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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가 외교담판을 지었다는데 진짜 말로만 종결한건가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송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던 서희는 당시 국제정세에 밝았다고 합니다. 송과의 전쟁이 중요했던 거란에게 고려와 큰 전쟁을 벌이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노련한 서희는 거란의 작전이 겁을 주어 송과 친한 고려가 쉽게 거란에 대항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을 알아차렸다고 합니다. 거란의 장수 소손녕은 고려가 거란을 위협하지 않을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이러한 사실을 거란의 황제에게 보고하여 허락을 얻으므로 말미암아 거란군은 서희에게 낙타, 말, 양,비단등의 선물을 주어 돌려 보냈다고하니 서희의 담판이 효력을 발휘한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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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4.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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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어떻게 아버지의 한을 풀었나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정조가 즉위한지 13년이 되었을때 그동안 백성들을 위해 펼친 여러 가지 개혁 정치로 나라가 안정이 되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풍수명당인 수원으로 옮기기로 하였지요 1789년 사도세자의 묘가 옮겨졌고 "현륭원"이라 이름 하였으며 수원의 도시 이름도 지위를 높여 화성으로 바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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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4.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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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상 권력이 막강했던 측천무후와 서태후의 공통점이 어느 정도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중국의 3대 악녀로 꼽히는 인물은 1.여태후 2.측천무후 3.서태후라고 알려져있는데 중국에서는 그들을 3대 악녀로 꼽지는 않고 있지요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식까지 죽였던 사건때문이라고 일본에서 건너온 개념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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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4.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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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탑의 다른 이름은 무엇이었나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불국사 대웅전 앞뜰에 동서로 마주 서 있는 석탑 가운데 서탑으로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는데 석가탑 혹은 무영탑 이라고도 하는데 이 탑에서 나온 '불국사무구정광탑중수기'는 1024년(현종15)에 불국사 무구정광탑을 중수하면서 남긴 기록인데 1038년(정종4년)에 다시 옮겨 적은것으로 이 탑을 "무구정광탑"으로 부르고 있어 고려시대에는 다보탑이나 석가탑으로 부르지 않았던것을 알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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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4.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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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 예술은 예술의 어떤 장르라 할 수 있나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벽화가 전국적으로 유행한 것은 2006년 경남 통영시 동피랑마을이 벽화로 명성을 얻으면서부터입니다 이후 서울 삼청동 벽화골목 부산 감천동 벽화마을 등 지금까지 민,관 의해 조성된 벽화마을만 100여곳이 넘지요 전문가들이 문제 삼는 것은 벽화 자체가 아니라 예술의 수많은 장르 중 벽화 하나에 심각하게 편중되어 있는 현실이라고 합니다 문화에 소외된 지역 주민들의 정서적 빈곤을 해소하고 마을 환경을 개선해 지역경제로 활성화 위한 힘이 예술에 있다고 믿는다면 어째서 그 수단이 벽화 하나뿐일까 전국 방방곡곡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벽화마을은 관 주도 문화사업의 한계와 고질적 전시행정, 대중적 무관심과 문화적 소양이 한데 얽혀 만들어낸 한국 공공미술사의 한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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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4.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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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백성들은 왜 세계 최강 몽골에 맞섰나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231년(고종 18년)에 1차 침입을 시작으로 한 몽골의 고려 침입은 1,259년(고종 46년) 고려와 몽골 사이에 강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거의 30년에 걸쳐 간헐적으로 지속되며 고려사회에 큰 피해를 주었지요. 고려가 몽골에 대한 항쟁을 지속할 수 있었던 데에는 고려민들의 노력과 희생이 가장 큰 역할을 했지만 1차 침입 직후 최씨 정권이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한 것도 항쟁지속에 중요한 요인 중 한 가지였습니다 1259년 강화가 이루어졌지만 고려와 몽골과의 관계는 불안하게 전개되었고 양국 관계는 1270년(원종 11년)에 개경 환도가 단행되고 이에 반대하던 삼별초가 일으킨 난이 1273년(원종 14년)에 진압되면서 안정을 찾게 됐지요. 계속되는 몽골의 침입으로 인하여 백성들은 힘을 합치지 않을 수가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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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4.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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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의 탄생이 전쟁에 이용되면서 라는데 맞는가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원래 연은 즐거운 민속놀이의 하나로 발전한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옛 기록에 의하면 신라 진덕여왕 때( 647년) 연꼬리에 불을 붙여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아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적군의 기를 꺽어 승리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 밖의 연은 통신수단으로 쓰였고 액땜의 한 방편으로도 연날리기가 유행했지요 새해 아침에는 그 해의 동물을 그린 연을 하늘 높이 올려서 실을 끊어 그대로 날려 혼해의 행운을 빌기도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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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4.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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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효가 우리나라 태극기를 만든건가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에 태극기는 1882년 박영효가 고정의 명을 받아 일본에 가면서 '태극, 4괘 도안'의 길을 만들어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종은 1883년 3월 6일 왕명으로 이 태극 4괘 도안의 태극기를 국기로 재정 공포했지만 국기 만드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정하지는 않은 탓에 이후 다양한 형태의 국기가 사용되어 오다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태극기의 제작법을 통일할 필요성이 커짐에 따라 정부는 1949년 10월 15일 국기 제작법 고시를 통해 국기 제작 방법을 확정 발표하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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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4.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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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원은 왜 어머니의 무덤을 파헤쳤나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방원이 친어머니처럼 믿고 따랐던 강씨가 정도전과 손을 잡고 자신이 낳은 둘째 아들 의안대군 즉 이방석을 왕세자로 만들었지요 이방원은 억울하고 또 두려웠고 만약 왕세자 의안대군이 왕이 된다면 의안대군과 강씨는 최대 정적인 자신을 살려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 되었기 때문입니다 1396년 신덕왕후 강씨가 세상을 떠났고 그리고 1398년 이방원은 난을 일으켜 왕세자의 의안대군을 포함해 신덕왕후가 낳은 자식들과 정도전을 제거하는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죠. 충격을 받은 이성계는 왕위를 영안대군 이방과에게 물려주는 근거를 떠났고 1400년 정종 2년에는 이방원의 형인 회안 대군 이방간이 세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제2차 왕자의 날을 일으켰고 이방간의 난을 평정한 이방원은 왕세자가 되었고 얼마 후 조선 제3대 왕 태종이 되었지요 1408년 태조 이성계가 세상을 떠나자 이방원은 신하들에게 도성 안에 있는 신덕왕후의 무덤을 도성 바깥 산기슭으로 옮기고 무덤이 있던 자리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도록 하라고 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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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4.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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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인은 손병희 선생외 누가있죠?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손병희 이승훈 한용운 권동진 권병덕 길선주 김병조 김완규 김창준 나용환 나인협 박동완 백용성 박준승 신석구 신홍식 양전백 양한묵 오세창 오화영 유여대 이갑성 이명룡 이종일 이종훈 이필주 임예환 최성모 홍기조 홍병기 최린 정춘수 박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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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4.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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