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훈련의 역사와 배경등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을지연습은 1968년 1.21 사태를 계기로 1969년부터 시작된 전쟁이나 국가 비상 사태를 대비하기 위한 정부, 공공 기관의 신속 대응 비상 대비 훈련입니다. 처음에는 북한의 국지 도발과 비정규전에 대비하는 성격이 강했지만 전면전과 국가 비상 사탞지 포함하는 조합훈련으로 확대되었습니다.1976년에는 군사연습인 ‘포커스렌즈’와 통합하여 을지포커스렌즈, 그리고 2008년에는 을지프리덤가디언으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2019년에는 정부 차원의 위기관리훈련을 강조해 을지태극연습으로 불렸으며, 2022년부터 다시 ‘을지연습’이라는 이름으로 환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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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금보다 비싸서 왕족들만 먹었던 '설탕'은 어떻게 전 세계의 노예 무역과 역사를 통째로 바꿔놓았나요?
중세 시대 설탕은 생산량이 적고, 운송과 정제 과정이 복잡하여 왕족과 귀족들의 사치품이었습니다. 그러나 15~16세기 유럽인들이 사탕수수를 신대륙에 옮겨 플랜테이션을 통해 대량 생산하여 다시 유럽으로 수출하면서 대중화되었습니다.사탕수수는 재배와 가공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으며,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인을 강제로 끌고와 노예로 부렸습니다.그 결과 설탕은 아프리카 노예 무역, 유럽 상인들과 금융업, 식민지 경제의 핵심이 되었던 것입니다.설탕, 노예, 무역품이 대서양 삼각 무역의 핵심이 되었으며, 가격 혁명과 상업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이후 차와 커피에 설탕을 넣어 퍼지면서 대중적인 소비재가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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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쓰는 알파벳은 원래 이집트 상형문자에서 소의 머리나 집 모양을 본떠 만들어졌다는 게 사실인가요?
이집트 상형 문자는 기원전 3000년경 부터 사용된 그림 중심 문자입니다. 그리고 페니키아 문자가 이집트 문자를 만들어져 지중해 동부를 중심으로 널리 사용했습니다. 이를 그리스 문자로 발전했으며, 로마자로 이어져 알파벳으로 발전한 것입니다.예를 들어 이집트 소머리 그림 문자키아 페니기나어의 알파, 그리스의 알파를 걸쳐 라틴 문자의 'A'로 발전한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그리고 집 그림 모양의 이집트 문자는 페이키아의 베타, 그리스에서의 베타에서 라틴의 'B'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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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기부에 한자가 들어가도 됩니까!!
학생부에 영어, 한자와 같은 것은 최대한 우리말로 풀어서 기록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하지만 한자 자체가 아니라 한자어가 일상적으로 쓰이는 경우는 무난합니다. 예를 들어 협력, 분석, 탐구와 같은 표현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지양합니다.즉, 학생부 기록은 최대한 대학의 입학 사정관이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학생의 활동이 드러나도록 작성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과정에서 특정 기관, 영어 등 외국어, 한자는 쓰지 않으며, 최대한 한글로 뜻을 풀이하여 기록합니다. 하지만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한자어는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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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에는 독재정권이 무너져도 왜 민주주의 정권이 없나요?
