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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박해가 일어난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흥선대원군 집권 당시 쇄국정책을 하고 있었고 조선은 성리학?를 제외한 모든 이념과 학문을 비판하고 배제하고 있었는데 프랑스 천주교 선도사? 9명을 사살한 사건을 병인박해이고요 이를 계기로 프랑스군과 벌인 전투를 병인양요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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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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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효종은 서자였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인조의 부인이자 효종의 어머니인 '조대비'가 있었습니다.효종이 승하하자. 조대비가 상복을 입어야 하는데 몇 년을 입어야 하는가? 라는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남인 - 3년을 입어야 한다. 서인 - 1년을 입어야 한다.소현 세자라고 들어 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이였습니다.어머니인 조대비가 첫째 아들이 아닌 둘째 아들의 장례에는 1년을 입어야 한다가 서인의 주장첫째든 둘째든 왕의 죽음이니깐 3년을 입어야 한다가 남인의 주장이였습니다.서인이라고 한다면 성리학을 숭상하는 당파로 철저한 성리학을 주장했고 여기에는 왕도 예외는 없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에 반대를 한것이 남인이였죠.하지만 이는 경국 대전에서 아들의 죽음은 첫째 둘째를 막론 하고 1년의 상복을 입는다고 적혀있었기때문에 큰 논쟁으로 발전되지는 않습니다.조선이니깐 조선의 법을 따라야 하는것이죠. 그렇게 조대비가 1년 동안 상복을 입는 것으로 결정이 납니다.하지만 더 큰 문제는 효종의 비가 죽었을때 일어납니다.다시 말하면 조대비의 며느리가 죽었는데 상복을 몇년 입어야 하는지가 논란 거리가 되는 것입니다.제 2차 예송논쟁인데요.서인 - 둘째 아들인 효종의 비가 죽었으니 9개월을 입어야한다.남인 - 왕의 비가 죽었으니 1년을 입어야한다.며느리에 관해서는 맏며느리는 1년 그 외 며느리는 9개월이라고 적혀 있기 때문에 논란이 펼쳐집니다.서인과 남인의 대립각이 치열하게 펼쳐지는 가운데 송시열의 발언이 크게 문제가 됩니다.송시열은 옛 중국의 고서를 들어서 왕을 막론하고 서자는 서자다라고 발언을 하게 되는데요.옛 중국의 고서에 등장하는 서자는 맏아들을 아닌 아들을 의미하는 것이지만그 당시 조선에서 서자라는 단어는 첩의 아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상대를 굉장히 낮추어 부르는 말입니다.즉 다시 말해서 효종은 서자이다.이렇게 송시열이 말하게 되면서 정국은 급속도록 악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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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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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처 7국은 왜 반란을 일으켯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당시 중앙에서 점점 제후국들의 영토를 빼앗아가거나 혹은 분봉하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제후국들의 불만이 많아지게 되었는데, 이때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오왕 유비가 다른 제후국들을 모아서 반란을 일으키게 된 겁니다.사적으로는 오왕 유비의 아들이 한 경제와 바둑을 두다가 그만 경제가 던진 바둑판에 맞고 사망한 사건 때문에 원한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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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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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박유 일부일처제 주장??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일부일처제 폐지를 주장한 인물입니다.다른 말로 축첩(첩을 둠)제를 시행해달라고 요청했던 인물입니다.그래서 당시 부녀자들한테 욕을 거하게 먹었던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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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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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마수트라는 실제 존재하는 문헌인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4세기경에 바츠야야나가 썼다고 전해진다. 고대 인도 사람은 인생의 3가지 목적으로서 다르마(法:종교적 의무) ·아르타(利:처세의 길) ·카마(愛:성애의 길)를 들어 이에 관한 많은 책을 쓰고 연구하였는데, 카마수트라는 성애(카마샤스트라)에 관한 책 가운데서도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책이다.