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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락부자의 어원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해당 벼락부자, 졸부의 의미는 일본을 통해 들어온 단어 입니다.일제 강점기를 거친 우리나라로써는 사회문화의 많은 곳에 일본의 흔적이 남아있고자신도 모르게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일본뿐 아니라 전세계, 특히나 인접국은 서로 많은 문화를 교류하고 영향을 받아왔기에그것이 나쁜것은 아닙니다.졸부, 벼락부자란 단어는 일본의 장기를 통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혹시 체스를 해보셨으면 폰 이란 가장 기본적이고 약한 말이 상대편 진영의 마지막열에 도달하면승급하여 퀸이나 룩 같은 다른 말로 승급할 수 있는걸 아시나요?역시나 일본 장기에서도 이러한 룰이 있는데 일본장기의 졸이 적진에 들어가면金将이란 장교로 승격되어 행동범위가 6배나 넓어집니다.이 규칙을 나리킨 成金 이라 하는데 이걸 일본에 졸부, 벼락부자 로 부르고 있는데이것이 일제강점기때 한국에서 사용되며 한국에서도 널리 인지되고 사용된 것이다 라고 알려져 있습니다그럼 도움이 되셨길 빌겠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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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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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때, 항상 침략만 당했던걸로 알고 있는데 혹시 조선에서 먼저 공격을 한 경우가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역사 전문은 아니지만 자료를 찾아보니 조선시대에 먼저 공격에 나섰던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하단에 내용을 첨부드리겠습니다.첫번째 대외 정벌 사례는 ‘대마도 정벌’이다.왜구는 삼국시대부터 밀무역, 약탈 행위 등으로 줄기차게 한반도 사람들을 괴롭혔다. 대마도를 근거지로 삼은 왜구들은 한반도와 중국 동남해안 지역을 누비며 끈덕지게 살육과 약탈을 일삼았다. 고려시대 말에는 일본인 해적 집단이 아예 한반도에 집단적으로 창궐하기도 했다.조선 왕조가 세워진 뒤에도 왜구의 기세는 누그러지지 않았다. 결국 세종은 1419년 대마도 정벌작전을 시작했다. 그해 6월19일에 1만7000여명의 원정 토벌군이 전투용 함선 227척에 나눠 타고 대마도로 쳐들어갔다. 독자적으로 원정군을 편성해 작전을 수행한 능동적 출병이었다. 이튿날 대마도에 상륙한 조선 토벌군은 왜구 선박 140여척을 나포하고 가옥 2000여호 등을 모조리 불태웠다. 아울러 왜구의 우두머리 114명을 사살하고, 왜구 다수를 포로로 사로잡았다. 결국 왜구의 우두머리 격인 대마도 도주는 조선에 항복 문서를 보내 화해를 요청했다. 조선 조정은 항복을 받아들이고 대마도를 경상도에 편입시켜 조선의 영토로 삼았다.저자들은 “조선군의 적극적 태세, 신속한 대응이 왜구의 침입 의도를 근본적으로 종식시키는 성과를 이끌어냈다”며 “신흥국 조선이 외부의 불안요소를 제거해 통치체제를 새롭게 가다듬을 수 있게 했다”고 평가했다.두 번째 대외 정벌은 ‘보주강 여진족 원정 토벌’이다. 세종이 즉위할 당시 함경도와 서북 압록강 연안 일대는 ‘야인들의 사냥터’였다. 압록강 지류인 보주강 유역과 지금의 회령 일대에서는 여진 부족들이 조선인 부락을 습격해 약탈을 일삼고 조선인들을 납치하는 일이 잦았다. 조선 조정은 큰 골머리를 앓았고, 세종은 심사숙고 끝에 1432년과 1437년 두 차례에 걸쳐 압록강 도하작전을 단행한다. 조선군의 기습적인 토벌작전 결과 여진족은 궤멸적 타격을 입었고 압록강 연안지대는 평온을 되찾았다. 세종은 이에 그치지 않고 변방 행정구역을 네 군데 설치하고 이들 지역의 전략촌들을 연결하는 행성을 쌓아 수비부대를 주둔시키고 백성들을 개척민으로 이주시켰다. 한반도 서북방 ‘사군 개척’이다. 세종은 또 김종서를 동북방 국토 개척의 임무를 맡겨 파견했고, 김종서는 7년 동안 육진 개척을 완수했다. 그러나 세종의 두 차례 도하작전은 여진족의 잔여 세력을 완전히 박멸하지는 못했다. 이후 북방정책 의지는 퇴색했고, ‘소중화’ 의식에 빠져들게 된다. 저자들은 “그사이 여진족은 후금을 건국했고 후에 청나라를 세웠다”며 “정묘호란을 거쳐 조선은 후금을 ‘형님’으로 떠받들게 되었고, 병자호란 때 ‘임금과 신하’의 관계로 청나라를 종주국으로 섬기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말했다.세 번째 대외 정벌은 헤이룽강 나선정벌이다. 17세기 후반 ‘나선’으로 불리는 제정러시아의 동진 세력이 청나라 헤이룽강으로 밀려들기 시작하자 청나라 조정은 조선 측에 지원군 파병을 요구했다. 1차 나선정벌에서는 1654년 5월 조총수 100명이 두만강을 건너 청군 900여명과 합류해 제정러시아 무장원정대와 싸웠다. 조선군은 당시 승리에 결정적인 이바지를 했고 조선군 조총 사격수의 전투 역량을 나라 안팎에 과시했다.<책. 조선의 대외정벌. 임홍빈 유재성 서인한 지음>도움이 되셨길 빌겠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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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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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최고의 지휘자 카라얀은 어떤 지휘자였나요?