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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무신정권 때 팔만대장경을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가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고자 조성한 초조대장경의 경판은 안타깝게도 1232년(고종 19) 몽골의 2차 침입 때 몽골군에 의해 남김없이 불태워졌습니다. 나라의 보물을 잃은 고려는 불타버린 대장경판을 다시 새기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다시 새긴 대장경이라는 뜻의 재조대장경이라고 부르는데, 고려의 팔만대장경은 13세기 중반에 부처님의 신통력으로 몽골의 침입을 물리치기를 기원하고자 국가가 주도하여 조성하였습니다. 강화 천도 이후 1236년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는 대장도감(大藏都監)을, 남해(南海)에는 분사도감(分司都監)을 설치하여 조판을 담당하게 하였습니다. 대장경의 조판은 대몽항쟁이 상대적으로 소강상태에 접어든 1238년(고종 25)부터 1247년(고종 34) 사이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으며, 1251년 고종(38년)에 완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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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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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의 전개 과정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귀주대첩은 거란의 3차 칩임(1018년 12월), 소배압(蕭排押)의 10만의 거란대군을 상원수 강감찬(姜邯贊) 등이 귀주에서 크게 무찔러 거란군의 전의를 완전히 잃게 한 전쟁을 말합니다.거란은 1018년 12월 거란이 제3차로 고려를 침입합니다. 이에 강감찬을 상원수로,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삼아 20만8천 대군으로 소배압이 이끄는 10만의 거란군을 맞아 싸웁니다. 흥화진 성의 전면을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삼교천(三橋川)에서 패배하고, 남진하던 거란군은 자주(慈州 : 평안남도 자산) 남쪽에서 뒤쫓아온 강민첨의 공격을 받아 큰 손실을 입습니다. 서경의 동북 마탄(馬灘)에서 대동강을 건너다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하는 등 불운이 겹쳐 거란군은 전의를 거의 상실하였습니다.소배압은 정벌을 포기하고 황해도의 신은현(新恩縣)에서 회군해 연주(평안남도 개천)와 위주(평안북도 영변) 사이에서 청천강을 건너려 하자 강감찬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공격하였습니다. 다시 귀주를 지날 때를 기다렸다가 김종현(金宗鉉)의 공격에 몰려 북으로 달아나는 거란군을 뒤를 추격해 귀주의 전면을 흐르는 석천(石川)을 지나 반령(盤嶺)까지 강감찬의 추격을 받은 거란군은 겨우 수천 명만이 살아 돌아가면서 고려가 승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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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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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과 관련해 질문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엘리자베스 1세의 튜더왕조의 2번째 왕인 헨리8세(1509-1547)입니다. 그는 아들을 낳고 싶어 6번의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였습니다. 첫번째는 스페인 공주 출신 캐더린, 두번째는 앤블린, 세번째는 시무어, 네째 아나 폰 클레페 공녀, 다섯째 캐서린 하워드, 여섯째 캐서린 파입니다. 그러나 그는 시모어 사이에 난 아들 에드워드 6세이 전부이고입니다. 딸 가운데 성인으로 성장한 자녀는 캐더린과 사이에 난 메리 1세와 앨블린과 사이의 엘리자베스 1세입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에드워드 6세가 죽고, 언니 메리1세도 재위 5년만에 난소암으로 1558년 죽으며 그토록 미워한 자신의 후계자로 엘리자베스 1세를 지명합니다.엘리자베스 1세의 모친 앤블린은 외교관 토마서 불린, 어머니 하워드 가문의 엘리자베스로 헨리8세의 정비 캐더린의 시녀였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치적으로는 통일령을 선포하여 국교회를 확립하고, 구빈법 시행, 스페인 무적 함대 격퇴, 동인도 회사 설립와 문예를 장려하여 세익스피어 문학과 베이컨의 철학이 성과를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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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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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의 요동 정벌을 하자고 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미천한 출신으로 명을 건국하고 황제가 된 홍무제는 왕권과 신변의 안전에 불안해 하였습니다. 