성애의 기교, 소녀와의 교접(交接), 아내의 의무, 남의 아내와의 통정(通情), 유녀(遊女), 미약(媚藥) 등에 관해 논술하여 일반시민을 성지식(性知識)의 결여에서 오는 위험으로부터 구하고자 하는 책으로서, 고대인도의 일상생활이나 사회에 관한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한 인도 고전문학에 있어서의 연애묘사의 배경을 이루는 것으로서, 그 연구나 감상을 하는 데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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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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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월관음도 불교적 특징이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수월관음도는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가 만난 관세음보살의 모습을 담은 불화입니다.화엄경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가 선지식들을 찾아 구도하러 다니는 중 보타낙가산에 계신 관세음보살을 만나게 됩니다.그 자비로운 모습을 담은 불화를 특히 고려시대 많은 작품이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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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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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때 신분 상승이 가능했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 시대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는 세 가지 예로는 첫 번째 과거 시험에 합격해 신진 관료가 되거나, 두 번째 전쟁에서 공을 세워 무관 벼슬을 하는 경우, 그리고 세 번째 재산을 모아 노비에서 양인으로 신분 상승을 하는 경우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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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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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골품제도에 대하여 설명해 주세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 제도는 골품(骨品), 즉 개인의 혈통(血統)의 높고 낮음에 따라 정치적인 출세는 물론, 혼인, 가옥의 규모, 의복의 빛깔, 우마차(牛馬車)의 장식에 이르기까지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여러 가지 특권과 제약이 가해졌다.전 장점은 없다고 생각합니다.지나치게 혈통을 강조해서 능력이 뛰어난 관료들이 활약을 못했기때문에 국력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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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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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10만 양병설에 대해?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저는 대학에서조선 정치사와 조선의 유학 사상을 공부 하는 입장으로정치적인 측면과 율곡에 대한 면모 두가지를 동시에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몇자 끄적여 봅니다. 우선 조선은 철저한 기록중심 국가로거의 편집증 적이라고 할만큼 매우 사소하고 기가 막힌것 까지 일일이 기록을 합니다. 만약 신하가 왕에게 어떠한 정책을 보고한다면최소한조선왕조실록, 일성록, 비변사등록 이렇게 3군데 기재가 됨니다. 하지만 10만양병설은 그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오직 전쟁이 끝나고 나서 그 제자가 만든 문집에나 나오는 내용이죠. 마치 월드컵 끝나고 내가 월드컵 4강 예언 했다거나노무현 당선되고 나서 내가 누가 될지 진작에 주변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녔다! 하는 식이죠(놈현은 후보자 시절에 지지율 한자리 숫자였슴) 그럼 율곡은 어떤 사람이였을까?그의 사상 체계와 조선왕조실록을 비교 검토 해보면율곡은 세금을 줄여서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주자는 정책을 내놓는 사람이였습니다. 세금을 줄이자고 하는 사람이 10만 양병설? 이번엔 임진왜란때 조선군이 얼마나 되었나 생각해 볼까요?이부분은 기록마다 매우 들쭉 날쭉 합니다.KBS스페셜은 보니 수천명 수준으로 계산 하더군요. 하지만 여기에는 8번제라는 단서가 붙어 있죠.(즉 상비군 곱하기 8 이라는 것) 과거에는 보통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수천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지만징비록을 보면 전쟁 초기에 원균이 경상우수영 수군 만명을 해산 시켰다고 나와 있죠.그럼 대체 조선군은 얼마 였을까요? 현재 들어서 임진왜란 직전 조선군의 숫자를 점점 많이 잡아 나가는 추세이죠.(과거 일제 시대와 박정희 시대에는 조선의 무능과 이순신의 유능을 주장하기 위해서 조선군의 숫자를 적게 잡는 것이 보통 입니다.) 그래서 현재 주장 되는게 육군 6만에 수군 5만 입니다.이미 10만명은 넘어가는 숫자이죠.여기에 예비군이라고 할 수 있는 보인이 30만명입니다. 물론 기록상 11만명이라고 해도징비록에 나온 것 처럼 "나무와, 돌조각도 군적에 너었다."