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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당시 선조는 중국의 어느땅에서 정착하여 어떤 계획을 세웠던건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선조는 6월 13일 영변에 도착한 선조는 국정 권한을 세자 광해군에게 넘기고 자신은 요동 망명을 결심했습니다. 14일에 선조는 망명 의사를 밝히는 외교문서를 명나라 요동 도사에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6월 18일에 요동 도사는 선조가 진짜 임금인지를 확인했습니다. 그 이유는 왜군이 가짜 왕을 세워서 요동에 진입한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명나라 병부도 선조가 왜적을 만나자마자 도주한 것은 이상한 일이라면서 조선이 일본의 길잡이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을 계속 표명했습니다. 6월 22일에 의주에 도착한 선조는 신하들에게 요동행을 독촉했습니다. 그러자 류성룡과 윤근수가 선조를 극력 말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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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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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이 한글창제로유명한데 한글을만들게된 배경이궁금해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세종대왕은 우리 말을 가꾸고 이를 글자로 표현하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과 정성을 들였는지를 엿보았습니다. 먼저, 한글 창제의 배경(이유)는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말과 달라 한문 글자와는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에 알 수 있듯이 우리말과 한자가 다르기 때문에 의사 소통의 한계가 있었습니다. 둘째,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글로)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딱하게 여기어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에서 알 수 있듯이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한글을 창제하였습니다.세째, 조선 왕조의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종은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는 한글을 통해 <용비어천가> 등을 발행하여 역성혁명과 고려의 잔존 세력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불거진 불안정한 민심을 수습하고 왕조의 정다엉을 홍보하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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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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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는 어떠한 이유로 왕씨가 많은걸 까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과거 왕을 지낸 적이 있어, 세상사람들이 '왕가(王家)"라고 불러서 왕씨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진나라이후의 최고통치자는 황제이므로 더이상 '왕가'라는 칭호는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한족이 아닌 왕씨들이 계속하여 왕씨가 추가되었습니다. 이외에도 사성(賜姓)을 받은 경우도 있고, 왕씨성을 사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나라때의 연왕 단의 현손인 가는 왕망에 의하여 왕씨성을 받았으며, 오대때의 유거비(劉去非)는 자기마음대로 성을 고쳐서 왕보의로 개명했다고 하네요. 그리고 이민족들이 귀화하면서 왕씨로 바뀐 경우도 많습니다.이상과 같이 진나라 이전의 왕을 지냈다는 부류, 사성을 받은 부류, 그리고 이민족들이 선택한 경우로 왕씨성이 중국에는 2억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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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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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공부하다보니 한국전쟁이 일어난 배경이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는 광복 직후 통일 정부 수립이 무산되고 남과 북이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정권이 수립되었으며, 갈등이 고조되었습니다. 남과 북은 각각 북진 통일과 남조선 해방을 내세우며 38도선 부근에서 잦은 무력 충돌을 빈번했으며, 지리산 일대에서는 좌익 세력이 무장 활동을 펼치며 남한 사회에 혼란 중이었습니다. 반면에 북한은 남침을 위해 소련으로부터 전차와 비행기 등 신무기와 군사적 지원을 받았으며, 조선 의용군도 북한군에 편입하였습니다. 1950년 초 스탈린은 북한의 남침 계획을 승인하였고, 중국도 미국이 전쟁에 개입해 전세가 불리해질 경우 참전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남한은 조선 경비대를 모체로 국군을 창설해 치안을 확보하고 국방력을 강화하였으나 미국의 태평양 지역 방위선에서 제외한 애치슨 선언으로 남한이 제외되어 전운은 더욱 짖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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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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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임진왜란이 일어난 배경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5세기 후반에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의 후계자 자리를 둘러싼 분쟁으로 무로마치 막부가 쇠퇴하면서 약 1세기 동안 전국 시대의 혼란이 계속되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 시대를 통일하였습니다.