통령실(大統領室)이 사용되고 있다.[3]1948년 이승만 전 대통령이 미군정사령관 관저로 사용되던 구 조선총독 관저를 이양 받아 대통령 집무실로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 시초로, 조선시대의 지명에 따라 경무대(景武臺)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제2공화국 윤보선 전 대통령이 경무대 본관의 청기와 지붕에 착안하여 청와대라는 이름으로 개칭하였고 해당 형태로 제5공화국을 지나 민주화를 통해 군사 정권이 무너지고 수립된 제6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노태우 정부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이후 노태우 전 대통령이 임기 말기에 민족의 자존을 높인다는 이유로 한옥 양식의 청와대 본관을 신축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대한민국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일 뿐만 아니라 국가원수로서 청와대에 근무하는 인원들은 국가원수를 보좌하고 명을 받아 행정부의 장관과 차관을 지휘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또한 청와대에서 파견 근무하고 행정부로 돌아오는 경우에는 청와대 근무자, 정치인들과 친분이 형성되고 능력이 있으니까 청와대로 파견 간다는 인식도 있어서 청와대 파견 근무 자체가 경력이 되어 복귀 후 행정부 내에서 입지가 강화된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공무원들과 정치인들이 가장 근무하고 싶어하는 '대한민국 권부(權府)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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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이라는 재료의 역사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실리콘 개발을 향한 기나 긴 여정을 통해 놀랍도록 다재다능한 화학물질이 탄생했다. 실리콘은 물성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가소제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 광범위한 요구사항을 충족할 수 있는 실리콘의 능력은 특이한 화학적 성질에서 비롯됐다.지난달 칼럼에서 언급한 1938년에 있었던 General Electric(제너럴일렉트릭)과 Corning Glass Works(코닝글래스웍스)의 만남 이후 상용 실리콘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되는 두 개의 경로가 나란히 펼쳐 졌다. Corning는 J. Franklin Hyde(J. 프랭클린 하이드)가 그리냐르 반응법을 사용한 연구를 계속해 나갔다. 1942년, 그 작업은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추가 자원이 필요했다. Corning은 1943년 초 Dow Chemical과 합작 투자를 통해 미시간주 미들랜드 소재의 Dow Chemical 공장 근처에 Dow Corning(다우코닝)의 플랜트를 건립했다. 유기화학에 친숙한 사람이라면 그리냐르 반응법용 시약이 마그네슘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당시 Dow Chemical은 미국 내에서 마그네슘을 생산하는 유일한 업체였다.한편, GE 쪽에서는 Eugene Rochow(유진 라코우) 박사가 실리콘 실험에 착수해, 그림 2와 같이 현재의 실리콘이라는 화학물질의 기초가 되는 메틸 실리콘을 생산할 수 있는 실용적 방법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1940년 5월, Rochow 박사는 구리를 촉매로 사용해 염화메틸과 실리콘 원소를 반응시켜 메틸 클로로실란을 직접 합성하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이로써 그리냐르 공정에 의존하지 않고도 Dow의 독점을 효과적으로 깨고 GE가 상용 실리콘 사업에 진출할 수 있는 문을 열었다. 이는 1944년 11월 공식적으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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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개가 왕건에게 몸을 의탁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아들인 견훤이 아버지인 아자개를 홀대했기 때문이지요.훗날 견훤은 왕건에게 나라를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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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관료 복장의 흉배에 쓰인 문양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쌍학흉배는 밝은 녹색을 바탕으로 단정학과 오색구름을 세필로 화려하게 그렸고, 삽화금대도 정교하게 묘사하였다. 짙은 먹으로 묘사된 교의를 덮고 있는 표범가죽은 가늘고 구불구불한 선으로 사실적으로 그렸다. 정형화된 공신도상으로부터 보다 자연스러운 형식으로 변모하던 18세기 초엽의 정교한 작품으로 중요한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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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가 이성계와 협력하지 않은 이유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죽어서도 고려 임금을 섬기는 마음을 바꾸지 않겠다는 내용을 담은 이 시는 ‘단심가’라고 불리지요.*이방원은 정몽주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걸 깨닫고 그를 죽이기로 마음먹고 부하 조영규를 불렀어요. “오늘 밤 정몽주를 없애도록 하시오.” “예, 알겠습니다.”*조영규는 쇠뭉치를 들고 선죽교 밑에 숨어 정몽주가 지나가기를 기다렸어요. 한참을 기다리자 드디어 정몽주가 나타났어요. 정몽주는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 주막에서 술을 한잔 마시고 오는 길이었어요.*“휴우, 이방원이 드디어 나를 없앨 모양이니 그만 가봐야겠구나!”*정몽주는 기울어 가는 고려와 자신의 운명을 생각하며 긴 한숨을 내쉬고는 시종에게 말을 가져오게 했어요. 정몽주는 말에 거꾸로 올라탔어요.*“대감 마님, 말을 거꾸로 타셨습니다.” 