라는 부분을 보자면실 병력은 그보다 적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쟁 초기 각각의 소집장소에 실병력들이 제대로 소집 되었던 것 같습니다. 별로 도망간 사람도 없구요. 전쟁 직후 용인전투때 4만명의 조선병력이 모인 것만 봐도 조선군의 병력이 상당히 많았다는것에 반증이죠. 여러가지 사실을 종합해 보아한림대 오수창 교수는(한때 조선 정치사의 국내 유일한 학자였슴)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을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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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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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비스마르크는 누구인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빌헬름 1세를 설득하여 왕좌에 머무르게 하고, 헌법투쟁을 군주제의 관점에서 해결할 수 있는 최후의 희망을 제공한 보수적 정치가들에게 정부 주도권을 맡기게 한 것은 국무장관인 Roon이었다. 1862년 9월 23일 비스마르크는 임시 재상이 되었다. 10월에 수상으로 지명되었다.이러한 결정은 왕에게는 어려운 결정이었는 데, 왜냐하면 당시에 극우주의자로 알려진 비스마르크를 왕은 신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견해는 매우 대담한 것이어서, 그의 견해에 동정적인 사람들조차도 그가 프로이센을 내전으로 몰고 가지 않을까 내심 두려워하고 있었다.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그의 수상직을 격렬히 반대했다. 자유주의자들은 그렇게 시대에 뒤쳐진 급진적인 사상을 지닌 사람은 곧 정치적인 파탄에 이를 것이고, 좀 더 온화한 요소를 없애버리기 쉬울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비스마르크의 정치적 수완은 곧 관직에 오른 몇 년 후에 나타났다.비스마르크는 어리석고, 진취적이지 않은 프로이센 융커의 아들로 1815년에 태어났는 데, 그는 당당한 체구와 엄청난 힘을 물려받았다. 중산층 출신의 그의 어머니는 개혁을 지원함으로써 자코뱅주의자라는 명성을 얻은 프로이센 시 공무원의 딸이었다. 멍청한 남편과는 대조적으로 그녀는 예민하고, 때로는 성마르고,침착하지 못하며, 호기심이 많았다. 비스마르크의 성질과 두뇌는 그의 어머니로 부로 물려받은 것이다.어린 비스마르크는 학교에서는 뛰어나지 않았다. 대학에서 그는 당시의 저항적인 낭만적인 입장을 취하였고, 잠깐동안은 급진적인 브르센샤프트 운동에 참가하였고, 열정적인 살을 하고, 술과 결투에 빠졌었다. 그러나, 그의 학업을 경멸하는 데 반해, 그는 역사와 독일 고전을 방대하게 읽었다. 법학을 이수한 후, 그는 프로이센 관청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관료직의 권태로움과 기강에 분개했고, 곧 사임하였다. 여전히 지루한 그는 방종한 생활에 빠져서 "미친 비스마르크"라는 악명을 얻었다.그 시기에 그는 Puttkamer-그는 후에 결혼했다.-과 같은 경건주의자들과 사귀었다. 그들의 영향으로 그는 진짜 종교적인 회심을 경험한 것 같이 보였다. 그 자신이 신의 도구라는 믿음 때문에 그는 새로운 자신감과 목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또한 그의 인생의 중대한 국면에서의 그의 행동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게 되었다.비스마르크는 1847년 공직에 들어갔지만, 국왕이 그를 프랑크푸르트에서의 독일 연방(the Germanic Confederation)회합에 대표로 그를 지명한 1851년까지 그 자신을 증명해 보일 기회를 얻지 못했다. 여기서 그는 외교에 있어서 그의 첫 경험을 쌓았고, 공무에 대한 세부적인 지식을 얻었다. 후에 성 페테스부르그와 파리의 대서로서 그는 러시아와 프랑스에서 정치 사태를 공부할 기회를 얻었고, 이들 국가의 통치자들의 성격을 판단할 기회를 얻었다.비스마르크는 현실주의적 정치가로 불려졌고, 근대적이고 부도덕적 현실정치의 주창자로 알리어졌다. 그러나 자의식이 강한 이상주의적 정치가들조차도 자신을 현실주의자로 보았다. 비스마르크는 현실주의적인 성향을 지녔기 때문에 자신과 프로이센의 한계를 깨달을 수 있었다. 리쉴리에와 탈레랑의 전통에 따라, 비스마르크는 정치를 가능성의 미학으로 보고, 가능성을 성취하기 위한 책략을 교묘한 것으로 보았다.나폴레옹이 전쟁의 책략자라면, 비스마르크는 정치의 책략자였다. 나폴레옹의 군사전략과 마찬가지로, 비스미르크의 정책은 결코 고정된 규칙과 전제 조건에 의해 묶여 있지 않았다. 장기적 안목을 지닌 동시에 그는 그 순간의 긴박함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의 계획은 탄력적이어서, 불가항력적인 실수와 오보, 사고를 다 수용하였다. 그는 적들의 눈에 띠는 행동만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는 있을법한 모든 행동을 처리할 준비를 했다. 그가 성공할 수 있는 요인은 참을성과 타이밍이었다. 그는 자신을 한 발만 헛디디면 수렁에 빠질지 모르는 가운데서 뇌조를 사냥하기 위해 무리에 다가가는 사냥꾼에 비유했다.비스마르크를 가장 훌륭한 정치가로 평가되어지도록 한 것은 그의 위험이 가장 적은 최선의 정책을 선택하는 능력이었다. 그는 정치는 끊없는 선택상황의 연속이며, 어떤 정치적 문제에 대한 뾰족한 해답이 없기 때문에 최종선택을 위해서 광범위한 가능성을 동시에 탐색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최종선택을 했을 때조차도-그것이 전쟁일 경우를 제외하면- 그는 많은 선택의 여지를 남겨두고,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자주 저지 당했지만, 비스마르크는 항상 실패할 것 같은 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고, 정치적 독창성을 회복시킴으로써 새로운 정책에 착수하였다.