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오니즘과 유대교는 서로 다른 입장이라고 하던데 그게 무슨 말일까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시오니즘은 유대인들의 역사에서 이전 고향 땅인 예루살렘에 유대인의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민족주의 운동이었습니다. 이름 자체도 예루살렘에 있는 시온 언덕에서 따오기도 하였구요. 그러나 시오니즘을 처음 주장한 시오니즘의 아버지인 테오도르 헤이츨 자체가 무신론자였습니다. 시오니즘을 주창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들이었습니다. 시오니즘은 종교적인 운동이라기보단 유대인의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더욱 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대교인들은 입장이 다르다기 보단, 어디에서 살던 유대교의 교리대로 살면 상관 없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종교와 실제 생활을 구분하여 생각하였기에, 시오니즘과 유대교는 출발선 자체가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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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없는 미래 사회는 과연 가능한 걸까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전쟁이 없는 유토피아적인 사회는 아마 쉽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전쟁이 이루어 지는 것 자체가 "무엇인가를 소유하기 위해"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소유의 개념이 없다면 당연히 분쟁도 없겠지만, 모두 동등하게 소유하고 모두 동등하게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인간에게는 무리가 아닐까 합니다.플라톤이 언급하였던 고대 유토피아 세계 조차도, 현실의 모순을 부정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르크스가 이야기하였던 사회주의 유토피아도 결국에는 실패한 이론으로 알려져 있구요. 인간사회가 점점 더 발전함에 따라, 소유에 대한 부분은 더욱 심화 될 것으로 보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전쟁 뿐만 아니라 요즘에는 온라인에서 일어나는 정보전쟁도 일어나고 있으니까요. 하물며 동물들 끼리도 자신들의 영토나 음식 때문에 싸우고 있기에, 전쟁이 없는 삶 보다는 전쟁을 억제시킬 수 있는 것을 바라보는게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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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청자와 조선백자에 대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고려청자는는 10~14세기 고려시대 전성기를 이룬 도자기로, 옥색(비취색)의 색감을 띄고 있습니다. 이런 색이 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사용하였던 흙이 철분이 포함된 흙을 사용하고 바르는 유약 또한 철 성분이 포함 되어 있어 구워낼 때 청록색을 띄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삼강기법을 통해서 섬세한 세공을 하였기에 우아하고 귀족적인 느낌으로 평가받습니다. 이러한 느낌의 도자기가 유행하였던 것은 고려시대가 귀족 중심의 사회였기 때문에, 화려하고 정교한 도자기를 많이 선호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이었습니다.반대로 조선 백자는 깨끗한 흰색이 대표적이며, 다양한 무늬를 넣기 보다는 단순하거나 절제된 무늬나 장식이 특징입니다. 백자는 구울 때 백토를 사용하기에 철 성분이 없고, 사용하는 유약도 투명 유약을 사용하기에 깨끗한 백색으로 구워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백자가 조선시대 유행하였던 것은 선비 중심의 유교 문화였기 때문입니다. "청백리" 라고도 하는 선비의 검소하고 절제됨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았기에, 유행하는 도자기도 검소함을 강조하다보니 백자가 더 유행하게 되었습니다.시대적인 배경으로 인하여 이렇게 변화한 것도 있지만,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도자기의 기술력이 많이 소실되었다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임진왜란은 한편으론 "도자기 전쟁"으로도 불리었는데, 임진왜란 시기에 많은 도공들이 일본의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히데요시가 조선의 도자기를 좋아해, 전략적으로 잡아들였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의 도자기 기술력이 많이 소실되었고, 반대로 일본의 도자기 기술력은 상당이 발전하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아리타 지방의 아리타 도자기나 사쓰마 도자기 등이 있습니다. 고려시대 청자와 같은 도자기는 더 세심한 기술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전문 도공이 많이 없어진 조선에서는 상대적으로 기술력이 덜 필요한 백자 생산이 주를 이루었다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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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어갈 때 혜경궁 홍씨 집안은 왜 아무것도 하지 못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혜경궁 홍씨 집안이 사도세자를 구하지 않은 이유는 질문 주신 것 처럼 홍봉한이 노론의 핵심 인사였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당시 노론은 영조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조의 명령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의견을 낼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영조의 주장을 같이 밀어주어야 하는 위치에 있었기에 사도세자를 지키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영조 때문으로 알려져 있긴 하나 사도세자가 실제로 광증이 있었기 때문에, 사도세자를 지키려고 앞으로 나섰다가 오히려 홍씨 가문이 더 위험해 질수도 있었습니다. 