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카라얀, 저도 클래식을 입문했을때 가장 많이 접하고 들었던 이름이었습니다.오스트리아 의 지휘자로써 그가 20세기 가장 위한 지휘가, 음악가로 인정받는 이유는세계최고의 오케스트라로 유명한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35년간 종신 지휘자로 소속되어 활동했기 때문입니다.음악계에선 그를 '20세기 클래식의 황제' 로 칭한것만 봐도 그의 위상을 쉽게 짐작하실수 있으실 겁니다.그럼 도움이 되셨길 빌겠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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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23.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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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 악보를 만든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세계최초의 악보는 세이킬로스의 비문 으로 알려져 있습니다.현존하는 악보중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며 기원전 2세기에서 서기 1세기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표기는 그리스 문자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현전하는 악보로서 세계최초는 아니지만 완전한 형태로 전하는 것은 세이킬로스의 비문이 최초입니다그럼 도움이 되셨길 빌며 글을 마치겠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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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23.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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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품을 투자 목적으로 구매 하려고 합니다 어떤 방법으로 구매하나요?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해설을 하고 있는 김찬우 입니다미술품 투자와 관련해서 많은 질문을 받곤 하는데 짧게 설명드린 어렵습니다.이유는 가지고 계신 투자금, 그리고 얼마간 돈이 묶여있어도 되는지, 목적 등 구체적인 정보를 알아야 답변이 가능합니다.왜냐하면 미술작품은 부동산 처럼 쉽게 거래가 일어나지 않아 돈이 묶이기 쉽고환경에 따라 훼손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보관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그리고 부동산 거래를 공인중계사를 통해 진행하지만 미술품은 그러한 국가에서 공인된 기관이 존재하지 않기에많은 사적인 기관들의 진품확인서를 믿고 구매해야 하기에 리스크가 아주 큽니다.미술품을 구매하는 방법이 크게 직접구매 / 경매인데국내에도 여러가지 미술품 경매회사가 있지만 그나마 가장 크고 인정받는 서울옥션 / 케이옥션을 통해 구매를 하시면작품의 진위여부 및 추후거래를 위한 증빙은 걱정이 없어집니다.직접 구매의 경우는 개인간, 갤러리간구매 또는 아트페어를 통한 구매가 있을 수 있는데가장 안전한건 아트페어를 통한 구매가 되겠습니다.개인간 거래는 절대 추천드리지 않습니다.이러한 리스크를 감안하고도 구매하고자 하시면 저에게 연락을 주시면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그럼 미술에 관심가져 주셔서 감사하고미술관련 궁금한 사항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주십시요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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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3.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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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고흐는 왜 해바라기 그림을 많이 그렸나요?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해설을 하고 있는 김찬우 입니다알려진바에 의하면 고흐는 한때 고갱과 함께 지내면서 그림을 그렸던 적이 있는데요이때 고흐는 고갱을 맞이하기 위해 자신이 그린 해바라기 그림으로 작업장을 장식했었다고 합니다.또한 그가 주로 작업했던 아를은 태양빛이 강렬하게 일렁이는 지역이었기에 그는 아를을 좋아했고 태양을 사랑했으며이 태양을 동경하는 해바라기 또한 사랑해마지 않을 수 없었을 것 이라 알려져 있습니다.그럼 미술에 관심가져 주셔서 감사하며미술관련 궁금한 사항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주십시요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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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3.