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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의 폴포트가 수 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반도에 위치한 캄보디아는 고대 유적지 앙코르와트로 대표되는 나라입니다. 9세기부터 캄보디아 일대에서 번성한 크메르왕국이 번성하던 12세기 경 건설된 불교사원으로 건설될앙코르와트는 그 규모나 건축기술 등에서 세계적인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불교사원이 있는 캄보디아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불과 50여년 전에 끔찍한 살육과 학살의 현장이었습니다. 1970년대 베트남전쟁과 이어진 공산혁명과 내전 급진적인 공산주의 세력의 집권기를 거치면서 나라는 황폐화되고 엄청난 인명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특히 1975년부터 1979년 사이 캄보디아 집권세력인 크메르루주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은 무려 100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이 기간 캄보디아는 죽음의 땅 킬링필드로 불리웠습니다. 이런 상황은 크메르루주의 지도자 폴포트의 중농주의에 기반한 산업이 출발점입니다. 도시민들을 협동농장이라는 형태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하루아침에 터전을 잃고 강제이주를 당해야 했고 끝나지 않은 장거리 이동에 수많은 사람들이 병이나 죽어나갔습니다. 폴포트정권은 지식인들이 정권을 흔들 수 있다고 보아 학자 교육자 공무원 교사 등이 숙청되고 학살되었습니다. 심지어 손에 굳은 살이 없어 노동의 흔적이 없는 자 안경을 쓴 자 글을 아는 자 등이 학살대상에 포함되어습니다. 또한 체육인 문화ㆍ 예술인도 학살 대상에 포함되었습니다. 전국 곳곳에 수용소를 설치하고 첩자임을 자백하라고 강요하면서 고문으로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자국민들의 학살에 그치지 않고 자국 내 베트남인을 학살하고 국경지역의 베트남까지 학살하자 1978년 베트남의 정예부대가 캄보디아를 공격하여 1979년 폴포트 정권은 무너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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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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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조선과 친밀하게 지내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도구가와 이여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와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더불어 막부시대 3대 영웅으로 칭송받는 인물입니다. 임진왜란 전에는 조선통신사와 일본일왕사의 교류가 활발히 진행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조선통신사의 발길이 끊어지자 전후 도구가와 이예야스는 선조에게 친서를 보내 조선통신사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이는 당시 일본은 대외적으로는 임진왜란으로 인한 후유증이 있었고 내부적으로도 각 진영의 싸움으로 정신적으로 피폐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조선통신사 파견을 계기로 일본을 하나로 통합시키기 위한 것으로 삼고자 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예야스는 퇴계 이황의 경사상(주일무적 정제엄숙 상성성)을 생애 최고의 가치로 삼을 정도로 퇴계를 존경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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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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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손 꼽히는 위대한 2인자는 누가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일본의 에도막부의 도구가와 이예야스를 들 수 있습니다. 대망에서 등장하는 일본의 3명의 영웅은 오다 노부나가 토요토미 히데요시 도구가와 이예야스입니다. 오다 노부나가가 죽고 노부나가의 말잡이에 불과했던 히데요시는 노부나가가 꿈꾸었던 대륙진출을 실현하고자 정명가도를 외칩니다. 명나라를 정벌하려고 하니 조선은 길을 비켜달라는 것입니다. 조선으로서는 들어줄 수 없었고 히데요시는 정한론으로 조선을 먼저 정복하고자 하여 일으킨 것이 임진왜란입니다.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중에 죽고 어린 아들 히데요리가 주군이 됩니다. 도구가와 이예야스는 명분과 의리를 중시한 인물로 무력으로 히데요시 가문을 무찌르고 전권을 가질 수 있음에도 어린 히데요리를 끝까지 보호하려는 태도를 보인 영원한 2인자의 모습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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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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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아깨비 놀이의 유래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방아깨비는 메뚜기로 숫컷보다 암컷이 더 크고 뒷다리가 튼튼합니다. 충남 청양이나 논산에서는 땅개비라고도 하는데 뒷자리를 잡으면 마치 디딜방아처럼 위아래로 뜁니다. 이 모습이 마치 방아 찧는 것 같아 노래를 부르며 이를 보고 즐깁니다. 혼자서도 하지만 여러 아이가 함께 누구의 것이 오래찧는지 겨루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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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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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우표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도 중국 일본과 같이 19세기에 우표를 발행했습니다. 1884년 4월 22일 고종 황제의 칙령으로 우정총국이 설치되었습니다. 초대 우편총판 홍영식은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 도안을 완성했습니다. 