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이 한번에 몰락한 원인은 무엇인가요?
로마는 하루 아침에 세워지지 않은 것처럼 하루아침에 멸망한 것도 아닙니다. 우선 로마의 멸망 원인은 정치적으로 게르만족 등 이민족의 침입으로 약화되었습니다. 또한 황제권이 약화되고 군사력을 게르만 용병에 의존하고, 군인 황제의 출현으로 권력 찬탈이 빈번했습니다. 게다가 황제는 무능하고 관리들은 부패하였습니다. 뿐만아니라 사회적으로 타락하고, 기독교의 영향으로 로마의 정신적 가치관이 약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상업과 무역이 쇠퇴하고 콜로나투스 중심의 자급자족적 경제 체제가 되었습니다.이와 같은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요인이 되어 476년 게르만의 용병 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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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을 고르다가요. 화석이나 운석을 찾을 수 있을까요?
돌을 고르다가 화석과 운석을 찾는 것을 가능합니다. 그러나 적합한 장소와 전문적 지식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판단됩니다. 화석은 과거 생물의 흔적이 암석에 남아 있는 것으로 특정 지층에서 발견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운석은 매년 6천개가 지국에 떨어지지만 대부분 바다나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입니다. 그런데, 돌을 단순히 육안으로 구별하기 어렵기 때문에 화석학이나 지질착에 대한 기본 지석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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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팔자는 어느정도 그 사람과 일치하나요?
사주팔자는 태어난 연월월시를 기반으로 개인의 성격, 운세 등을 예측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날 같은 시각에 태어난 사람들이 동일한 운명으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사주팔자는 그 사람의 삶과 일치하는지에 대한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고, 주로 확률적 요소와 심리적 요인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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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시와스마츠리 축제가 백제왕과 연관이 있다던데 백제왕과 어떤식으로 연관이 된 것인가요?
일본의 미야자키현 난고손에서 매년 12월 열리는 '시와스마츠리'는 백제 멸망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 왕족 부자의 전설을 기리는 축제입니다. 시와스마츠리는 660년 백제 멸망 직후 일본으로 망명한 정가왕과 그의 아들 복지왕이 서로 떨어져 지냈다고 하는 전설에 따른 것으로 그들의 넋을 기리고, 1년에 한번 재회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축제는 2박 3일 동안 약 90km를 이동하며 진행되는데, 혼불 피우기, 살풀이 등의 행사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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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대왕은 숙종대왕의 첨의 아들이였나요?
영조는 조선 21대 국왕 숙종의 아들입니다. 그의 모친은 무수리 최씨(영빈 최씨)이기 첩의 아들은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론과 반대 세력으로 부터 끊임없는 정통성 논란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출생 배경은 영조에게 자격지심을 심어주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영조는 스스로를 철저히 다스리고 완벽한 군주가 되기 위해 노력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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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책을 만들어 낼때는 개인적인 감정이 들어가면 안되는거죠?
역사가는 개인적 감정이나 편견이 개입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역사는 사료를 기반으로 객관적이고 검증된 정보를 사용합니다. 또한 특정 사건, 인물에 대해 편중되지 않도록 다각적으로 접근하여 균형잡힌 서술이 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감정적 언어를 배제하고, 당시 가치관에 따라 시대적 맥락에 따라 기술해야 합니다. 즉 개인적 편견과 감정이 개입되면 역사의 본질을 왜곡할 염려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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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정약용 자식들은 다시 한양 서울로 복귀를 못하나요
다산 정약용은 유배 기간을 마치고 한양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남양주에 정착했습니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로 유배를 갔으며, 가문은 폐족이 되었습니다. 그의 자손들도 남양주에 머물며 농업과 학문 활동을 통해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다산은 자식들에게 한양의 10리 안에 살면서 기회를 엿보라고 당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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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이이는 어느저도 재력이 있던 가문이었나요
율곡 이이는 재력가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율곡 이이의 부모 이원수와 신사임당은 명문가 출신입니다. 아버지 이원수 사망 이후 분재기를 보면 율곡 이이는 논 14복(약 8두락)과 밭, 그리고 노비 15명을 상속받았습니다. 전체적으로 7남매와 서모 권씨 분배된 노비는 119명이라 하니 매우 부유한 집안 출신입니다. 거기에 외가인 신사임당 가문도 매우 부유한 집안으로 율곡은 외조모로부터 서울 수진방의 기와집과 전답을 상속받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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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의 초가집이 가격수준이 어느정도나 되었고 얼마나 가격이 뛰었나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17세기반~19세기말 가옥 문기>에 표기된 268건의 문서를 분석하면 조선시대 한양의 초가집 1칸 가격은 1800년대 초반 평균 13.03냥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1800년대 말 97.19냥으로 7.5배나 급등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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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암동 지역이 일본가옥 형태가 많은 배경이 무엇인가요
서울 후암동은 1910년대부터 일본인들이 서울에 정착한 곳입니다. 특히 삼판통으로 불리며 일본 상류층이 살던 고급 주택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후암동에는 일본식 목조 주택과 서양 주택이 결합한 문화 주택이 밀집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광복 직후 일본식 건물이 철거되었지만 이 곳은 개발이 늦어져 일부 일본식 건물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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