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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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관점에서 보는 이데아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데아 의 개념은 쉽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제가 오히려 철학이 주전공이 아니니 제가 이해한바를 설명 드리겠습니다.이데아를 이해하기 위해선 플라톤을 아셔야 하나 이데아는 플라톤이란 철학자의 핵심 이론 이다이정도만 이해하고 이데아를 설명 드리겠습니다.그의 이데아론에 의하면 세계는 현상의 세계와 이데아의 세계로 구분됩니다. 현상의 세계는 감각으로 지각되는 불완전한 세계로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반면 이데아의 세계는 이성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는 완전하고 불변하는 세계이다. 예컨대 현실에 있는 삼각형이나 아름다운 꽃들은 모두 불완전하지만, 이데아의 세계에는 완전한 삼각형의 이데아와 아름다움의 이데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이 세상의 모든 사물마다 그 본질인 이데아가 있으며, 그 가운데 최고의 이데아는 선의 이데아이다. 그러나 이데아에 대한 그의 사상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플라톤도 이데아를 말로 적절하게 표현하기 어렵기 때문에 비유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플라톤의 대화편 <국가>에 제시된 유명한 ‘동굴의 비유’ 입니다.동굴 안에 죄수들이 갇혀 있다. 이들은 오직 맞은편 동굴 벽에 있는 그림자만 볼 수 있도록 온몸과 목이 사슬에 묶여 고정된 상태이다. 죄수들의 뒤에 있는 장벽 위에서 사람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 앞에서 그림자놀이를 하고 있다. 죄수들이 보고 있는 그림자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평생 벽만 보고 살아온 죄수들은 등 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심지어 자신들이 묶여 있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보고 있는 그림자들이 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는다. 그런데 한 죄수가 사슬에서 풀려나 동굴 밖으로 끌려 나간다. 그 죄수는 지금까지 보아온 그림자들이 모두 실물이 아니라는 것도 깨닫는다. 동굴 밖 세상을 보고, 모닥불이 아닌 진짜 태양 빛도 느끼게 된다. 그 후 그가 다시 동굴 안으로 돌아온다. 그가 아직 묶여 있는 죄수들에게 장벽 뒤의 세상 이야기를 해준다면, 그의 말을 선뜻 받아들이기보다 오히려 그를 조롱할 것이다.동굴의 비유동굴의 비유는 눈에 보이는 현상의 세계를 벗어나 참된 본체의 세계를 인식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위의 이야기를 거칠게 요약하면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고 인식하는 과정자체가 이데아 론 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도움이 되셨길 빌겠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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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23.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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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유럽에서 후추가 금만큼 비쌌던 이유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후추가 비쌌던 이유는 생산지와 수요처간 거리가 멀었기 때문입니다.가격이 떨어졌던건 생산지와 공급지가 많아졌기 때문입니다.재화의 가격은 수요와 공급으로 결정되잖아요:)관련된 좋은 글이 있어 아래 첨부드립니다.도움이 되셨길 빌겠습니다. 감사합니다:)*첨부후추, 마늘, 생강, 고추, 파 같은 향신료 없이 고기와 야채를 먹는다면 어떨까요? 음식 맛도 살려주고 냉장고가 없던 시절, 부패도 막아주며 때로는 약재료로도 사용되었던 향신료, 그중 4대 향신료로 불리는 후추, 시나몬, 정향, 육두구는 동아시아에서 생산되어 주로 유럽에서 사용되었습니다. 동아시아에서 유럽까지 향신료가 운반된 해로와 육로를 스파이스 로드라고 불렀는데요. 길이 먼 만큼 향신료 가격도 엄청 비쌌어요. 중개 무역지였던 고대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나 중세의 베네치아, 그리고 향신료 교역을 담당했던 이슬람 상인들은 큰돈을 벌었습니다.그런데 12~13세기 초 십자군 전쟁으로 스파이스 로드가 거의 끊기고,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오스만 투르크가 향신료 세금을 엄청 올리자 향신료는 금보다 더 귀한 물건이 되었어요. 15세기에 범선과 항해술이 발달하고 중국산 나침반이 들어온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직접 향신료를 구하러 바다로 나갔습니다. 