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고집한 이유는 뭘까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대국이었던 중국이 ‘서구 세력과의 통상’으로 멸망하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흥선군과 조선 정치권은 통상에 큰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통상을 잘못하면 나라가 망한다! 서구와의 통상 이후 만일 근대화에 실패한다면? 영락없는 식민지 행이다. 통상과 무역은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의 투자이다흥선대원군은 시대상을 훌륭히 파악한 개혁가였다. 경복궁, 당백전에 관련해서라면 흥선대원군을 마구 욕해도 좋다. 욕먹을 충분한 자격을 갖췄다. 하지만 그의 쇄국정책과 근대화 실패는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다. 아무리 조선을 틀어잡은 개혁가라 하더라도 세계까지 틀어잡기에는 너무 조선이 약한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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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지금처럼 깡패가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깡패.불한당.건달 백수 어디에나 있지 않았을까요? ㅋㅋ힘있는놈이 약한사람을 약탈하는거....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역사가 되풀이되어 오늘날에도 이어지는것으로 압니다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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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에 과학도 포함될 수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되지요!^^인문학에 포함 안되는게 없습니다.지구상의 모든 학문과 과학과 자연과 보이는 모든것은 모두 인간과 문학과 연관되어있습니다.사람이 보고 만들어낸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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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가 분단된 이후 남북한 간의 관계 변화와, 발전 과정에 대해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안타까운 일이지만 정권이ㅜ바뀔때마다좋아졌다가 나빠졌다가를 반복하는 만날수없는 평행선마냥 늘 멀리ㅜ있었던것 같습니다ㅡ좋았을때도 북한은 그 분위를 이용해 핵갸발을 했고나빴을땐 대놓고 협박을 했지요...언제까지 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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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악의 발성은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게 되었을까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초기에는 그레고리안찬트 교회음악에서 사용되어지는 성가발성에서 점점 개인의 감정을 노래하는 발성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면서 극장에서 노래하게 되었는데, 극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고 들릴수 있도록 벨칸토ㅠ발성으로 자리잡게 되었지요. 엠프나 마이크없이 오케스트라를 뚫고 관객에게 전해져야하는 부드럽고 힘있는 발성으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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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독도는 한국과 일본의 끊임없는 분쟁지역으로 논쟁을 하는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바다자원의 쟁탈을 위함입니다.동해를 일본해로 만들어 엄청난 영역의 바다를 수탈하려는 쪽바리 전략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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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근거 중에서.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웃기는 개소리지요!^^그렇게 따지면 백제의 선조들이 오늘날의 일본 문화를 만들었으니 일본은 우리나라 땅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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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장량'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중국 초한쟁패기부터 전한(前漢) 한고조(漢高祖) 시대의 정치가 및 전략가. 본래 한(韓)의 귀족 출신으로, 유방의 참모로 활약하며 그의 천하통일에 크게 공헌했다. 이 공으로 유후(留侯)에 봉해졌다.한나라의 재상. 명참모를 의미하는 ‘장자방’의 주인공이다.항우에게 세력이 밀리던 유방을 도와 그가 함양을 돌파하게 하고, 홍문의 연에서 유방의 목숨을 구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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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들은 얼마의 임금을 받았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종 당시 기록을 보면, 궁녀와 시녀로 구별해서 현물(쌀,콩,북어)로 월급을 주었어요. 쌀과 콩은 식사용이고 북어는 반찬용이랍니다. 궁녀들의 월급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기본급과 수당으로 구성됩니다.기본급인 공상은 직급과 근무연수에 따라 온공상, 반공상, 반반공상으로 나누어 주었어요. 직무수당 격인 방자는 온방자와 반방자로 나뉘는데 직급이 높고 특별한 직무를 맡은 일부 상궁과 시녀들에게 주었어요.온방자는 매달 쌀 6말에 북어 20마리. 반방자는 온방자의 절반으로 쌀 3말에 북어 10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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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에는 실제로 초야권이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중세 유럽에 존재했다고 전해진다. 여러 원시사회에서도 이와 비슷한 관습을 찾아볼 수 있으나, 유럽에서 그러한 관습이 존재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증거는 영주의 초야권이 실제로 행사되었다는 기록이 아니라 봉신이 그것을 피하기 위해 지불한 몸값에 관한 기록들이다.많은 학자들이 이 문제를 규명하기 위해 연구를 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일부지역에서 아주 초기에 잠깐 이 관습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있으나 다른 곳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봉건 영주의 많은 권리들이 봉신의 결혼, 특히 봉신의 신부에 대한 영주의 선택권과 관련이 있었으나, 이러한 권리들은 거의 언제나 금전지불로 대체되었는데, 영주의 초야권은 사실상 이러한 종류의 또다른 세금을 징수하는 명목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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