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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성경은 누가 번역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신약성서를 처음 번역한 인물은 존 로스(John Ross, 중국 이름: 나요한(羅約翰), 1842년 ~ 1915년)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장로교 선교사로서 중국에서 선교활동 중에 최초로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한 사람이자 한글 띄어쓰기를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존 로스는 한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신약성서를 번역하여 1887년 <예수셩교젼셔>를 간행하였습니다.구약성경을 한글로 처음 번역한 인물은 알렉산더 A. 피터스 목사(Alexander Albert Pieters, 1871-1958, 한국명 피득(彼得)) 입니다. 피터스 목사가 한국어를 배운 뒤 3년만에 번역한 시편촬요(1898)는 최초의 한글 구약성경입니다. 그는 1895년 5월, 24세에 크리스천이 되어 당시 미국성서공회 일본 책임자였던 헨리 루미스 목사의 권고에 따라, 성경을 팔며 전도하는 권서인(勸書人) 자격으로 한국을 찾았으며, 그는 전국을 다니며 '쪽복음'을 팔면서 한국말을 익히기 시작했습니다. 특출한 어학 능력을 타고난 그는 한국에 온지 불과 2년만에 한국어를 완전히 통달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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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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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서 각시대별 수도에대해서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삼국시대의 고구려는 '졸본성'은 고구려가 기원전 37년, 두번째 수도인 국내성은 유리왕22년(서기3년)부터 장수왕 15년(427년)까지 수도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수도로 평양성은 장수왕 15년(427년)에 천도하여 668년까지 수도였습니다.백제는 한성(위례성)으로 건국 당시인 기원전 18년 수도이고, 두번째 수도인 웅진성(공주)는 무주왕이 475년에 천도합니다. 세번째 수도는 성왕이 538년 천도하여 660년까지 수도였습니다.신라의 수도는 서라벌(경주)로 신라의 건국인 기원전 57년부터 935년까지 수도였습니다.발해는 698년 동모산성에 건국하고, 742년 중경 현덕부, 그리고 문왕 당시 756년에 천도하여 잠시 동경 용원부로 옮겨졌던 시기(728-794)를 제외하고 926년까지 수도였습니다.후삼국의 수도는 후백제는 견훤이 892년 무진주에서 왕위에 올랐으나 900년에 완산주(전주)에 도읍하고 후백제를 건국하였으며, 936년까지 수도였습니다. 궁예는 896년 철원에서 898년 송악, 그리고 901년 정식으로 후고려를 건국을 선포하였습니다. 따라서 후고구려 선포 당시 수도는 송악이었으며, 904년 마진으로 국호를 바꾸고 905년 철원으로 다시 천도하여 918년 왕건에게 멸망합니다.고려는 왕건이 918년 건국하여 919년 송악(개경)으로 천도하여 멸망하는 1392년까지 수도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조선은 1392년부터 1910년까지 한양을 수도로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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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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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무신들에 의해 일어난 무신정변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가 성종 이후 문치주의 전통이확립되고, 거란의 침입을 격퇴하면서 일궈낸 평화로 문벌을 기반으로 11세기 귀족 사회가 성립되니다. 그러나 문벌은 관직과 경제 독점으로 모순이 심화되고, 결국 1126년 이자겸의 난, 1135년 묘청의 난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고려 문벌의 모순을 극복하지 못하고 부패와 타락으로 1170년 무신정변이 발생합니다.무신정변으로 문벌 귀족 사회가 붕괴되고 무신집권을 도래시킵니다. 그러나 무신들의 권력 다툼과 수탈로 정치적 불안은 농민 봉기, 천민의 봉기을 초래하고 신분제가 동요합니다. 무신 정변을 계기로 고려는 사회, 경제적 변화까지 이어져 고려 후기로 구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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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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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대사는 누구이고 어떤 업적을 가지고 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원효(元曉)의 원래 성은 설씨(薛氏)이고, 어릴 때 이름은 서당(誓幢)이었는데, 출가하여 원효라는 법명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잉피공(仍皮公), 아버지는 나마(奈麻)를 지낸 담날(談捺)로 6두품 귀족입니다. 아버지가 '나마'라는 품계를 보면 왕경(경주)에서 살았을 것을 추측됩니다. 