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혁명 같은 너무도 크나큰 실책을 저질렀는데도 마오에 대한 평가는 달라지지 않네요
마오쩌둥은 대약진 운동의 실패를 만해하고 권력을 다시 장악하기 위해 홍위병을 앞세워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문화대혁명을 추진합니다. 문화대혁명은 중국 역사상 최대의 사회적 혼란과 파괴를 초래하여 중국을 퇴보시켰습니다.그러나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을 국부로 존경합니다. 그는 중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이자 국공 내전에서 승리하여 현재 중국을 건국한 초대 국가 주석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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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임금 중 가장 권력이 약했던 왕은 누구인가요?
조선의 왕 가운데 가장 권력이 미약한 국왕은 순종으로 판단됩니다. 그는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한 이후 즉위하였습니다. 순종은 즉위 동시에 일제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강제하였으며, 군대를 해산시켜 황제로서 권력을 행사할 수 없게 만듭니다. 그리고 1909년 7월 기유각서를 체결하여 사법권을 장악하고, 경찰권도 빼앗더니 1910년 8월 29일 병합조약을 통해 일제에 합방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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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이 잦아더녔던 불로초들이 무엇무엇이였는지 알 수 있을까요?
진시황이 찾았던 불로초에 해당하는 것은 우선 인삼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인삼은 오래동안 불로초로 불려운 대표적인 건강 식품으로 사포닌 성분이 면역을 높이고 원기 회복을 돕습니다. 두번째는 하수오로 경년기 치료, 빈혈 치료, 자양 강장의 효과가 있습니다. 그리고 세번째로는 구기자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구기자는 면역 기능, 뇌세포 손상 방지, 피부 및 눈 건강 및 혈당 수치, 간 개선 등이 도움이 됩니다. 그 외에도 영지버섯, 황칠나무, 울금, 삼봉초 등이 불로초 대상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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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이 될경우 북한은 우리나라에 흡수될까요
남북 통일을 하면 한반도는 하나의 경제권이 됩니다. 따라서 쉽지 않겠지만 경제도 통합될 것이며, 분명히 남한에 의해 북한이 통합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그리고 북한의 지하자원 개발과 대륙과 관련된 유통도 한국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예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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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송의 마지막 애산전투같은 마지막을 장식하는 전투는 뭐가 있을까요?
원과 송나라의 애산 전투처럼 마지막 전투 사례로 한의 유방과 서초의 항위 마지막 전투인 해하 전투가 있습니다. 기원전 202년 해하 전투에서 유방은 사면초가로 초를 고립하여 곤경에 처하고 하고, 한신의 지휘로 초한전쟁에서 한이 승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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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코리아 라고 불리는 이유는 뭔가요?
고려는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주요국이 되어가면서 고려는 항구 대부분을 개항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려에는 아라비아 상인을 비롯하여 유럽의 상인들까지 방문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고려에 방문한 '아라비아 상인' 들과 '유럽 상인'들은 고려를 '꼬례'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꼬례'라는 명칭이 아라비아(중동)과 유럽 일부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꼬례'라는 명칭에서 알파벳 'a'가 붙기 시작하면서 영어권에서는 우리나라를 '코리아(Korea)'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하네요. 그리고 세계 공통어가 영어가 되면서 일반화 되었다고 판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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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에서 위연이 북벌당시 자오곡으로 침공시 북벌승리했을까요?
제갈량은 자오곡 계략은 성공확률이 낮아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자오곡을 통해 행군을 할 때 정예군 분만 아니라 식량을 지닌 보급 병도 함께 움직여야 하는데 자오곡은 험준한 길이라 불가능할 것으로 예측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산길ㅇㄹ 통해 공성할 중장비도 가져 가야 하는데 이동이 불가능하기 때문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대군이 이동하는데 비밀을 유지하지 못하고, 만약 조위가 사실을 알고 습격하면 촉한이 이길 확률이 어렵다고 판단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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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시기의 이정기라는 인물이 세운 제나라관련된 책이있을까요?
이정기는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독립적인 '제'를 건국한 인물입니다. 그가 세운 제는 산둥반도 일대 15개 주를 765년부터 781년까지 지배했습니다. 그리고 제2대 이납(781~792), 제3대 이사고(792~806), 제4대 이사도(806~819)로 4대를 이어갔다. 고구려 멸망 100년 후인 765년부터 819년까지, 고구려인 이정기와 그의 후손들은 55년간에 걸쳐 산둥반도에서 독립된 국가를 세우고 장안의 당 황제와 대립한 것입니다.이정기와 제나라에 대해서는 자치통감, 책부언귀, 문헌통고, 신당서 구당서 등에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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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대 간도 영유권을 놓고 조선과 청의 대립이 있었다는 데 어떻게 전개되었나요?
1712년 청은 백두산 정계비를 세워 조선과 청의 국경을 확정지었습니다. 그러나 1881년 청나라가 봉금을 해제하고 청국인의 간도 이주와 개간을 장려하면서 간도 영유권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1885년 1차 회담으로 조선의 이중하와 청의 덕욱이 간도 귀속 문제 협상을 하였는데, 백두산 정계비의 서쪽 경계인 압록강은 해석 문제가 없었으나 동쪽 경계인 '토문강'의 해석을 놓고 대립하게 됩니다. 청은 토문강을 두망강, 조선은 송화강의 지류인 토문강을 주장하였습니다. 각자의 주장에 따라 간도의 귀속이 자신의 영토로 편입됩니다. 그러나 협상은 결렬되었으며, 조선은 계속하여 영유권을 행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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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학생 등이 1964년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거행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은 1964년 6.3 시위와 관련이 됩니다. 6. 3 시위는 굴욕적인 한일국교 정상화에 대한 반대 운동으로 서울대 등 대학생들의 주도로 전개됩니다. 특히 서울대에서 1964년 5월 20일 서울대, 고려대, 건국대 등 2000여명의 학생들이 박정희 정권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장례식을 거행합니다. 이는 박정희 정부에 대한 선전포고와도 같았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5.16 쿠데타 이후 자신들의 권력를 미화하기 위해 1963년 부터 민족적 민주주의를 내세웠습니다. 이는 박정희를 장례 지내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또한 6.3 시위의 본질을 규정하는 내용이 집약된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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