시종은 정몽주가 술에 취해 실수를 한 줄 알고 웃으며 말했어요.*“알고 있다. 맑은 정신으로 죽을 수 없어 술을 마셨고, 흉기가 얼굴을 덮칠 것이 끔찍해 말을 거꾸로 탔느니라.”*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 정몽주는 결국 조영규가 휘두른 쇠몽둥이에 머리를 맞고 선죽교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이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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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무대 MLB에 진출한 한국선수는 누구인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박찬호,류현진,추신수,최지만,김하성,배지환 등앞으로 바람의 손자 이정후도 보게될겁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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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에 마지막에 나오는 율도국은 실제 나라인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율도국(栗島國)은 현실이 아닌, 《홍길동전》에서 바다 건너 대양의 한 섬으로 표현된 가상 국가이다. 수평선 너머의 외딴 신비의 섬으로, 길동의 이상이 뿌리 내릴 수 있는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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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은 어떤업적을 세웠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 역사에서 '3대 대첩(大捷)'을 꼽는다면, 두말 할 것도 없이 을지문덕의 살수대첩과 이순신의 한산대첩(閑山大捷), 그리고 강감찬(姜邯贊)의 귀주대첩(龜州大捷)을 든다. 그중 고려 시대 거란의 수십만 대군을 맞아 귀주에서 섬멸한 귀주대첩을 이끈 장군이 바로 강감찬이다.강감찬은 948년(정종 3)에 태어났다. 그의 탄생과 관련해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한 사신(使臣)이 밤중에 시흥군으로 들어오는데 큰 별이 어떤 집으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가 사람을 보내 찾아보니 마침 그집 부인이 사내를 낳았다. 그가 바로 강감찬이었다고 한다. 강감찬의 어릴 때 이름은 은천(殷川)이다. 강감찬의 아버지는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할 때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 된 강궁진(姜弓珍)이다. 《고려사》에는 강감찬이 어려서부터 공부하기를 좋아하고 신통한 지략이 많았다고 전한다.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사실 때문에 강감찬을 무인으로 알기 쉽지만, 사실 강감찬은 문관이었다. 983년(성종 2) 진사시에 합격하고, 복시(覆試)에서 갑과에 장원한 뒤 관직에 오른 후 예부시랑·국자제주(國子祭酒)·한림학사·승지·중추원사·이부상서를 역임했다.1010년(현종 1), 거란은 30만 대군을 이끌고 두 번째로 고려를 침략했다. 우여곡절 끝에 등극한 현종은 전쟁에 미처 대비할 틈이 없었다. 그래서 고려군은 속수무책으로 패전을 거듭했다. 이때 강감찬은 장수로 나서지는 않았으나 왕에게 끝까지 항복하지 말 것을 주장해 관철시켰다. 왕이 피신한 사이 다행히 양규(楊規)가 무공을 크게 세워 거란을 물리쳤다. 그러나 거란은 1018년(현종 9)에 또다시 고려를 침략했다. 이때 강감찬이 나섰다. 강감찬은 흥화진(興化鎭)과 귀주(龜州)에서 뛰어난 전략과 기지로 거란군을 대파하고 승리했다. 고려는 안정을 되찾아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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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에게 신사참배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 행사인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신사(神社)란 일본 황실의 조상이나 신대(神代)의 신 또는 국가에 큰 공로가 있는 사람을 신으로 모신 사당을 말한다. 본래 메이지[明治] 일왕 시절 일본 군인들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1869년 '쇼콘샤[招魂社]'라는 명칭으로 창건됐으나, 1879년 '평화로운 나라'라는 뜻의 야스쿠니로 개명했다.야스쿠니 신사는 청일전쟁 · 러일전쟁 · 만주사변 · 제2차 세계대전 등 일본이 벌인 주요 전쟁에서 숨진 군인 및 민간인 246만 6000여 명의 위패를 보관해 두고 이들을 신격화해 제사를 지내는데,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쟁 유물 및 전범들의 동상도 전시되어 있다. 제사는 매일 지내며 봄·가을에는 대규모 위령제를 열고 일본 건국일(2월 11일) 등 기념일에는 수시로 각종 행사를 벌인다. 특히 종전기념일인 8월 15일에는 우익들의 순례성지로 변한다.야스쿠니 신사는 일본 왕실이 경비를 부담하는 특별 관폐(官幣) 신사로서 제국주의 시절에는 군국주의 확대정책을 종교적으로 뒷받침하는 역할을 한 것은 물론 일왕 숭배와 군국이념을 조장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국영 신사라는 지위가 박탈되면서 국가관리에서 벗어나 일개 종교법인으로 격하됐으나, 국가적 보호를 둘러싼 논의는 현재까지도 분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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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어떻게 통일신라가 되었는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나당연합으로 대동강이남으로는 신라가 다스리고 이북으로는 당이 차지하기로한 협상으로 정말 말도 안되는 협약이었죠... 그렇게 해서라도 통일을 하고 싶었는지... 암튼 신라의 말도 안되는 협상으로 반쪽짜리 통일이 되었습니다ㅡ 고구려의 대부분 땅을 잃고 발해땅도 잃고 .. 고구려가 통일을 했으면 지금쯤 중국의 대부분이 우리나라 땅일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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