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 단종 복위,,,? 역사적 사실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단종 사후 241년 뒤인 숙종 24년에 단종의 왕권을 다시 인정한 복위 조치를하여 단종이라는 묘호를 받게 됩니다. 복위는 말 그대로 폐위된 왕의 권위를 다시 복귀시킨다는 뜻으로, 단종은 복위 운동에 의해서 복위된 것이 아닌 숙종의 명령으로 복위되게 됩니다. 단종의 복위가 이루어진 이유는 당시 지배 세력이었던 서인과 노론의 주장이 들어가서이며, 당시 유교의 중요한 덕목인 충과 예를 높이기 위해 단종의 곁을 지키면서 단종이 살아 있을 때 복위운동을 주도한 "사육신"을 높이기 위해 주장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단종이 살아 있을 때, 아직 군으로 강등되기 전 박팽년, 성삼문등이 주도한 단종 복위운동이 있었으며, 당시 실패하면서 단종은 왕에서 군으로 강등되고 유배당하게 됩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보셨다면 처음 시작할때 여기서 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이후 단종 유배 시절에 금성대군이 주도하며 단종 복위를 꿈꿨으나, 이마저도 실패하고 단종은 유배지에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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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믿는이유...... .. ....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예전 원시 종교에서 하늘을 믿었던 이유는 자연현상이 하늘에서 이루어진게 많았기 때문으로 해석됩니다.우선 하늘에 비추어진 해와 달은 고대 사람들에게는 "닿을 수 없는 절대적인 것"으로 인식되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해와 달을 품고 있는 하늘이기 때문에 하늘이 가장 높은 것으로 보였을 겁니다. 또한 하늘에서 내리는 비로 강이 생기고, 때론 넘치기도 하는걸 보고 농경 사회에 접어들면서 "하늘이 주는 비로 우리가 살아간다"는 인식으로 발전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자신들을 돌봐주고, 때론 천둥 번개와 같이 벌도 내리는 신성한 곳으로 느꼈을 가능성이 큽니다.과학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초자연적인 현상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지금도 종교적, 비과학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현재도 그런데 과학적으로 설명이 어려운 원시 시대에서는 더욱 종교적인 느낌으로 다갔을 가능성이 큽니다. 말씀해주신 물, 불, 바람등을 믿는 원시 종교들도 있었지만 이러한 모든 것들을 하늘이 품고 있기 때문에 하늘을 가장 위로 믿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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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적 역사관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유물론적 역사관은 사적유물론이라고도 부릅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주장한 이론으로 역사의 흐름을 사상이나 관념으로 보는게 아닌 물질적, 즉 생산 수단과 생산량을 중심으로 보는 마르크스주의 역사관입니다.유물론이란 이론은 세계의 근본을 정신이나 관념이 아닌 물질과 자연으로 보는 이론으로, 이를 역사에 대입하여 역사의 흐름을 물질로 해석하는게 유물론적 역사관입니다. 유물론적 역사관에 따르면 생산력의 발전 단계에 따라 사회가 발전한다고 보고 있으며, 원시 공산주의 사회-고대 노예제 사회-중세 봉건사회-근대 자본주의-사회주의(공산사회주의)로 발전할 것이다로 주장하과 있습니다. 즉 생산 수단의 발전함에 있어 생산 수단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계급으로 나뉘어지고 이를 토대로 사회가 구성된다는 이론입니다.유물론적 역사관 자체가 사회주의적인 개념이 있어, 결국엔 공산사회주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으나 현대 사회를 보았을때 공산사회주의 체제는 거의 없어졌기 때문에 지금은 설득력을 많이 잃어버린 주장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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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 대원군은 왜 쇄국정책을 펼쳤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당시 조선말 동아시아의 상황과 같이 고려해 보았을 때, 열강과의 통상을 침략으로 판단한 정책으로 볼 수 있습니다.1. 이전부터 조선은 쇄국정책의 기조였다.흥선대원군 이전에도 서양의 이양선이 출몰하거나 통상을 요청한 적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정조 시대에 영국 군함 프로비던스호가 부산에 도착하거나, 네덜란드의 상헌 드혼드 호가 조선에 정박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때의 조선 조정은 서양과 수교를 하기보다는 무력으로 체포를 시도하거나 빨리 돌려보내는 방식을 취하였습니다.이후 아편전쟁으로 서양 열강과 청나라의 충돌을 보았고, 이외에도 천주교 전파로 인한 조선 내 천주교 신자의 등장은 양반제를 위협하기에 서양에 대한 인식을 나쁘게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 정부는 서양과 통상 수교를 진행하기 보단 멀리 하려고 하였습니다.2. 