이는 나가면 세손이었던 정조까지 위험해질 수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선택으로 사도세자가 아닌 세손 정조를 선택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영조와 뜻을 같이 했다고 보여집니다.이러한 이야기에 대하여 혜경궁 홍씨의 자서전인 한중록에는 세자가 실제로 미쳐있었고, 자신을 포함하여 모두가 두려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세자를 감싸면 자신과 모두가 죽을 수 있었고 정조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자신을 변호하여 써놓은 기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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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불교의 차이점에 대하여 알고 싶어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불교와 기독교는 동/서양의 대표 종교인 만큼 서로 다르면서도 어느 부분에선 비슷한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불교의 핵심 교리는 사성제와 팔정도입니다. 사성제는 인간사를 바라보는 진리로, "인간은 모두 고통을 받는다. 이 고통은 욕심에서 오는 것이며 욕심을 없애면 고통도 없어진다. 이 고통을 없애는 방법이 있다."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 고통을 없애는 방법 이라는게 팔정도로, 8가지 수행의 방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8가지 수행은 (정견-올바른 이해 / 정사유 - 올바른 생각 / 정어 - 올바른 말 / 정업 - 올바른 행동 / 정명 - 올바른 직업 / 정정진 - 올바른 노략 / 정념 - 올바른 마음가짐 / 정정 - 올바른 집중)입니다. 이 팔정도를 통해 인간의 고통을 벗어날 수 있고, 이렇게 고통에 벗어난 사람이 깨달음을 얻어 부처(보살)이 된다는 교리입니다.기독교는 우주와 인간을 창조한 전지전능의 하나님을 믿는 유일신 신앙으로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를 믿고 창세기에 나와있는 인간의 원죄가 인간 삶의 근본 문제로 보고 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오직 성자 예수님의 구원으로, 이런 구원은 하나의 행위라기 보단 신에 대한 믿음으로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 즉 기독교의 최종 목표는 예수를 통한 구원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고, 이를 통해 천국으로 가는걸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불교의 중심 교리에서 볼 수 있듯이 불교는 절대적인 창조신의 존재를 따로 믿지 않습니다. 본인의 수행과 깨달음을 중요시하며, 신이 정해주고 구원하는게 아닌 본인이 깨달음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하는 종교입니다. 반대로 기독교는 절대적인 유일신을 믿으며 신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또한 불교는 인간사의 고통을 인간 본인이 가진 욕망에서 오는 것으로 이해하기에, 기독교와는 다르게 이를 해결하는 것도 본인한테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죄는 태초부터 존재하는 원죄이며, 이러한 원죄의 해결도 결국 예수님의 구원에 의해서만 이루어 진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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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사남의 단종은 실제 어떠한 역사적 기록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왕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조선왕조실록의 승정원일기를 통하여 기록이 됩니다. 모든 왕들의 행적이나 일거수일투족을 승정원에서 매일 기록하는데, 이것이 승정원일기 입니다. 해당 왕의 사후 묘호가 정해지면 왕의 이름을 따 [00실록]으로 이름을 짓습니다. (세종실록, 단종실록 등등)단종의 경우 왕이 되면서 승정원일기를 통해 기록을 하다, 세조에 의하여 폐위되어 노산군으로 강등되었기에 노산군일기로 기록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후 단종이 복위되면서 단종실록으로 기록의 명칭도 변경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다만 세조가 단종을 폐위할 당시, 노산군일기를 손대서 고쳤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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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국시대 조나라와 조괄에 대하여 궁금한게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조괄이 당시 총대장이 된 이유는 우선 조괄이 조나라의 명장 조사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조사는 진나라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 "마복군"으로 세워질 정도의 명장이었으며, 그의 아들인 조괄은 수많은 병법서를 통달할 천재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실전에 대한 경험은 전무하여 당장 전장으로 나갈 실력이 되진 않았습니다.