그런 이유로 주변 인물들을 의심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처형합니다. 게다가 북원이 호시탐탐 명을 겨누기 있기 때문에 주변국, 즉 조선과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습니다. 대표적 사건으로 표전문제를 둘러싼 홍무제와 정도전이 갈등입니다. 홍무제는 정도전이 여진족과 내통하고, 명에 적대적인 행위를 계획하고 있다고 의심하여 표전을 구실로 난징으로 불러들이려 했던 것입니다. 더불어 명의 가중되는 위압이 오히려 조선을 더욱 반발하게 만들어 정도전을 태조의 승인을 받아 요동 공격을 준비하였습니다.또한 요동 정벌 계획 추진을 통해 정도전은 군권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정도전을 이성계를 앞에 세워 조선을 건국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조선 초기는 공신, 왕자들이 사병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도전을 요동 정벌 계획을 추진하면서 사병을 혁파하고 군권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요동은 중국, 만주, 한반도를 연결하는 군사, 교통의 요충지입니다. 이곳을 지배함으로서 지역 패권에 우위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당시 명나라는 황제권이 아직 강하지 못한 처지였습니다. 이를 이용해 정도전은 요동을 정벌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홍무제의 사망과 왕자의 난으로 태종이 즉위하면서 조선과 명의 관계는 개선되면서 요동 정벌 계획은 파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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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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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도가 고구려를 공격한 것과 관련한 역사 기록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삼국지>에 “유주의 요동군 양평현 출신 공손도(公孫度, 150년~204년)는 아버지를 따라 현도군으로 옮겨 살다가, 189년 같은 고향인 서영의 추천으로 당시 한나라 승상 동탁에게 요동태수로 임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한나라 내부에서 민란인 ‘황건의 난’이 일어나 외부인 요동을 넘볼 여력도 없던 차에 마침 그쪽 지역에 밝은 공손도가 스스로 요동태수가 되겠다고 나서니 그냥 추인했거나 그러한 사실이 없음에도 첨가한 기록으로 보입니다. 즉, 한(나중에 위)와 고구려 사이인 요동 지역에 공손씨 세력이 50여년 동안 독자적인 세력으로 존재했습니다.당시 고구려는 고국천왕이 죽고 동생들 사이에 왕위 쟁탈전이 전개되었습니다. <삼국사기>따르면 고구려 고국천왕 사후 발기가 동생 산상왕과의 왕위 쟁탈전에서 밀려나 연노가(涓奴加)와 함께 하호 3만 명을 이끌고 공손도에게 망명하고, 발기는 공손도에게서 3만 명을 지원받아 고구려로 쳐들어갔지만 동생 계수(산상왕)와 을파소에게 패하고 자살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197) <삼국사기> 권 16 고구려본기, 산산왕 원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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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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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돌날은 어떤 도구였는지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좀돌날은 세석기, 잔돌날이라 하며 매우 작은 돌날로 후기 구석기시대의 고도로 발전된 제작 기술을 보여 주는 석기입니다. 뼈 또는 뿔, 나무 등에 장착하여 이음도구의 날로 이용되었습니다. 주로 응회암, 유문암, 이암, 혼펠스, 혈암, 흑요석 등이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동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눌러떼기 기술을 활용하여, 크기가 규격화된 좀돌날이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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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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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기우제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시대에도 기우제에는 국왕 이하 사람들이 근신하고, 천지 · 산천 · 종묘 · 부처 · 용신에게 제를 지냈다. 