태어난 곳은 경북 경산시 자인면 혹은 압량면 지역에 해당하는 압량군 남쪽의 불지촌의 북쪽 밤골 사라수 아래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원효는 661년 의상과 함께 당으로 건너가 유학을 시도하였으나 도중에 밤이 되어 무덤 사이에서 잠을 청하고 심한 갈증을 느껴 어둠 속에서 샘물을 손으로 떠 마셨는데, 아침에 확인해 보니 해골에 고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홀연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깨닫고 유학을 포기하고 국내에서 수행합니다.원효는 계율에 얽매이지 않는 파격적인 행보를 했습니다. 이두를 만든 설총은 태종 무열왕의 둘째 딸 요석공주와 상에 관계에서 낳은 자식입니다. 이 일로 그는 승복을 벗고 스스로 소성거사라 부르며 민가에 머물러 불교의 이치를 널리 퍼트립니다.원효는 <대승기론소>,<금강삼매경론>,<십무화쟁론>등의 저술을 했으며, 모든 진리는 한마음에서 나온다는 일심 사상을 불교의 핵심으로 여겼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화쟁 사상'을 주장하여 종파 간 논쟁을 조화롭게 승화시키려고 하였습니다. 또한, 중생의 마음이 부처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며, 불교의 교리를 쉬운 노래(무애가)로 만들어 부르며 백성에게 '아미타 신앙'을 적극 전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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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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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신종 때 만적의 난은 어떠한 이유때문에 일어나게 되었는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만적의 난은 1198년(신종 원년) 5월에 고려의 수도인 개경(현재의 개성)에서 노비들이 시도했던 봉기입니다. 1170년 무신 정변으로 문벌 사회가 무너지고 신분제가 동요하였습니다. 이의민 같은 사람은 노비에서 권력이 된 자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층민의 삶은 문벌이 지배하던 시기보다 나아지지 않았다. 무신은 토지와 노비를 늘려 세력 기반을 강화하였고, 농민과 천민에 대한 수탈도 확대하였습니다. 이에 삶이 피폐해진 농민과 천민은 사회를 변혁하려는 의지를 드러냈으며, 대규모로 봉기를 일으켜 지배층의 토지 침탈과 가혹한 수탈을 바로잡으려 하였습니다. 만적과 같이 신분 해방을 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다음은 만적이 난을 도모할 당시 연설 내용입니다.최충헌의 노비 만적 등 6명이 북산으로 나무하러 가서 노비들을 모아 놓고 “우리나라에서는 무신의 난 이래 고관대작이 천민에서 많이 나왔다. 왕후장상(王候將相)의 씨가 따로 있는가! 시기만 잘 만나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만 어찌 뼈 빠지게 일하겠는가! …… 최충헌과 주인들을 죽이고 노비 문서를 불태워 이 땅의 천민을 없애면 우리도 왕후장상이 될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고려사>그러나 만적의 봉기는 내부자의 고발로 실패로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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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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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도회군의 이유와 이성계의 4불가론에 대해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위화도 회군(1388)은 요동 정벌 지휘관이었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해 우왕과 최영(崔瑩, 1316~1388) 등을 제압하고 권력을 장악했던 사건입니다. 고려는 공민왕 재위시 철령 이북의 쌍성총관부를 회복하였습니다. 그러나 명이 건국되고 이 곳에 철령위를 설치하고 요동도사의 지휘아래 두겠다고 통보합니다. 이에 우왕과 최영이 요동 정벌을 결정했으나 이성계는 4불가론을 내세우며 반대하였습니다. 4불가론은 다음과 같습니다.첫째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슬러 공격하는 것은 불가하고,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불가하며, 셋째로 온 나라의 군사들이 원정에 나서면 왜적이 허점을 노려 침구할 것이고, 넷째, 장마철이라 활을 붙여놓은 아교가 녹고 대군이 전염병에 걸릴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성계는 정 요동을 공격하고자 한다면 추수가 끝난 가을철에 군사를 움직여야 한다고도 주장하였습니다. 우왕과 최쳥의 강한 주장으로 요동 정벌 시행은 결정되었으나 정벌군이 압록강 근처까지 행군했는데, 큰 비를 만나 도강이 어려운 상황에서 이성계는 다시 출병 취소를 요청하자 거부당했으며, 결국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였습니다. 이후 이성계는 개경으로 가 최영의 군대와 결전하여 승리하고 최영을 제거하였으며, 우왕을 폐위시켰습니다. 위화도 회군을 통해 이성계와 신진 사대부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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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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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사변은 무엇이고, 어떤 시기에 발생한 사건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만주사변은 1931년 9월 일본이 류타오후(柳條湖) 사건을 일으켜 만주 지역을 침략한 전쟁을 말합니다. 