비스마르크 정책이 엄격한 원리가 부족하다는 것은 그의 생애 동안 가치관의 변화에 잘 나타났다. 그는 정치적 교양이 없고, 정견도 좁은 포메라니아의 융커로 태어났다. 비스마르크의 동료 지주들은 왕과 프로이센, 융커계층에 충성하였다. 비스마르크는 점차 이러한 사회의 기준으로부터 벗어났고, 머지않아 프로이센과 독일, 유럽의 관점에서 벗어나 궁극적으로 세계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가 일정한 가치관이나 충성관이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수일 것이다. 그는 자아실현의 수단을 제공한 프로이센에 충성했다. 최고로 출세한 시점에서 비스마르크의 가치관의 요지는 독일제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독일제국의 건설을 위해 그는 모든 정책을 펼쳤고 정열을 쏟아 부었다.비스마르크는 그러한 절제라는 정치적 능력과 한계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였다. 나폴레옹과는 달리 그는 결코 정치적 도박꾼은 아니었다. 그는 전쟁이나 정치적 실험에 국가의 미래와 자신의 경력을 걸지 않았다. 그는 도저히 다른 방법이 없고, 군사,외교,도덕면에서 유리한 조건일 때 외에는 결코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는 분명하고, 책임 있는 목적을 가지고 전쟁을 수행했다. 그는 더 이상 전쟁을 통해 얻어지는 이익이 위기를 정당화시킬 수 없게 되자, 그는 유럽의 견고한 평화 수호자가 되었다.비스마르크의 정책비스마르크가 프로이센의 재상이 되었을 때 직면한 문제는 의회와의 싸움이었다. 이러한 위기에 대한 비스마르크의 처리방법은 특징적인 것이었다. 처음에 그는 타협을 시도하였는 데, 그는 아비뇽에서 뜯은 올리브 가지를 의회에 바쳤다. 그의 다양한 타협안이 거부되어졌을 때, 그는 도덕상의 기선을 쥐고, 의회의 예산에 대한 독점권 주장은 위헌이라도 고발하였다. 헌법에 따라 또 다른 예산권을 지닌 왕과의 교섭을 거절함으로써, 의회 자신이 제헌정부의 와해를 초래하였다. 그런 까닭에 왕은 의회의 협조 없이 국가사를 처리할 권리와 의무를 가지게 되었다.1863년 부터 1866년까지 비스마르크는 의회를 전혀 무시했다. 그는 재정문제를 1861년과 1862년에 이미 의결된 세금을 징수함으로써 해결하였다. 이러한 자금은 군사개혁을 수행하기 위해서 군대에 할당되어졌다.비스마르크의 책략을 좌절시키기 위하여, 의회는 공개적으로 반항하였거나, 세금납부를 거부하는 다수의 시민을 설득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의회의 입지가 약하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났다. 군대가 왕의 편으로 남아 있는 한, 어떠한 반항도 성공할 수 없었다. 또한 군대가 세금징수원의 편인 한, 프로이센 시민 다수가 세금을 거부할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다. 더군다나,1848년의 교훈을 잊지 않고 있는 1860년대의 자유주의자들은 폭력으로 흐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자유주의자들의 대다수는 인간의 이성과 필수 불가결한 혁신이 자신의 편이라고 확신했다. 그들은 오직 비스마르크의 정책이 불신임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이 기다리는 동안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미래에 중대한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 확신한 외교에 전념했다.비스마르크는 대부분의 정치의식을 지닌 독일인들은 어떤 종류이든지 간에 독일통일을 열망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자신조차도 젊었을 때, 낭만주의적 민족주의에 빠졌었었다. 그런 까닭에 그는 민족주의 운동의 지도권을 획득하는 것이 프로이센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또한 프로이센이 독일을 지배하는 데는 두 가지 방해물-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두 나라 다 무력충돌로 인해 강제되지 않고서는 독일통일의 주도권을 프로이센에게 넘겨 주려하지 않았다. 독일 자유주의자들과는 달리, 비스마르크는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피하지 않았다. 수상이 된 첫 연설에서 그는 군대개혁을 위한 자금을 승인할 것을 의회재정위원회에 호소하면서, "독일은 프로이센의 자유주의가 아니라 군사력에 의지한다. 우리 시대의 중대한 문제는 1848-49년의 실수와 같이 연설과 다수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철과 혈로써만이 해결되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비스마르크의 정치적 성명 중 가장 유명한 이 연설은 그의 사고의 중대한 면을 노출시켰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독일 지배권 획득의 수단으로 철과 혈만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연설은 주로 군사비에 대한 요청이었고, 결국 군사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필수 불가결했다. 비스마르크는 전쟁의 위험과 정치적 라이벌이 될 수 있는 군사적 영웅 발생의 위험을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는 프로이센의 군사력이 더 보강되어져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들의 동맹을 끊고, 국제분쟁에서 도덕적으로 우위를 얻을 수 있는 외교와 동맹관계가 필요했다. 만약 철과 혈이 사용되어진다면 가장 유리한 환경에서 사용되어져만 한다. 그러한 때조차도 그는 평화적인 수단에 의해 목적을 얻으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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