비가 내리도록 비는 법회(法會)도 열고, 도교의 태일(太一)에 초제(醮祭)도 올렸습니다. 그중에서도 무당을 모아 비가 내리도록 비는 취무도우(聚巫禱雨)의 기록이다. 많을 때에는 300명, 긴 날짜로는 6일씩, 흙으로 용을 만들고 비가 내리도록 빌었습니다.조선시대에도 기우제는 잦았다.<조선왕조실록>을 통해 기우제는 음력 4월에서 7월 사이의 연중행사였습니다. 이렇게 나라에서 지내던 기우제 중에는 국행기우제(國行祈雨祭)의 12제차가 있어서 각 명산 · 대천 · 종묘 · 사직 · 북교의 용신들에게 지내는 복잡한 절차가 있었습니다. 12제차는 가뭄의 정도에 따라서 5월에 1차, 6월에 2차를 지내기도 하고, 5월에 5차까지, 6월에 8차까지 하기도 하고, 심하면 4월에 10차까지 하고 5월에 12차까지 다 끝내는 때도 있었습니다. 조선은 무속 기우제와 승려와 어린아이도 참여하였으며 도교식 의례도 행해졌고 관원이 진행하는 유교식 의례도 정착되었습니다. 기우대상도 산천기우제의 대상이 되는 곳 외에 종묘·사직·우사단·풍운뇌우단·북교·소격전 등을 대상으로 기우제가 행해졌습니다. 국가의례에 대한 유교적 이해가 심화되면서 무속 기우제 중단에 대한 논의가 성종 때부터 시작되는데, 이어 많은 논의를 거쳐 숙종 때에 12제차의 국행 기우제의 과정이 확립됩니다. 그러면서 무속 기우제는 국행 기우제에서 배제되어 인조 25년(1647)에 종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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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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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ZONE는 언제부터 시작된건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인천시가 2023년 의료시설 주변의 보행안전을 강화하기 위해 전국 최초로 의료시설 주변에 안전안심구역, H zone(hospital zone)을 지정했습니다. 인천시는 대형병원 주변 최대 1km 이내 보행안전안심 디자인 가이드라인 개발 시범사업 대상지, 길병원과 남동구 일원에 5월 중 설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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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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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원종은 무신세력을 어떻게 몰아낼 수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원종이 무신 정권을 무신들간의 권력 쟁탈로 인해 스스로의 세력 약화입니다. 1258년(고종 45년) 최의를 죽이고 최씨정권을 무너뜨린 김준과 유경, 임연은 권력을 장악하으며, 개경환도를 거부하던 김준은 1268년(원종 9년) 12월, 임연과 그의 아들 임유무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두번째로는 원종의 배후에는 원의 지원이 있었습니다. 김준이 살해된 이후 실권을 잡은 임연은 1269년(원종 9년) 6월, 삼별초와 육번도방을 인솔하고 원종의 아우인 안경공 창(安慶公 淐)을 왕으로 옹립 원종을 별궁에 유폐하였습니다. 태자(충렬왕)가 원나라에 이 사실을 알리자, 같은 해 11월 임연은 원종을 복위시켰니다. 이후 원종의 밀명을 받은 송송례, 홍규 등에 의해 무신정권의 마지막 집정자인 임유무가 살해당함으로써, 100년간 지속된 무신정권이 막을 내리고 왕정 복구가 가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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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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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의 지명의 역사적 유래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신라의 최치원(崔致遠)이 낙향하여 절로 들어가는 길에 우연히 이 곳에 들렀는데, 주변의 경치가 너무도 아름다워 동백섬 동쪽 벼랑의 넓은 바위 위에 ‘해운대(海雲臺)’라고 음각으로 새긴 데에서 현재의 지명이 유래하였습니다. 본래 대(臺)는 높고 평평한 지형을 가리키는 용어이고, 해운대 역시 달맞이고개와 그 주변을 가리킵니다.해운대는 태종대·몰운대·신선대·오륜대·의상대·겸효대·강선대와 함께 부산팔경의 하나이며, 해운대 자체에도 팔경이 있을 정도로 경치가 수려하다. 현재 해수욕장을 비롯하여 온천, 고급관광호텔 등이 있어 우리나라 제일의 관광지입니다. 2001년에 벡스코(BEXCO)가 준공되고, 2005년에는 APEC 정상회담이 동백섬에서 개최되는 등 국제컨벤션 중심지로도 성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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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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