일제는 남만주 철도 주식회사(만철)와 수비대로서 관동군을 주둔을 통해 남만주 일대에서 지배권을 확보해 갔습니다. 가상 적국인 소련과 우리나라 독립군의 근거지를 간도를 지배하고 조선 통치의 안정화와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였습니다.중국이 북벌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제는 만주와 몽골 지역을 중국과 분리시켜 자신의 지배 영역으로 삼고자 계획을 세웠으며, 만주 봉천 군벌 장작림(장쭤린)을 제거하고 그 아들 장학량(장쉐량)과 손을 잡고 추진하였습니다. 그런데, 장쉐량이 장제스와 연대하여 북벌을 동참하고 만주에 대한 주도권을 회복하려 하자 전쟁을 계획합니다. 만주 군벌 류타오후 사건이 일어난 곳의 인근에는 장쉐량 군대가 주둔지 베이다잉(北大營)이 있는 곳으로 사건 즉시 일본군은 장뤠랑의 부대의 주둔지와 펭탄을 포격하면서 시작하였습니다. 일본은 1932년 3월 만주국을 세우고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를 황제로 즉위시켜 괴뢰국으로 지배하게 됩니다.이에 중국은 국제 연맹에 침략 행위를 호소했지만 조사단을 파견하여 일본군의 철수를 권고하는 수준이었으며, 대공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미국과 영국도 적극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만주 사변을 계기로 일제는 1933년 국제 연맹을 탈퇴하고 침략 노선을 확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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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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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서울진공작전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07년 11월 전국의 의병들이 이인영 등 전국의 1만여 명의 의병들은 13도 창의군을 조직하여 서울로 진격하여 일본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기 위해 경기도 양주에 집결하였습니다. 1908년 1월 허위가 이끄는 선발대가 동대문 앞 30리 앞 까지 진격하였으나 일본군의 반격이 심해 대패한 후 해산하였습니다. 실패한 이유는 일본에 비해 의병의 화력의 열세입니다. 두번째는 유생 의병 중심의 창의군의 신분적 한계입니다. 연합부대 창설시 평민들의 합류를 거부하는 하는 등 조직력에 문제를 나타냈습니다. 세번째는 지휘력의 미약입니다.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강으로 이탈하자 아쉽게 해산되어 2차 3차 공격으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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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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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광해군은 어떤 평가를 받는 인물이었으며 왜 반정이 일어났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은 성리학적 유교 국가입니다. 성리학은 이기론, 대의명분과 의리를 중시합니다. 특히 사림이 권력을 장악하고, 성리학적 지배질서는 더욱 확고하게 되었습니다. 폐모살제를 범한 광해군은 서인에게는 약점이 되었습니다. 또는 외교적으로도 명을 배신한 중립외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광해군의 처사는 사림, 특히 서인의 공격까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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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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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영의 세력은 어느쪽이 주도권을 가지고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영주에서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고구려와 말갈 유민이 탈추합니다. 이과정에 관련 사료로 <신당서>에는 "사리(舍利) 걸걸중상이란 인물이 말갈 추장 걸사비우와 고구려 유민과 함께 동쪽으로 달아나 요수를 건너 태백산 동북을 확보하고 오루하(지금의 목단강)를 의지하였다. 측천무후가 걸사비우를 책봉하여 허국공(許國公)을 삼고 걸걸중상으로 진국공(震國公)을 삼아 죄를 용서하였다. 그러나 걸사비우가 그 명을 받지 않으므로, 측천무후가 옥검위대장군 이해고와 중랑장 색구(索仇)를 시켜 쳐 죽였다. 대조영은 곧 걸사비우의 무리를 합병하여 지역이 (당나라와) 먼 것을 믿고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국왕(震國王)이라 불렀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신당서>의 기록을 통해 걸걸중상과 걸사비우는 대등한 인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말갈의 군장 걸사비우는 변방에서 고구려를 끝까지 지키던 장수였으며, 고구려 멸망이후 대조영과 함께 영주로 강제 이주당한 세력의 리더였습니다. 끝까지 대조영과 운명을 함께한 걸사비우는 고구려의 정규군에 편입된 세력이 아니라, 변방의 독자 세력으로서 말갈 추장이라 불렸던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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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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