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는 왜 국가 차원에서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나요?
대장경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아 놓은 경, 승려가 지켜야 하는 규범, 경과 율을 해설하는 논을 총마라한 총서입니다. 고려는 불교 국가의 성격이 강한 나라로 부처님의 힘으로 국난을 극복하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실제로 거란의 침입 당시에도 초조대장결을 조판하여 나라의 안녕을 기원했습니다.하지만 몽골 침입으로 대구 부인사에 보관중인 초조대장경판이 불타자 이를 다시 새길 필요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고려가 몽골 침입으로 강화도 천도 중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의 힘으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팔만대장경을 조판한 것입니다. 즉, 팔만대장경은 몽골의 침입으로 인한 국난을 부처님의 힘으로 극복하기 위해 소실된 대장을 다시 조판하여 완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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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의 촌주는 어떤 역할을 했나요?
통일신라 시대 촌주는 지방 행정의 말단 촌의 책임자입니다. 촌주는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이 아니라 지역의 토착 세력으로서 촌의 지배층에 해당됩니다.촌주의 역할은 촌락 문서를 작성하고, 조세 징수, 주민 관리, 지방관을 도와 도와 행정 실무를 맡는 보조자였습니다. 신라 촌락문서에 따르면 그 댓가로 정부로 부터 '촌주위답'과 같은 토지를 제공받은 것으로 판단됩니다.즉, 촌주는 지방 촌의 지배계층으로 중앙 정부와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실질 행정을 맡는 실무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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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왜 일본과 그렇게 활발하게 교류했나요?
백제는 일본과 활발하게 교류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우선 신라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 이유입니다. 백제는 전쟁을 위해 병력, 말, 배 등 군사적 지원이 필요했으며, 일본은 국가 체제 정비를 위해 백제를 통해 불교, 한자, 기술 등 선진 문물을 수용하였습니다. 그리고 백제와 일본은 바다를 통한 해상 교통이 쉬웠습니다. 또한 백제는 중국 남조 문화와 연결된 선진 문물을 일본에 전달하는 중개자 역할을 했습니다. 즉, 백제와 일본의 관계는 상하 관계가 아니라 서로 이익을 주고 받는 동맹적 관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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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역사에서 의적으로 유명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조선에서 임꺽정, 장길상, 홍길동 등은 실존 인물이지만 의적 이미지는 후대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정사에서 이들은 주로 도적, 반란 세력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임꺽정은 조선 명종 때의 실존 인물로 도적 두목입니다. 민중 저항의 상징은 의적으로도 해석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장길상은 숙종 때에 활동한 실존 인물로 정사에서는 대체로 도적, 산적 두목으로 다룹니다. 홍길동도 연산군 때 활동한 인물로 소설에서는 백성을 돕는 영웅으로 묘사되지만 도적 두목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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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역사에서는 화웅을 관우가 물리치지않았다던데 사실인가요?
정사인 진수의 <삼국지>에서 황웅이 손견에게 토벌당한 것으로 기술되고 있습니다. 관우가 호뢰관 전투에서 활약한 것은 맞는 사실이지만 관우가 술이 식기전에 화웅을 베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관우가 화웅을 처단하는 장면은 후대에 관우를 영웅화하기 위해 강조된 서사 기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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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 혼혈이라도 피부가 하얗다면 사회적으로 백인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은가요?
피부가 하얗고 외무가 서양인에 가깝다면 당연히 백인으로 인식합니다. 하지만 생김새, 머리카락, 눈동자 등도 밝혀여 판단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백인인지, 동양인인지 하나의 기준으로 보지 않습니다. 특히 혼혈은 외모가 서양인에 가깝더라도 말투나 이름, 국적, 문화적인 맥락을 통해 판단합니다. 문화권에 따라 기준도 달라서, 서양에서는 더 외형 중심으로, 한국·동아시아에서는 혼혈 여부를 더 의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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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은 왜 그렇게 무거운 돌로 만들었나요?
고인돌의 덮개돌의 규모는 지배자의 권력과 공동체의 힘을 과시를 상징하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고인돌은 보통 지배자의 무덤으로 덮개돌이 클수록 많은 사람과 조직력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그 자체가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말합니다. 돌은 나무쐐기를 박고, 물을 부어 쪼갭니다. 그리고 통나무를 깔아 여러 사람이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이동시킵니다. 그리고 덮개돌인 큰 돌은 무덤을 덮는 기능을 하였으며, 죽은 사람의 위상과 공동체의 결속을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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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를 보다가 의자왕의 3천 궁녀는 거짓 역사라고 하는데?
우선 <삼국사기>와 같은 공식 역사 기록에서 "삼천궁녀"라를 직접 표현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백제 당시의 인구를 고려해도 3천명의 궁녀를 운영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삼천궁녀는 조선시대 문인들의 시문과 후대의 설화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특히 조선 성종 때 김흔이 '낙화암'에서 '삼천'이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합니다. 그리고 현대 대중매체를 거치면서 퍼진 것입니다. '삼천'이라는 것을 실제 숫자라기 보다는 매우 많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문학적으로 과장된 것입니다.그리고 의자왕이 무능한 군주라고 평가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백제 멸망의 원인은 백제의 구조적 약점과 나당 연합군의 공격에 의한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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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사냥을 가서 잡은 동물들은 어떤 식으로 처리를 했나요?
왕이 사냥을 하여 잡은 짐승은 궁궐로 가져와 국왕과 왕실의 식용으로 사용하거나 중용한 경우 제사, 의례 등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왕의 잡은 사냥감은 개인의 사유물이기보다는 국왕이 거둔 전리품의 성격이므로 시장에 내다 파는 것보다는 왕실의 체면과 정치적 의미를 살리는 방향으로 활용하는 편입니다. 다만 호랑이처럼 피해를 끼치는 맹수는 잡은 뒤 관료에게 상을 주거나 민심 안정의 상징으로 삼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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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장군들의 갑옷은 계급에 따라 재질이 달랐나요?
조선시대의 갑옷은 신분, 직책, 예산과 전투 목적에 따라 계급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조선의 갑옷은 철, 가죽, 종이, 삼베, 모직 같은 여러 재료를 사용하여 만들었습니다. 고위 장수급의 갑옷일수록 정교하교 장식이 많으며, 일반 병졸은 비교적 단순하고, 가벼운 재질로 제작된 갑옷을 입었습니다.고위 장군의 갑옷은 단갑, 전갑 같은 종류이고, 병졸은 지갑, 면갑, 상승갑 등입니다. 재질에 따라서도 고위층 갑옷은 철편가 장식이 풍부하고, 낮은 계층은 종이, 삼베, 무명 등 값싼 재료를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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