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왕실이나 양반가에서는 유모를 두어 왕자를 키웠을까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양반과 왕실의 아이들을 키우는 유모라는 직업이 있었어요.. 유모는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옷을 갈아입히는 등의 보육하였습니다. 특히 왕의 유모는 봉보부인이라는 종1품의 작호를 받았습니다. 유모는 대부분 천민 출신으로 가정환경, 건강, 젖의 상태, 덕성 등을 고려하였습니다. 왕실의 유모는 원자가 3살이 될 즈음까지 궁중에서 생활하다가, 이후에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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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에서 목판화의 경우는 조각예술에도 해당하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목판화는 나무를 새기는 작업은 조각의 기법과 유사하고, 이미지를 인쇄하는 작업은 회화의 기법과 유사합니다. 따라서 목판화는 조각과 회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복합적인 예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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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드 3세라는 인물은 왜 유명한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블라드 3세는 15세기 루마니아의 역사적 인물로 드라큐라 가문의 귀족이며, 왈라카와의 공작입니다. 드라쿨레아는 '용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그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과 잔혹한 공포정치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특히 그는 작센인들의 마을을 약탈하고 수 많은 포로를 잡아 왈라키아로 돌아온 다음 이들을 꼬챙이로 꿰어버렸는데 이 일로 "체페슈"라는 악명이 높았어요. 그는 브램 스토커의 소설 <드라큘라>의 주인공인 흡혈귀 드라큘라의 모델이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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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출산율이 심각한데요 옛날에 아이를 많이낳던시절엔 왜 출산율이 높았던건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한국전쟁이 끝나고 경제적 안정과 의료 발달로 인구가 급증한 시기였습니다. 이 때를 베비붐이라 하여 55년부터 74년까지 20년 동안 한해 90만 명~100만 명의 엄청난 출생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가족의 중요성, 자녀의 사회보장 역할, 낮은 교육비용,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도 등이 출산을 촉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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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채화는 언제부터 있었던 그림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수채화가 물로 물감을 섞어 그린다면 유화는 기름으로 갠 물감을 사용하여 그리는 서양화의 한 기법입니다. 유화의 유래는 이미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 벽화에서 그 원시적 형태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중세시대에는 가톨릭교회의 장식 그림을 그리는 데 유화가 주로 사용되었으며, 16세기 르네상스로 접어들면서 유화는 비로소 서양미술의 중요그림 형식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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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도읍지는 계속 경주였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라의 수도는 경주였습니다. 경주는 기원전 57년 신라가 건국된 이래로 935년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992년 동안 수도로 삼았습니다. 경주는 서라벌, 금성 등으로도 불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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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지리학은 세계적으로 공인된 학문일까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풍수지리학은 과거 지리학의 한 이론으로서 자연과 인간, 땅과 인간의 관계를 전개하여 연구합니다. 관찰과 이해를 통해, 인간의 건강, 재산, 명예 등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를 파악하려고 합니다. 풍수지리학은 음양오행설, 동기감응설, 사신사 등의 이론을 바탕으로 산과 물, 기운과 혈, 명당과 객수 등의 개념을 사용하여 풍토를 판단하고, 도참과 연결하여 건축, 묘지, 도시 등의 위치와 배치를 결정합니다. 그러나 풍수지리학은 과학적인 증거나 논리보다는 경험과 상상력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으며, 미신적이고 주관적인 측면이 강합니다. 따라서 현대 학문적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한계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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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7조약의 내용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한일신협약(정미 7조약)은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에게 1907년 7월 일본이 대한제국에 강제로 체결한 불평등 조약입니다. 통감의 권한을 강화하고, 통감의 지도와 승인을 받아야 하는 법령과 행정을 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습니다. 그히고 일본인 관리를 차관으로 임명하여 한국의 국정을 완전히 장악하였습니다. 이 조약은 한국의 국권을 완전히 박탈하고, 일본의 식민지화를 촉진하는 조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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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고구려와 싸움에서 망하지 않고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4세기 백제 근초고왕은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구려 고국원왕을 죽게할 정도로 백제의 전성기 였습니다. 그리고 고구려는 소수림왕이 체제 정비 이후 5세기 광개토 대왕, 장수왕 때 삼국의 패권을 장악하죠. 그러나 백제도 체제를 정비하여 중흥을 도모하고 있었고 신라와 동맹, 그라고 왜, 가야와 연결하여 저항하였어요. 고구려는 국내 문제 및 중국을 견제해야 해서 남쪽에만 집중할 수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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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김씨 시조 김알지는 왕이 아니였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알지는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로, 전설적인 인물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탈해 이사금 때 금함에서 나온 아이로, 성을 김씨라 하고 이름을 알지라 했다고 합니다. 그의 7대손 미추 이사금이 김씨 최초로 왕에 즉위했습니다.<삼국유사>에 탈해왕이 김알지를 태자로 책봉하였으나 후에 파사 이사금에게 양보했다고 합니다. <삼국사기>에는 알지가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이 아도(阿道), 아도가 수류(首留), 수류가 욱보(郁甫), 욱보가 구도(仇道)를 낳고, 구도는 미추를 낳았다고 함으로써, 알지를 경주 김씨 시조로 합니다. 김알지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어린아이, 성모, 곡물의 신령, 김씨 부족의 족장 등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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