포르투갈은 인도, 말레이반도, 실론, 중국 광동, 일본까지 진출했고, 스페인은 남미 최남단 마젤란 해협을 돌아 태평양을 건너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았어요. 위험한 항해 길이었지만, 일단 향신료만 가지고 오면 대박이 나는 장사였죠.16세기 말, 해양 강국으로 부상한 네덜란드는 수익성이 높은 향신료 산업에 뛰어들었습니다. 네덜란드는 원거리 항해의 위험을 분산하기 위해 국가 투자가 아닌 다양한 민간 자본을 유치하고, 대신 국가의 강한 권력을 힘입은 동인도 회사를 설립했어요. 영국의 동인도 회사보다 2년 늦게 설립하였지만 영국보다 자금력이 열 배나 막강했던 네덜란드는 곧바로 스페인령의 몰루카 제도를 차지하여 정향과 육두구 생산을 독점했고, 영국은 인도를 장악하여 후추 공급을 독점했습니다.시간이 지나면서 향신료 산업 경쟁이 더 치열해지자 육두구 산지에 진출한 영국 상인들을 네덜란드가 처형한 ‘암보이나 사건’이 일어났어요. 이로써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에 향신료 생산지 쟁탈 전쟁이 벌어졌고, 1665년 제2차 전쟁의 결과, 네덜란드는 육두구 산지인 룬섬을 지키는 대신, 영국에게 지금의 뉴욕인 뉴암스테르담을 넘겨주었습니다. 동인도 제도에서 밀린 영국은 수요가 많은 향신료 무역을 놓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생산지를 찾아 나섰어요.영국은 인도, 아프리카 탄자니아, 마다가스카르 섬까지 향신료 생산을 확대했습니다. 그 결과, 18세기에 이르러 향신료 공급이 급격히 늘어났고 가격은 폭락했어요. 고대부터 귀했던 향신료가 이제는 일상용품이 되었지요. 후추로 고기 맛을 살린 요리, 시나몬 향이 그윽한 카푸치노, 육두구가 들어간 맛있는 케이크를 누구나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경제사 이야기 / 보이는 경제 세계사 / (14) 네덜란드와 영국의 운명을 바꾼 향신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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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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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가 우리나라에 도입된 시기는 언제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한때 클래식 기타가 너무 멋져보여서 저도 배웠던 기억이 있습니다.아쉽게도 기타란 악기가 한국에 언제 전해졌는지 정확하게 기록된 자료는 없습니다.하지만 다른 문화와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를 거쳤을 당시 였기에 일본을 통해 전해진건 확실합니다.관련된 자료로는 1942년 10월에 현재 세종문화회관 별관인 부민관에서 정세원씨가 최초로 기타 독주회를 가졌다는 자료로 비추어 볼때 클래식 기타가 한국에 보급된건 1942년 이전 일걸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도움이 되셨길 빌겠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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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23.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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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피키소 비스키아는 어떤 화가였나요??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아시다시피 전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피카소의 이름을 달수 있을 정도로 미술계에 큰 임팩트를 남긴 인물이었습니다.그래피티 아티스트 로 분류를 하지만 그의 작품은 낙서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그가 인정받는건 낙서, 그래피티 등으로 분류되는, 사실 미술계에 포함되어 있지 않고 인정 받지 못하던하위문화를 미술계, 상류문화로 끌어올렸다는데 그 의의가 있습니다.아마 키스해링 이란 작가의 이름은 모르실수 있으나 그의 작품은 아마 보신적이 있으실 겁니다키스해링 역시 바스키아와 마찬가지로 거리예술을 예술로 승화시킨 작가들 입니다.이후 나온 낙서, 그래피티 작품들은 그들의 영향을 받지 않은게 없을 정도 입니다그의 작품은 여러 상징, 비유 들이 뒤섞여진, 말그대로 낙서 처럼 보이기에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하며시대상황에 맞춰 해석이 틀려질 수 있기에 아직까지 많이 회자되고 사랑받고 있습니다.그가 유명한건 아시다시피 앤디워홀과 함께 했었고비극저인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도 있을거 같습니다.그럼 도움이 되셨길 빌며 추가로 궁금한 사항이 있으시면언제든지 연락주십시요감사합니다
학문 /
미술
23.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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