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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살무늬 토기와 같은 토기는 어떻게 만들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빗살무늬 토기는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토기입니다. 점토와 비짐을 섞어 바탕흙을 준비하고, 서리기법, 테쌓기법으로 토기를 성형합니다. 그리고 토기에 문양을 새기고 건조시킵니다. 마지막으로 노지에서 600~700도에 굽니다. 이 과정에서 신화염 상태로 소성합니다. 따라서 적갈색을 갈색을 띠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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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4.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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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닌의 난은 무엇이고, 당시 일본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오닌의 난(1467-1477)은 무로마치 막부 시대에 일어난 쇼균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슈고 다이묘들간의 대규모 충돌입니다. 그 배경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처음에는 동생을 후계자로 지명했는데, 나중에 아들을 얻자 이를 번복하면서 간레이케였던 호소카와 가쓰뫁ㅎ와 야마나 모치토요 사이의 대립이 확대된 것입니다. 이는 무로마치 막부의 약화와 전국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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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4.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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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 혁명이 경제 활동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석기 혁명이라는 것은 농경과 목축의 시작으로 인한 급격한 경제적 변화를 의미합니다. 농경과 목축은 인류가 채집경제에서 생산경제로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물론 당시 농경과 목축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지만 점차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인류의 삶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혁명이라는 용어를 붙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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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4.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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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설화문학은 왜 관료 문인들에게서 성하게 된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설화 문학은 고려 신진사대부들 사이에 유행을 계승한 것입니다. 주로 한자로 쓰여졌으며, 역사, 전설, 신앙을 담고 있어요. 예를 들어 김시습의 '금오신화'가 대표적이죠. 이는 한국의 고유 신앙과 연결된 생활 감정과 역사 의식을 묘사하였습니다.이와 같은 설화 문학을 당시 문인 관료들이 문화, 예술과 연결되어 깊은 관심을 반영한 것입니다. 또한 문자 및 학문을 독점한 지식층의 전유물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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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24.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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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숙종은 어떤 임금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의 19대 국왕 숙종(1674-1720)은 현종의 유일한 후계자이며 적장자로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숙종은 집권 내내 환국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 했습니다. 그가 처음 집권할 무렵은 예송에서 승리한 남인 정권이었습니다. 그러나 숙종은 경신환국을 통해 서인, 그리고 기사환국으로 남인, 갑술환국으로 노론으로 붕당을 교체하면서 통치하였습니다. 그러나 환국 정치는 오히려 정치적 혼탁과 정쟁을 초래했습니다. 숙종은 왕비들과 후궁 사이에서 여러 자녀를 두었으며, 그 중 경종과 영조가 역사적으로 주목받는 인물입니다. 그의 정치적 결정은 종종 가족 관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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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4.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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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언제부터 농사를 짓기 시작 했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농경이 시작된 것은 신석기 시대부터입니다. 지금부터 1만년전 기온이 상승하여 현재와 같은 온난한 기후가 되면서 자연환경의 변화가 있었으며, 인류는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였습니다. 특히 정착을 선택한 인류는 농경과 목축을 시작하여 부족한 식량을 보충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인류는 초기 조, 피, 수수와 같은 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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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4.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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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은 어째서 음력을 사용하게 된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동양 사회에서 음력을 사용하는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선 전통적인 의식과 문화를 중시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나라는 요즘도 설날과 추석과 같은 중요한 명절이 음력으로 기준하기 때문에 이런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기 때문입니다. 또한 농사 일정과 계절 변화를 파악하는데 주로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즉 농사를 짓는데 있어서 실제로 태양력보다는 달의 움직임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음력은 농사 일정을 결정하는데 더 큰 역할 것이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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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4.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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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우리 선조들은 정말 밥을 많이 먹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식사량은 당시 사용한 그릇 크기나 기록을 보면 추정 가능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현대인보다 많이 먹었는데, 성인 남자는 한끼당 7~8홉(420~480g) 정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재 밥 그릇을 기준으로 보면 성인은 4그릇 정도 먹었습니다. 어린이도 1그릇 반을 먹었으니 정말 많이 먹었죠? 중국인과 일본인과도 비교하면 상당히 많은 양의 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조선인들은 중국인이 하루 먹는 분량을 한번에 먹어 치웠다고 합니다. 영국인 선교사 그리피스 존은 조선인은 일본인의 두배를 먹었다고 합니다.이런 대식 문화는 당시 육류 부족과 습한 기후로 인해 음식을 장기간 보관이 어려웠으며, 농사 일로 인한 높은 열량이 필요 소모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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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4.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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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우와 직녀 설화는 언제 생긴 건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견우와 직녀 설화는 은하수를 두고 서로 그리워하다가 한 해에 칠월 칠석에 한번 오작교에서 만나는 설화입니다. 견우, 직녀 설화 기원에 대해서는 중국 후한 시대에 만들어진 효당산의 석실 속 화상석에 견우성과 직녀성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전한 이전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고구려 덕흥리 고분 벽화에서도 견우와 직녀가 그려져 있어 일찌기 우리나라에도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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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4.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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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설, 성악설, 백지설의 발달 순서는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성선설'은 맹자의 주장으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선하다는 주장입니다. 맹자는 기원전 372년에서 기원전 289년까지 활약한 사상가입니다.'성악설'은 순자의 주장으로 인간은 태어나면서 악하다는 주장입니다. 순자는 기우너전 298(?)년부터 기원전 238(?) 활약한 사상가입니다. 그리고 '백지설'을 주장한 인물은 영국의 존 로크(1632-1704)의 주장으로 인간은 태어날 때는 백지와 같으니 경험으로 채워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춘추전국시대라고 한다면 고자(기원전 420-기원전350)의 '성무성악설'(본성이 선도 악도 없다)이 백지설과 유사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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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4.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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