병인양요, 신미양요 사건흥선대원군 시기에 쇄국정책은 "통상 수교 거부 정책"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흥선대원군 시기의 가장 큰 사건으로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있었으며, 이는 서양 열강과의 직접적인 무력 충돌로 조선 정부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느꼈을 가능성이 큽니다. 특히나 병인양요 이후 오페르트 도굴사건으로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 하였기에 흥선대원군 본인에게는 서양인은 상종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느껴졌을지도 모릅니다.3. 흥선대원군의 개혁 정책흥선대원군은 당시 조선의 시대상으로 보았을 때, 정통적인 가치 안에서 많은 개혁 정책을 펼쳤습니다.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당시 부패의 원인이었던 서원을 철폐하는 등 많은 개혁을 진행 중인 흥선대원군이었기에, 서구 열강과의 수교는 변수가 많은 것으로 판단되었을 수 있습니다. 조선 내부에서 많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외국과의 수교 자체가 부담으로 다가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흥선대원군의 개혁 정책은 전통의 가치관 안에서 진행하였기에, 이런 방향성을 읽고 싶지 않은 흥선대원군의 판단으로 보여집니다.문의주신 것 처럼 문호를 개방하여 흡수하였다면 발전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반대로 중국과 같이 흡수당하는 결과가 될 수도 있었기에 당시에는 서양열강과 화친을 선택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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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무신정권이 진행될 동안 가장 권력이 강한 기구는 어디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고려 무신정권 기간은 꽤 길게 유지하였기 때문에, 최고 권력기구도 변화가 있었습니다.무신정변의 처음인 정중부 집권 시기에는 중방이 최고 정치기구였습니다. 중방은 원래 군사회의를 하는 정치기구였으나 무신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중방에서 모든 일을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최씨정권의 시작인 최충헌 집중시기엔 교정도감이 최고 정치기구가 되었습니다. 교정도감은 원래 최충헌의 반대 세력을 축출하기 위하여 설립한 기구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국정을 논의하는 기구가 되었습니다. 이후 최충헌의 아들인 최우 집권시기에는 정방이 최고 권력기구가 되었습니다. 최우는 무신임에도 머리가 좋아, 문관들을 많이 등용하고 인력을 잘 이용하였습니다. 정방은 인사행정을 담당하는 기구로써 최우가 자신의 측근들을 요직에 앉힐 수 있는 중요한 기구였습니다.이외에도 무신들의 힘을 실어주는 사병집단인 도방과 삼별초, 마별초 등이 무신정권을 지탱하는 권력 기구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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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이 없었다면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이 없었을까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역사에 만약에는 없지만, 인조반정이 없었다면 정묘호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후금이 정묘호란의 의의로 내새운 것 자체가 선왕인 광해군의 원수를 갚겠다는 슬로건으로 전쟁을 일으켰던 터라, 인조의 즉위가 없었다면 정묘호란은 일어나긴 쉽지 않았다고 생각이 듭니다. 말씀해주신 것처럼 광해군의 중립외교로 당시 후금과의 사이도 매우 좋았어서 광해군이 계속 즉위를 하였다면 정묘호란이 일어날 가능성은 매우 낮았을것으로 보입니다.병자호란의 경우도 조선과 청과의 호칭 문제로 인하여 촉발된 전쟁이었기에, 인조대가 아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다만 병자호란 당시의 홍타이지는 영토에 관련하여는 확장 정책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구실로 조선을 침략했을 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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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사는 남자 보고왔는데 단종이 죽은뒤 한명회는 승승장구하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한명회는 단종 사후에도 계속 승승장구하며, 죽을때가지 영화롭게 살다가 죽었습니다. 세조 집권 시기에는 단종의 복위 운동을 막아낸 공로를 인정받아 정승이 되었고, 이후 예종-성종대까지 계속 권세를 유지합니다. 성종에게 자신의 막내딸을 시집보내기도 하였으나 막내딸이 후사가 없이 요절하여 덕을 보진 못하였고, 이후 성종대에 정직에서 물러나긴 하였지만 죽을때까지 큰 탈 없이 살다가 73세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하지만 사후 17년 뒤, 연산군 대에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죽음과 관련이 되어 갑자사화에 묘가 파헤쳐졌고, 시체의 목을 베고 해골이 길거리에 걸리는 부관참시를 당하게 됩니다. 