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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왜빠르게 재건에 성공하여 발해가 건국되엇을까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구려의 멸망은 연개소문의 사후 후손들 사이의 내분이 결정적 원인입니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였지만 고구려 유민들은 적극적으로 고염무, 검모잠, 안승 등 부흥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당은 고구려 부흥 운동을 막기 위해 유민들을 고구려 옛땅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이동, 격리시키는 사민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대조영은 중국의 영주 지역에서 일어난 거란족의 반란 틈을 이용하여 말갈족과 함께 만주 지역으로 탈출하며 동모산에서 발해를 건국할 수 있었습니다.(698) 그러나 당은 대조영 세력의 진압을 포기하고 발해군왕으로 임명하고, 당의 군현으로 편입하려 하였지만 발해국을 선포하였습니다.당나라도 발해를 견제할 수 없었던 이유는 683년부터 713년까지 '무위의 화'라고 하는 정치적 혼란으로 정변이 거듭되었으며, 정변을 수습한 현종 초기 '개원의 치'도 얼마 가지 못하고 755년 안사의 난이 일어나 당이 쇠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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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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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현금 사용이 카드사용 비율보다 많은 이유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일본은 현금 사용 비율이 높은 나라입니다. 그런 이유로 일본 여행지에서 다채로운 동전 지갑이 기념품으로 많이 팔립니다.일본이 현금 사용이 많은 이유는 첫째로 일본은 지진으로 인한 재해가 많아 전기가 끊어지면 카드 단말기 사용이 불가능 하고, 현금 사용이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는 과거 금융 위기로 은행이나 카드사에 대한 신뢰가 좋지 못합니다. 그리고 현금을 사용하면 개인 정보 유출 등의 부담을 줄일 수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또한 은행에 돈은 넣어야만 하는 카드 사용보다는 집집마다 금고 사용이 많습니다. 세번째로는 일본은 우리나라에 비해 카드 사용에 따른 헤택이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외에도 고령화 사회로 카드 사용에 어려움이 있는 노인층이 현금 사용 선호도 원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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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23.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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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문명은 얼마나 발전된 문명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수메르인은 기원전 3500년경 인류 역사상 최초의 문명을 이룬 민족입니다. 따라서 수 많은 발명과 발전으로 문명을 건설하였습니다. 먼저 수메르인들은 인류 최초로 문자 체졔를 개발한 민족입니다. 수메르인들은 수학, 천문학 및 건축 등 지식을 점토판에 문자로 기록하여 인류의 발전에 기여하였습니다. 두번째, 수메르인들은 관개 농업을 통해 농업 생산력을 증대시킨 민족입니다. 세번째 수메르인들은 우르, 우르크, 키시 등 인류 최초의 도시를 건설하였습니다. 도시는 교역과 예술, 과학 등 다양한 활동의 장소가 되어 인류 발전에 이바지 하였습니다. 도시는 국가로 발전하면서 법률 등 정치 도구 등 통치 시스템을 발전시켰습니다. 네째, 수메르인들은 달력을 만들어 사용하고, 60진법, 천문학을 통해 농사와 계절을 에측하였습니다. 다섯번째로는 수메르인들은 바퀴와 돛을 개발하여 운송 수단의 혁신을 이루었습니다. 그 외에도 수메르인들은 건축(지구라트), 금속 공예, 예술 등 다양한 부분에서 천재성을 발휘한 민족이었습니다.헤로도토스의 '빛은 동방으로 부터'라는 언급에서도 알 수 있듯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훗날 페르시아, 그리스 등으로 확산되어 인류 발전에 기여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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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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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한 배경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동북공정은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의 줄임말로 정치, 경제, 문화, 군사, 국제 관계의 광범위한 대상을 주제로 2002년 시작하여 2007년까지 진행된 사업입니다. 그러나 종료된 현재까지도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동북 3성(만주 지역)에 대한 역사, 지리, 민족에 관한 과거, 현재, 미래를 연구 대상으로 합니다. 문제는 현재 중국 영토 지역과 그 지역에서 살고 있는 민족이 모두 중국사라는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 개념에서 출발합니다. 따라서 고조선, 고구려, 발해사가 자신들의 역사라는 논리를 정립하는 것입니다.우리나라와 관련해서 중국은 한반도의 정체 변화와 북한의 붕괴 가능성을 대비하여 중국내 조선족의 동요를 막고자는 의도에서 시작합니다. 또한 고구려, 발해, 고조선 등 한국 고대사를 왜곡하여 중화민족주의를 내세우고, 한반도에서 유사시 변화 및 통일시 북한 지역의 중국 연고권을 주장하기 위한 전략 의도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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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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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문왕이 자신이 고려 즉 고구려의 후손이라는 언급된 기록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발해의 3대 국왕 문왕은 737년부터 793년까지 재위한 국왕입니다. 문왕은 주변국과 적극적으로 교류하였습니다. 문왕은 무왕때 적대적인 당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고, 일본과도 좋은 관계를 가졌습니다. 문왕 때의 외교 문서를 통해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항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759년에는 일본에 조문사(弔問使)를 보내면서 문왕이 스스로 ‘高麗國王 大欽茂’(고려국왕 대흠무)라고 하였고, 또한 같은 해에 일본에서 발해에 보낸 국서에서도 발해왕을 ‘高麗國王’(고려국왕)이라는 기록에서도 발해가 고구려 계승을 엿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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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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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에는 기독교가 아닌 이슬람교가 퍼지게 된계기가 무엇이었을까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슬람교가 탄생한 아라비아 반도 지역은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지역입니다. 그러나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서쪽의 비잔티움 제국과 오랜 전쟁으로 비단길을 대신하여 바닷길을 통한 교역이 발달하게 되면서 메카와 메디나와 같은 지역이 발달합니다.