우정총국은 7개월 정도의 준비기간을 거쳐 그해 11월 18일 역사적인 업무개시일에 맞춰 첫 우표를 내놓았습니다. 이때 일본의 대장성 인쇄국에 의뢰해 발행한 우표가 문위우표입니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입니다. 태국무늬 둘레를 당초문이 에워싸고 있는 모습입니다. 문위는 당시의 화폐 단위가 문(문은 1푼을 의미함)이었기 때문에 후에 수집가들이 붙인 이름입니다. 문의우표 발행 당시에는 우표가 아닌 우초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우표의 발행주체는 대조선국이었지만 디자인에서 인쇄까지 제조작업은 모두 일본에서 일본인의 손을 거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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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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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놀이의 유래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사물놀이는 사물(꽹과리 징 장구 북)을 중심으로 연주하는 풍물에서 취한 가락을 토대로 발전시킨 계열의 국악이며 1978년 2월 28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공간사랑에서 김용배가 제안 구성하고 심우성이 이름을 지어 제안한 《사물놀이》 풍물패에서 연주한 것이 사물놀이의 시작입니다. 이들은 기존의 풍물놀이에 비해 앉은반으로 풍물가락을 실내 연주에 적합하게 재구성하였습니다. 주로 호남풍물 짝드름 웃다리풍물 설장구놀이 영남풍물 등을 연주합니다. 흔히 꽹과리 소리는 천둥 징 소리는 바람 장구소리는 비 북소리는 구름에 빗대어 말하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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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23.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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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역사속에서 철렴환정은 어떤 정치였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철령환정은 조선 25대 왕 철종이 수렴청정을 끝내고 친정을 하겠다고 선언한 것으로 왕권을 강화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동안 강화도령으로 불리며 허수아비 왕에서 진정한 왕으로 거듭나겠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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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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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사태가 일어난 것이 제5공화국인데, 제 몇 공화국으로 나뉘는 기준이 뭔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대한민국은 1공화국에서 6공화국까지로 분류됩니다. 헌법 개정으로 대통령 임기나 선출 등에 관련한 주요 헌법 내용이 변경될 경우에 공화국 변경으로 봅니다. 공화국의 구분은 단순한 헌법 개헌이 아니고 정부형태(대통령제 의원내각제)의 변경이나 대통령의 임기 중임제한 여부 등이 바뀐 경우에 공화국 변경으로 보고 단순한 개헌은 공화국 변경으로 보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총 9차례 개헌이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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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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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대첩'은 어디서 어떻게 거란을 물리친 전쟁인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거란은 강동 6주의 반환과 강조가 목종을 폐위시키고 현종을 옹립했다는 빌미로 요 성종이 40만 대군으로 침입했습니다. 그러나 홍화진에서 양규 이수화 장군의 분전에 발목이 잡혀 진군을 못하자 홍화진을 비켜 개경으로 진군하여 현종이 나주까지 피신하게 됩니다. 요 성종은 현종의 출조를 약속으로 군사를 물리게 됩니다. 이후 거란은 현종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소배압의 10만대군으로 3차 침입을 감행합니다. 이에 고려 현종은 강감찬을 상원수(총사령관)로 임명하니 70세의 강감찬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변에 위치한 홍화진에서 1차 결전에 대비합니다. 홍화진의 강 대천 상류를 막아 1만2천의 병사를 매복시킵니다. 거란군이 강을 건널 때 막고 있던 물꼬를 트니 거란군은 물살에 휩살려 죽게 되고 화살에 맞아 죽게 됩니다. 이후 거란군은 혼비백산하여 후퇴하게 되는데 귀주(지금의 평안북도 구성)에서 대첩이 벌어져 10만 대군 중 살아돌아간 이들은 수천에 불과할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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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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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 장군은 문관 출신인데 어떻게 장군이 될수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강감찬 장군은 고려시대 문관입니다. 983년(성종 3)에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예부시랑 한림학사를 거쳐 평장사가 되었습니다.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특히 1018년(현종 9)에 경관직인 내사시랑 동내사 문하평장사와 외관직인 서경 유수를 겸임하였습니다. 서경 유수는 단순한 지방행정관직이 아니라 군사 지휘권도 행사하는 요직으로 강감찬이 이 직책에 임명된 것은 요나라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거란의 3차 소배압의 10만 대군의 침입 때 강감찬은 총사령관이 되어 귀주에서 적을 섬멸하여 다시는 고려를 넘보지 못하도록 궤멸시켜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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