이후 중종대에 다시 신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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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세계대전 당시에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한 이유가 뭔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일본의 진주만 공습은 당시 일본의 동남아시아 점령 야욕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중일전쟁 이후 미국에 의하여 경제제재를 당하였고, 석유 공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석유와 같은 원자재를 직접 채취하기 위하여 동남아시아를 점령할 계획을 세웠고, 이를 위해서는 미국의 태평양 함대가 아시아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게 하는게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미국 태평양 함대의 기지인 진주만을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하였고 이로 인해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일본의 예상과는 다르게 미국이 진주만 기습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해상 전력을 복구하였고, 미국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전하게 되면서 결론적으로는 2차 세계대전에서 추축국이 패배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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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무인 척준경에 대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척준경은 당시 기록으로 보았을 때 개인의 무력이 뛰어난 무장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척준경에 대한 기록 자체가 고려사의 반역 열전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척준경에 대한 기록을 일부러 부풀릴 필요가 없는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록들 자체가 개인의 무력이 뛰어나다는걸 알려주고 있어 현재에는 소드마스터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뛰어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몇가지 예를 들어보면, 척준경이 처음 등장했던 1차 여진 정벌 시기에 품계도 없는 하급 병졸 시절, 고려군이 포위당해 있을 때 척준경이 당시 지휘관인 임간에게 말 한필과 무기를 요청했다고 합니다. 원래 말단 병사가 이런 요청을 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나 시기가 시기인 만큼 임간은 말과 무기를 주었고, 척준경은 홀로 가서 적장 둘을 베고 옴으로써 여진의 포위를 뚫어냈다고 되어 있습니다. 또한 윤관(여진 정벌 시기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의 눈에 들어 그의 밑에 있을 때, 가한목 전투라고 윤관이 여진족에게 포위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척준경은 결사대 10명과 함께 윤관을 구출하러 뛰어들었고 윤관을 구출했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여진족 30여명을 혼자서 죽였다고 나와 있습니다.이외에도 다양한 전투에서 단신으로 적군 10~30여명의 목을 베었다는 기록이 많이 나와있고, 패배한 기록이 없어 현재에 무력이 뛰어난 소드마스터 별명으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현대에 유명해진 이유 중 하나는 드라마 도깨비의 공유 캐릭터인 '김신'의 모티브가 척준경을 모티브로 되었다고 알려져 있어, 현대에 더 유명해지긴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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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창제 이후에도 한문이 지배적이었던 이유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세종 대왕의 한글 창제 이후에도 한문이 지배적이었던 이유는, 당시의 기득권이 양반들이었기 때문입니다.언어와 글자라는 것은 사실 배움에 있어 가장 처음이 되는 요소입니다. 조선은 이런 글자를 양반들에게만 허락하고, 양반들만이 배움으로써 기득권을 유지하여 왔습니다. 훈민정음의 가장 첫 장에 나오는 세종 대왕의 한글 창제 이유도 중국과 말이 달라 백성들이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하기에, 이를 가엽게 여겨 한글을 창제하였다고 써있습니다. 세종은 한글을 통해서 백성들을 계몽하고자 하였습니다.하지만 기존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싶던 양반들은 당연히 백성들이 배우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이 무지하기 때문에 양반들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백성들 사이에서는 한글을 꽤나 많이 사용하긴 하였으나, 양반들은 "언문"이라 하여 한자보다 아래의 글자로 낮추어 불르고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글 창제 이후에도 주로 사용하는 언어는 한자였습니다.훈민정음 창제 당시에는 자음 17자·모음 11자로 총 28자였고, 현재는 자음 14자, 모음 10자로 총 24자 입니다. 없어진 글자들은 키보드 자판에서 보여드릴 수 없으나, 유성음으로 세모 모양의 반치음, 옛 이응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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