중동은 민주화로 독재가 붕괴되더라도 민주주의로 가지 못하는 이유는 민주주의 기반이 약해서 그렇다고 봅니다. 우선 오랫동안 억눌린 야권이 정권 운영의 경험이 부족하여 독재가 무너져도 정권을 운영할 능력과 합의가 부족하여 금세 갈라집니다. 또한 군과 무장 세력이 정치의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도 군이 금새 쿠데타로 다시 권력을 잡으니 민주화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중동은 종교, 부족, 종파 등으로 심해가 분열되어 있어 통합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선거가 시작되면 사회 전체 이익보다는 자기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다보니 내전이 일어나고, 민주주의와는 멀어지게 됩니다. 또한 석유와 같은 자원으로 국가가 버티는 경제 구조이기 때문에 자원을 통치 수단으로 활용하며, 외부 강대국의 개입으로 민주주의보다 안정과 협력이 우선시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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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양에는 궁궐이 5개가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조선시대 한양에는 5개의 궁궐이 조성되었습니다. 이는 왕이 한곳만 머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경복궁은 법궁으로 운영되지만 화재, 전쟁, 전염병 등으로 변고가 생기면 다른 궁궐로 옮겨야 했습니다. 그래서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과 같은 이궁이 생긴 것입니다. 또한 왕이 정무를 보고 사신을 맞는 국가 운영 공간이라서 필요에 따라 추가적으로 궁궐을 건설했습니다. 예를들어 법궁인 경복궁 이외에 창덕궁은 태종대 경복궁으로만으로 부족하여 지은 것입니다. 그리고 창경궁은 성종이 왕실 어른들을 모실 공간으로 조성하였으며, 덕수궁은 임진왜란 뒤 선조가 피난에서 돌어와 머문 임시 행궁이었습니다. 경희궁은 광해군이 조성한 궁궐로 보조 궁궐의 성격이 있습니다. 즉, 궁궐들은 왕이 사치스러워서 지은 것이 아니라 정치, 안전, 상징성을 위해 궁을 분산 운영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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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국가문화유산인 보물이 국보로 승격하려면, 어떤 조건이나 절차를 밝아야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보물이 국보로 승격하기 위해서는 보물보다 한단계 높은 가치를 지녀야 합니다. 보물 중에서도 아주 오래되었거나 그 시대를 대표하거나 제작 기술이 매우 뛰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형태나 용도가 매우 특이하거나 유명 인물과 관련되어 있으면 국보 지정이 가능합니다.국보로 지정되기 위해서는 보통 전문가가 조사보고서를 작성하고, 그 뒤 관보에 예고한 다음 문화 유산위원회 심의를 거친 최정 지정됩니다. 신숙주 초상처럼 언론에서 국보 승격을 언급하더라도 소유구너 소유권 문제, 절차 미비로 중지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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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의 사신은 조선의 관직으로 치면 어느정도 직급이었나요?
명나라 사신을 조선의 관리로 맞춰 대응하기는 어렵지만 일반 관료보다 훨씬 위로 대우받았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아마도 정승급 이상 때로는 조선 왕과 비등한 수준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사신이 오면 조선은 영접도감을 설치하고 원접사, 반송사 같은 전담 인력을 구성하여 안내와 접대를 했습니다. 숙식, 연회, 선물, 의전이 모두 국가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다고 명나라 사신이 조선의 왕보다 놓은 것은 아닙니다. 책봉 체제 안에서 왕이 사신에게 예의를 갖춘 것입니다. 사신이 무례하면 그냥 둘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매우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잘못 대응하면 외교 문제로 비화될 우려가 크기 때문입니다. 웬만하면 참거나 달랬을 것으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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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의 죽음에 관련해서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나요?
장영실은 천민 출신이지만 기술로 인정 받아 세종 시기 과학 기술 발전에 큰 기여와 공적을 인정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1441년 가마 사고로 파직된 뒤 어떤 기록에도 그에 대한 기록이 전하지 않습니다.1442년 장영실이 감독해 만든 국왕용 가마가 부러지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이 때문에 장영실은 의금부에서 국문으로 곤장 80대와 파직되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그의 이름은 다시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유력한 주장은 다시 천민이 되었거나 복귀 없이 일개 장인으로 여생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노비 출신이라는점과 가마사고로 국왕에 대한 불경으로 다시 재기용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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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호령하던 독일이 최근 몰락한 이유는?
독일은 1,2차 대전에서 패배하였으나 라인강의 기적이라 할정도로 경제 부흥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는 에너지 정책 실패, 중국에 대한 과다 의존, 산업 전환 등 복합적인 요인에 따른 것입니다. 메르켈 정부 시절 탈원전 정책을 강행하고 러시아 가스에 의존했으나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에너지 공급이 차단되면서 전기요금 폭등으로 제조업이 급락했습니다. 또한 독일은 자동차 산업이 발달했는데, 중국 시장 매출에 30~40%를 의존했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중국 자체 브랜드의 성장으로 시장 점유율이 줄어들고 기술 우위마저 상실하면서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고령화, 관료주의, AI 등 신산업 육성 부재 등으로 2023~2024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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