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초기 화매소는 어떤 기관이었나요?
화매소(和賣所)는 조선 초기 서울과 개경에 설치된 '저화' 교환소라 합니다. 저화는 태종 때 발행된 종이 돈입니다. 조선 건국 직후 국가 재정과 상업 활성화를 위해 저화를 발행하였으나 신뢰 부족으로 유통에 어려움이 있어 실제 사용은 저조했습니다. 비록 활발하게 유통되지는 않았으나 현물과 교환하기 위해서 화매소를 설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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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행료를 받던 시기의 법적 명목은 무엇이었나요?
현재 우리나라는 고속도로 통행료를 징수하고 있습니다. 법적 근거는 <유로도로법> 15조에 따라 통행료를 납부한다고 합니다. 국가 또는 지방 자치 단체가 운영하는 유료 도로의 통행료는 도로 건설 및 유지, 보수비를 위해 징수합니다. 특히민자도로는 통행료 징수를 통해 건설 비용을 보전하기도 합니다. 통행료 제도는 우리나라 이외에도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 여러나라에서 시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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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가 진짜 제갈량을 진짜 세번 찾아갔나요?
<삼국지연의>의 유비가 제갈량을 설득하기 위해 '삼고초려'했다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유비의 인재 등용을 위한 상징적 사례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그러나 실제 역사서인 진수의 <삼국지>에서 유비가 제갈량을 세번 찾았갔다는 구체적인 기록은 없습니다. 유비가 제갈량을 직접 찾아가 삼고의 예(三顧之禮)를 갖추어 영입했다는 언급은 있습니다. 유비가 ‘세 번’이라는 횟수나 구체적인 방문 과정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보이지 않습니다. 즉 삼고초려는 삼국지연의에서 극적인 상황을 위해 각색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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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시대에 남쪽으로는 어떤 나라들이 있었나요?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부터 기원전 108년까지 요령 지방과 만주, 그리고 한반도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국가입니다. 당시 고조선 남쪽으로는 '진'이 있었다고 합니다. 진은 중국의 역사서오 우리 역사서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진은 여러 소국의 연맹체로 이후 삼한(한)의 전신입니다. 기원전 2세기경 고조선이 중국 한나라와의 교통을 막으면서 진국이 직접 한나라와 교역을 했다는 기록과 준왕이 위만에 쫒겨 남쪽으로 내려와 진왕이 되었다고도 합니다. 위만 조선은 한과 진 사이에 중계 무역으로 성장하였다고 합니다. 그외 고조선의 동남쪽에는 옥저와 동예가 각기 함흥평야와 강원도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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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이 이룬 업적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면?
광개토대왕은 북쪽으로는 만주의 흑룡강 남부와 러시아 연해주 일부까지, 서쪽으로 요동 반도, 동쪽으로는 함경도, 남쪽으로는 한강 이북지역까지 지배하였습니다. 실제 영토 면적은 40만㎢로 남한의 4배 가량 됩니다. 만약 광개토대왕이 정복한 영토를 현재까지 우리나라가 차지하고 있다면 드넓은 만주일대를 차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석탄, 철광석, 희토류 등 풍부한 지하자원을 확보하여 경제적으로 많은 이점이 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영토 넓이 만큼 인구도 1억 이상의 대국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즉 방대한 영토와 자원, 인구를 가진 강대국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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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백제와의 열세를 극복한 비결이 뭘까요?
백제는 성왕의 전사를 계기로 신라를 매우 적대시하였습니다. 특히 의자왕은 642년 대야성 등 여러 성을 함락하여 신라를 위기로 몰고 갔습니다. 이 전투에서 김춘추의 사위와 딸도 전사하였습니다.위기에 처한 신라는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이후 당에 접촉하여 648년 나당 동맹 체결을 성사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김유신 장군과 같은 유능한 지휘관을 중심으로 전열을 재정비하여 군사력을 강화하였습니다. 반면 백제는 의자왕의 판단 실수와 실정으로 국정이 혼란에 빠졌습니다. 결국 나당 연합군은 660년 사비성과 웅진성을 함락하여 백제를 멸망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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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가 발해에 우호적으로 바뀐 이유는 무엇인가요?
8세기 초 발해의 무왕 시기에 발해가 당나라 등주와 요서를 공격하고, 돌궐, 거란 등과 연합하여 대당 강경책을 펼쳐 양국 관계는 매우 나빴습니다. 이에 당이 신라에 지원을 요청하여 군사적으로 발해의 남부를 공격하면서 신라와 관계가 개선되면서 발해는 외교적으로 고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이 시기 발해는 대외적으로 안정을 위해 사신을 당에 파견하여 관계를 개선하려 하였습니다. 문왕은 당의 율령 체제를 수용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당나라도 755년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 혼란에 빠지자 주변국과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당은 발해왕을 군왕에서 국왕으로 격상시켜 신라와 대동한 대우를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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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현재 우리나라에서 남아 있는 유적은 무엇이 있을까요?
고구려 유적은 대부분 한반도 북부 지역이나 만주 지역에 소재하여 남한에는 제한적입니다. 그렇지만 몇몇 유적이 남아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충주 고구려비입니다. 충주 고구려비는 충주시 가금면에 위치한 비석으로 고구려가 남한강까지 진출을 의미합니다. 또한 비석에는 고구려의 관직명과 신라, 백제에 대한 관계, 영토 경계 등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아차산 일대 고구려 보루는 토기, 농기구 등 실생활 유물도 많이 출토되고 있어 고구려의 군사적, 생활상을 보여줍니다. 경기도 연천군 호로구루성 등 북부지역에 고구려 계통 산성이 있습니다. 또한 서울을 몽촌 토성에서도 고구려 지배 시기 목간이 출토되어 실질적으로 이 지역을 지배한 근거를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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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한국에서도 토끼를 잡아먹었던 것으로 본 거 같은데요?
과거 토기를 사냥해 먹는 일이 실제입니다. 토끼는 선사시대부터 사냥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와 근대에도 토끼를 사육하여 고기와 모피를 이용하여 널리 활용했습니다.그러나 오늘날 토끼 사육과 고기 소비는 과거에 비해 많이 축소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소, 돼지, 닭 등 대중적이고 생산성이 높은 육류에 비해 경제성이 부족합니다. 게다가 토끼는 신선한 풀을 주식으로 하지만 공급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외에도 토끼는 애완동물의 인식이 높아 정서적으로 식용에는 거부감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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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한의 멸망원인은 유비 떄문일까요?
촉한의 멸망 원인은 유비가 감정적으로 오나라를 공격해 국력이 약화된 것이 사실이지만 촉한의 멸망에는 여러 원인으로 분석됩니다. 촉한은 영토와 인구, 지원이 위나라에 비해 현저하게 부족하여 장기적으로 발전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또한 유비는 이릉 전투에서 패배하여 관우, 장비 등의 핵심 인재를 잃어 손실이 컸습니다. 그리고 반복된 북벌 실패로 국력이 매우 약화되었습니다. 또한 후계자인 유선은 유능하지 못했으며, 제갈량 사후 인재가 부족했습니다. 그리고 말기에는 황호 등 간신의 전횡과 잘못된 인사로 혼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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