(1590) 그런데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는 무라이층의 불만을 밖으로 돌리곻, 대외 침략을 통해 부하 무장들에게 군공에 대한 은상을 지급함으로써 주종 관계 체제를 지속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정명가도', 명나라 정벌을 가는데 조선이 길을 빌려주라고 구실로 임진 왜란(1592)을 일으켰으나 이순신 장군의 활약과 의병의 활동, 명군의 지원으로 실패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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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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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의 만행을 보고도 공민왕이 가만히 보고만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공민왕은 사랑하는 왕비 노국대장공주가 난산으로 1365년 죽고나서 슬픔에 빠져 정상적으로 국정으로 운영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공민왕이 혼미한 상황에서 신돈은 영문하부사와 감찰사판사와 서운관판사 등을 겸직하면서 막강한 군력을 행사하였습니다. 특히 전민변정도감의 설치로 권문세족의 반발이 심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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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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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륵이란 말이 만들어진 유래는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조(위)가 유비(촉) 한중을 놓고 싸울 때의 일의 일입니다. 한중을 먼저 차지한 유비 군대의 강력한 방어에 막혀 조조의 군대는 갈수록 전지하기도 수비하기도 어려운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에 닭국을 먹던 조조는 먹자하니 먹을 것이 없고 버리자니 아까운 닭의 갈비가 바로 조조가 처한 상황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던 중 야간 암호를 정하려고 찾아온 부하에게 무심코 '계륵'이라는 명령을 내려버렸습니다. 부하들은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주부로 있던 양수만이 조조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고 짐을 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그 영문을 몰라 이유를 물었고 양수는 대답하였습니다. "닭의 갈비뼈는 먹을 만한 데가 없다. 그렇다고 버리기도 아깝다. 공은 돌아가기로 결정하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계륵'은 조조와 유비의 대결에서 나온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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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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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러시아 정벌 실패요인은?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전 실패 원인은 첫째 날씨 탓입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 중에 땅이 얼지 않아 대포를 이동하는 과정에서 바퀴가 진흙에 빠져 이동에 영향을 주었고, 베레시나 강이 얼지 않아 건너지 못했다고 합니다. 둘째, 병사들의 군복 문제입니다. 군복의 주석 단추가 제대로 달려있지 않아 체온 유지가 어려웠어요. 세째, 러시아의 청야 전술로 물자와 식량의 보급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이 실패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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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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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은 왜 오른손을 숨기고 사진을 찍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 자세는 황제의 독특한 습관이 아니라, 당시의 유행이었다고 합니다. 18세기에 누군가가 초상화를 의뢰할 만큼 지위가 높은 중요한 인물이었다면, 옷에 한 손을 집어넣고 서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나폴레옹의 ‘숨긴 손’ 포즈는 18세기에 부유한 상류층 젊은이들 사이에 유럽의 명소를 방문하는 ‘그랜드 투어(Grand Tour)’가 유행했는데, 그 과정에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의 의상과 행동에 친숙해졌다고 합니다. 그 결과 오른손을 옷 속에 숨긴 자세가 더 품위 있게 보인다는 생각이 널리 퍼진듯하다고 추전합니다. 19세기엔 사라진 이 자세를 20세기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도 선호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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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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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게르니카 그림 작품해석좀 해주세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게르니카는 스페인 북부의 바스크 지방의 작은 도시의 이름입니다. 1937년 4월 26일, 스페인 내란 중 독일의 히틀러가 독재자인 프랑코를 지원하는 무차별 폭격으로 2천 명이 넘는 시민이 사망하고 도시는 폐허가 되었습니다.이 소식을 들은 피카소는 같은 해에 열리기로 예정된 파리만국박람회의 스페인관 벽화 제작을 의뢰받은 상태였습니다. 피카소는 게르니카의 참사를 알리고자 부조리와 비극을 주제로 한 거대한 벽화를 한 달 반 만에 완성하고 작품의 이름을 <게르니카>로 하였습니다.작품은 흰색, 회색과 검정색만 사용하여 가라앉은 분위기를 조성하고, 단색 대비를 통해 절망과 비극을 극대화하였습니다. 왼쪽 죽은 아이를 안고 절규하는 여인, 그 옆에 관객을 응시하고 잇는 황소와 괴로워하는 말, 공포로 두려움에 떠는 두 여인과 불이 난 집에서 떨어지는 여인이 있습니다. 바닥에는 사지가 절단된 병사 등을 통해 잔혹함과 혼란한 상황을 묘사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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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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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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