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오늘날 처럼 식사를 3번 하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공식적으로 공인하는 기록은 없지만, 옛 동서양에서는 일반 백성들은 하루 2끼를 먹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조석(朝夕)으로 아침 저녁만 먹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점심에 대한 기록이 나온건 태종실록에서 확인해볼 수 있는데, 점심(點心)의 뜻은 마음에 불을 붙이는 것(점화,點火)로 집중력이 떨어질 때 쯤 다시 마음을 밝게 할 수 있게 간단하게 먹는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보통 두끼를 먹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현재의 삼시세끼가 자리잡은건 20세기 이후로 보고 있으며, 노동자들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먹는 양도 많아져 세끼씩 먹는게 보편화되어 삼시세끼가 통용되는 말로 정해졌다고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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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결혼을 했는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예수님은 결혼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경의 기록으로 보았을 때 예수님이 결혼을 하였다는 기록도 없고, 당시에 예수님을 비방하던 사람들에게서 고자라는 욕설을 들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부인과 자녀도 없구요. 일부 의혹으로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아내이다라는 설이 있는데, 이 설을 뒷받침 하는 근거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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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춘추전국시대는 어느기점으로 나뉘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춘주전국시대를 나누는 기준은, 보통은 진나라가 분열된 "삼가분진"을 기점으로 이야기 합니다. 이유는 당시 황제국으로 위치하고 있던 주나라의 권위때문입니다. 춘추시대에는 주나라의 황제국 권위가 막강했으며 그 주위의 제후국들의 이야기로 이루어졌다면 전국시대는 주나라의 권위가 무너지면서 정권이 바뀌는, 이른바 역성혁명의 이야기가 주가 됩니다. 그리고 주나라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 진나라가 한,위,조로 분열된 삼가분진입니다. 주나라가 제후국을 통치하고 다스릴 능력이 없어졌기에, 제후국들이 주가되는 전국시대로 넘어갔다고 보고 있습니다.우리나라와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완벽하게 세 나라로 분리가 된 기원전 403년을 보고 있고, 중국에서는 삼가분진이 처음 촉발되었을 때의 군주인 주원왕이 즉위한 기원전 473년을 기준으로 보고 있습니다. (중국이 473년으로 보는건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당시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 구분에 편의를 위하여라는 설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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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주적이라고 부르는 대상과 문제점의 질문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주적이라는 표현은 2004년 이후로 공식적으로 외교에선 사용하고 있진 않습니다. 대한민국 국군에서 정의하는 주적은 "북한 정권과 북한군"으로 국방 백서에 나와있습니다만, 이것도 주적으로 명시하진 않고 "적"으로 규정한 세력이 북한정권과 북한군만 나오기 때문으로 알고 있습니다.현재 휴전 상황인 점과, 대한민국 헌법에 입각해서 북한 정권이 당연히 주된 적인 주적으로 불리는 것도 타당할 수 있겠으나, 가장 큰 이유는 역시나 외교적인 문제가 가장 크다고 생각됩니다. "주적"이라는 표현 자체가 상종하지도 못할, 우리의 최후의 적이라는 표현과 거의 비슷하다보니 외교적으로 아예 선을 긋고 시작하게 됩니다. 주적의 사전적 정의를 보면 "주된 적"이른 뜻으로 결국 제 1의 적이라는 뜻과 같습니다. 하지만 외교적으로 보았을때, 평생 적도 없고 평생 친구도 없는게 현재 상황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중국과 북한을 정말 싫어하지만, 외교적으로는 무조건적으로 배척할 수도 없는게 현실입니다. 미국이 우리의 우방이고 저도 개인적으로 힘을 합쳐야 될 때가 온다면 미국이라고 생각도 하지만, 국제 관계에서 어떻게 변화하게 될지도 모르는게 현실이구요.국제적으로 보았을 때 주적을 북한이다 라고 명시하는 것 자체가 외교 채널을 단절시키고, 괜한 공격거리를 만들기 때문에 정권 자체에서는 사용을 자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주적이 북한은 맞다고 생각하고, 주적을 다른 나라로 말하는 사람은 선호하지 않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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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은 어떤 평가가 합당한 백제의 왕일까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의자왕에 대한 평가는 어떠한 방향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많이 차이가 나고 있습니다. 백제의 멸망을 막기 위해 힘을 쓴 왕이라는 평가와 백제를 멸망에 이르게 하였다는 평가가 공존하기 때문입니다.삼천궁녀 이야기와 같이 과하게 깎아내리려는 이야기를 제외하고 이야기 한다고 하였을 때, 왕권을 강화하고 대외 팽창을 하려고 노력하긴 하였지만 효과를 보기보다는 역풍을 맞은게 더 크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 대당외교를 적대적으로 돌리면서 나당연합군이 형성되게 만든 점도 있고,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무리하게 좌평을 늘림으로써 귀족들에게 반감을 산 것도 있습니다.