그러나 메카는 당시 우상을 바탕으로 한 다신교, 빈부 격차, 부족간 대립이 극심한 지역이었습니다. 이 곳 메카에서 활약한 무함마드가 유일신 알라에 대한 믿음과 평등을 주장하는 이슬람교를 창시하였습니다. 622년 메디나로 잠시 피해있던 무함마드는 메케를 점령하고,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하면서 이슬람교의 교세는 확산되었습니다.이슬람교의 교세는 우마이드 왕조 때 이베리아 반도까지 진출하고, 오스만 제국 당시에는 1453년 동로마 제국을 무너뜨리고 발칸 지역 대부분을 지배합니다. 이슬람교가 기독교 등의 종교를 대신하여 세계적인 종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평등 사상입니다. 신분제 사회에서 '평등'은 신앙으로써 매력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개종하게 되었습니다. 두번째는 지즈야라는 인두세입니다. 무거운 세금으로 고통받고 있던 민중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하면 지즈야를 면제받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오스만 제국은 데브시르메 제도를 통해 어린 기독교 신자를 선발하여 예니체리 대원으로 임용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오스만 제국은 피정복 민족에 관대한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따라서 지즈야만 내면 자신들의 종교, 전통을 존중받을 수 있어 오스만 지배를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밀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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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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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만해도 독상형태로 먹는게 일반적이었는데 언제부터 가족이 한식탁에서 먹게된건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독상 문화였습니다. 겸상을 하는 경우에는 아이가 어릴 경우, 또는 할아버지가 손자와 겸상하는 경우는 있었으나 성년이 되면 겸상을 하지 않았습니다. 한 상차림의 소반이 발달 한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그런데, 독상에서 겸상으로 변하게 된 것은 일제 강점기입니다. 일제 강점기 독상에서 겸상에서 가족이 함께 식사하게 됩니다. 1937년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독상폐지 캠페인까지 등장합니다.(독상을 폐지하고 겸상에 가족이 화기애애하기 식사하자) 독상을 폐지하게 된 배경은 식량 수탈로 곤궁한 식량 사정이 반영된 것입니다. 또한 겸상에서 잔반과 버려지는 반찬을 줄일 수 있으며, 전쟁 물자 확보를 위한 놋그릇 공출 등으로 부족한 식기도 감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결론적으로 일제의 식량 및 물자 수탈을 무마하기 위한 식생활 변화가 독상에서 겸상 문화로 변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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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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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은 열하로 간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병자호란 이후 청과 조선은 사대관계가 되었습니다. 사대의 증표로 조선은 정기 또는 부정기적으로 연행사를 파견했습니다. 1780년 정조는 당시 청나라 건륭 제의 칠순을 축하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진하(進賀) 특사를 파견하였습니다. 특사를 이끈 박명원의 8촌 동생 박지원도 사절단의 일행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조선의 사신이 베이징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건륭제가 칠순 잔치가 열리고 있는 열하로 그들을 직접 초대하게 됩니다. 열하는 청 황제가 여름 더위를 피하기 위해 만든 여름 궁전이 있는 곳으로 베이징의 동북쪽 420리 밖에 있습니다. 1780년 조선의 정조가 건륭의 칠순을 축하하는 특별 사절을 보낸 덕분에 베이징에서 열하까지의 여정을 기록한 <열하일기>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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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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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가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한 독자국 이었다는 증거는 어디서 알수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발해는 황제국이었습니다. 그 근거는 첫째로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연호는 오늘날에 대부분 사용하는 서력 기원처럼 해를 헤아리는 단위로 중국 중심의 국가는 중국에 대한 사대 의미로 중국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벌해는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천통(고왕), 인안(무왕), 보력, 대흥(문왕), 중흥(성왕), 정력(강왕), 영덕(정왕), 주작(희왕), 태시(간왕), 건흥(선왕) 등을 사용하였습니다.또한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였습니다.문왕 딸인 정효공주비 비문에서는 황상(皇上)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문맥상 이는 당시 왕이었던 문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파악되며 그가 황제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또한 9대 간왕의 순목황후묘지에도 '순목황후'라는 한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그 외에도 중대성의 조고사인(詔誥舍人)이란 관직의 '조'는 황제의 명령을 의미합니다. 또한 말갈족으로 발해의 번으로 간주하여 다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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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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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의 열하일기가 당시 금서인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정조 재위 당시 박지원은 청의 발달한 문물을 수용하자고 주장한 북학 사상가입니다. 그는 문장도 고전문을 배격하고 비속어, 해학, 풍자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습니다. 그는 스스로 연암체라고 하고 <열하일기>, <양반전>,<허생전>등에 반영하였습니다. 그러나 집권 붕당인 노론 벽파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던 정조의 입장에서는 박지원이 노론 벽파 계열이고, <열하일기>에 사용된 문체가 타락하고 순수하지 못하다고 지적하며 금서로 지정하는 '문체반정'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박지원은 문체반정에도 굴하지 않았습니다.결론적으로 문체반정은 정조의 왕권 강화를 위한 노론 벽파와 대립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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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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