이후 진나라와 조나라의 전쟁이 길어지자, 당시 조나라의 사령관이었던 염파를 견제한 진나라의 승상 범수의 계책으로 사령관이 염파에서 조괄로 변경되게 됩니다. 염파는 진나라의 막강한 군세를 막기 위해서 진벽거수라는 수비적인 전략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침략쪽인 진나라의 물자를 낭비시키기도 하지만 수비측에도 많은 피로감을 주게 됩니다. 이때 범수가 계책을 내어 "진나라가 가장 두려워 하는건 지금 대장인 염파가 아닌, 조사의 아들 조괄이 사령관이 되는 것"이라는 헛소문을 퍼뜨리게 됩니다. 이게 당시 조나라의 왕에게 먹혀들어 총사령관이 조괄로 변경되게 되고, 조나라는 40만명이 생매장 당하는 역사적인 대패를 당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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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로아스터교가 기독교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말씀해주신 조로아스터교는 자라투스투라(조로아스터)에 의하여 창시된 고대 종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시작은 명확하지 않으나, 기원전 2000천~500년 사이로 추측하고 있습니다.기독교 교리에 조로아스터교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유일신 신앙, 사후심판, 메시아, 천국과 지옥 등을 나타내고 있어 기독교의 교리에 영향을 끼쳤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유일신(아후라 마즈다)가 선을 행하고 악을 벌한다는 것과 메시아로 이후에 강림할 것, 그리고 사후에 심판을 받아 천국(아후라 마즈다)과 지옥(앙그라 마이뉴)로 나뉜다는 것이 기독교의 교리랑 비슷한 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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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를 보다가 연산군이 " 승리자는 나 연산임을!" 이런 식으로 말하는데 이게 맞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연산군은 대군 칭호가 없이, 연산군으로 왕으로 즉위하였습니다. 원래 대군과 군의 차이는 중전 태생이냐 후궁 태생이냐로 나뉘어지는데,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는 중전일때 연산군을 낳고 이후 폐비가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합니다. 이로 인해서 연산군은 대군이 아닌 군으로써 세자 시절을 지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나 연산은~ 이라고 하는 대사는 솔직히 어울리지 않는 대사인 것 같기는 합니다. 원래 연산군의 본명은 "융"이기 때문에, 그런 대사를 할때도 본인으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을까 합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직책으로 본인을 칭하는 것 같은거라서요. (나 김대표는! 나 이대리는! 이런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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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영조, 연산군 조선시대왕,,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세조는 조선 7대 왕으로, 계유정난으로 조카였던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땐 조카를 몰아내고 왕권을 찬탈, 그리고 조카를 죽였기 때문에 폭군의 이미지가 강한 왕입니다. 하지만 왕이 된 방식에 정당성이 없었기 때문에 반대로 왕권을 엄청 강화시킨 왕이기도 합니다. 정통성이 없이 왕이 되었기 때문에 역모에 대해서 항상 신경을 썼고, 이를 막기 위해서 왕권을 강화시켰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는 직전법의 실시로 국가 재정 수입을 늘렸으며, 조선의 국가법인 경국대전의 편찬을 지시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국방적으로는 진관체제를 실시하여 당시 불안했던 대외 국방정책을 가다듬기도 하였습니다.연산군은 조선의 10대 왕으로, 세조의 증손자입니다. 아버지 성종의 부인 중 하나였던 폐비 윤씨의 아들로, 생모의 죽음에 당시 사림 세력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사림들을 잔혹하게 살해, 그리고 이후 방탕한 생활로 인하여 민심을 잃어버리게 되고, 중종반정으로 인하여 왕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쫒겨난 왕이기 때문에 왕의 묘호는 따로 없으며 연산군으로 강등되었습니다. 집권 초기에는 나름 그래도 멀쩡하게 국정 운영을 잘 하였다고 평가받았으나, 생모의 죽음에 대해서 알게 된 후 조선 역사 최고의 폭군으로 변하게 됩니다. 연관된 사림들을 가혹하게 죽여 2번의 사화를 일으켰으며, 왕과 사는 남자로 유명해진 한명회도 죽은 시체의 목을 베는 부관참시를 당하게 됩니다. 이후 "흥청망청"으로 유명한 흥청을 만들어 전국이 여자들을 데려오고 향락에 빠진 삶을 살다 중종반정으로 폐위당합니다.영조는 조선 21대 왕으로, 연산군 이후 약 220년 이후의 왕입니다. 이전에 문의주신 세조와 연산군과는 연관성이 거의 없다고 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 영조의 집권 시기는 왕권이 많이 약화된 시기로, 붕당끼리 서로 경쟁하는 붕당정치가 극에 달했을 시기였습니다. 당시 경쟁중에 있던 붕당 노론과 소론의 갈등이 극에 달하자, 이를 막기 위해 탕평책을 실시하여 나름 효과적으로 붕당체제를 관리하였습니다. (다만 해결한건 아니라, 미봉책으로도 불리고 있습니다.) 세금으로 거두었던 군필을 2필에서 1필로 줄이는 균역법을 실시하여 민생을 안정시키기도 하였고, 붕당끼리 항쟁으로 약해졌던 왕권도 강화시킨 왕이었습니다. 다만 아들 사도세자와 관련하여 잔인하게 죽임을 한 왕이기도 하여 현재에서는 평가가 좋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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