반대로 당시 백제인들에게는 평가가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백제 부흥운동이나 후에 후백제를 세운 견훤도 의자왕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목을 내세웠기에, 평가가 나빴던 왕이었으면 명목으로 내새우지도 않았을 것 이니까요.개인적인 평가로 보았을때, 명군과 암군으로 구분하기에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진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명군이라기엔 너무 잘한것만 있는 것도 아니었고, 암군이라기엔 잘못한게 큰 것도 아니라서요. 그냥 평균의 왕이었고, 능력이 크지 않아 스러져가는 백제를 지켜내지 못한 왕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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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라는 개념과 파장에 대해 논해 주십시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역사의 존재 이유에 대하여 논한다면, 역사라는 과거가 없이 현재와 미래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이 있습니다. 과거의 단순한 사건을 역사가를 통하여 기록함으로써, 현대에 맞게 해석하여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자원이 됩니다. 앞만 보고 달리는 세상이지만, 달려가기 위해서는 이전에 내가 어떻게 달려왔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오버페이스로 뛰어왔다면 숨고르기가 필요할 수 있고, 주변 사람들이 지쳐보인다면 지금이 뛰어나가야 할 때입니다. 이러한 시기를 예측하기 위하여 역사라는 과목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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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이 원수부를 설치한 이유는 무엇인가요?대한제국이 원수부를 설치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대한제국 시대에 원수부를 설치한 이유는 근대식으로 군대를 정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전 조선~대한제국 초기에 이미 '군부'라는 국방 부서가 있었지만, 외세의 침입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대한제국은 군대를 근대식으로 개편하고, 외부 세력과 경쟁을 할 수 있는 최신식 군대 양성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를 가지고 국방을 담당하였던 기관이 원수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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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에 부산에서 출토된 유물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품의 출토지를 검색하는 기능이 있으나, 현재 전시중인지 확인하는 기능은 따로 없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사이트에 큐레이터의 전시 해설 예약을 할 수 있는데, 이 때 부산에서 출토된 유물을 같이 이야기 해달라고 요청하면 큐레이터분께서 추가하여 설명해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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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는 인도에 독립운동가 이라고 하던데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간디는 인도의 독립을 이끈 독립운동가이긴 하지만, 인격적으로 완성된 사람은 아니라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첫번째로 그는 인종차별 주의자였는데, 특히 흑인에 대하여 인종차별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지배층이 백인인 것이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기도 하였고, 흑인을 비하하는 'N워드'와 같은의미인 "카피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였다고 합니다.또한 금욕주의자로 알려져 있는 것과는 반대로 잠자리에 들 때 여러 여자들과 잠자리에 드는 행위를 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자신의 아내가 아닌 친분이 있는 집안의 처녀나 조카 며느리, 증손녀 뻘 되는 친척 등 어린 여자들과 같이 동침하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간디의 금욕 기준은 "성관계의 마지막 행위"만 안하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합니다. (이에 대해서 인도의 전통 요법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현대인의 상식에는 맞지 않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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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에 남산으로 끌려가 고문당한 게 흔햇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80년대 중앙정보부는 간첩 척살을 명목으로 남산(남영동)으로 끌고가서 고문을 자행하였습니다. 진실은 알기 어렵지만, 실제 간첩이 아님에도 끌려간 사람들이 현재도 많이 남아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대공 업무를 빌미로 정권 유지에도 사용하기도 하였기에, 억울하게 고문당한 사람들도 꽤 많았을 것으로 보입니다.그러나 시기로 보았을 때는 1961년에 설립되어 1981년에 해산되었기에, 80년대보다는 70년대에 위와 같은 일들이 많이 일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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