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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신분제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었나요?
고려의 신분제는 크게 양인과 천인으로 구분합니다. 양인은 국역을 부담하나 관직에 나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인은 국역을 부담하지 않으나 천역을 담당합니다.양인은 정호와 백정호, 그리고 향소부곡민으로 구분합니다. 정호는 직역이 있는 계층으로 문무 양반, 중간계층(남반, 향리, 서리, 군반 등)에 해당됩니다. 이들은 직역의 대가로 토지를 지급받았습니다. 백정호는 농민, 상인, 수공업자로 조세를 부담하지만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향소부곡민은 백정호보다 부담을 많이 지고 차별을 감수해야 했습니다.천인은 국역이 없으나 천인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로 노비, 화척, 양수척, 기생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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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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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신분제에서 천민과 양민의 차이는 무엇이었나요?
고려는 양인과 천인으로 신분을 구분합니다. 양인은 국역을 부담하는 계층으로 세금을 납부하고 병역의 의무를 집니다. 그에 대한 대가로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갈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양인은 크게 직역을 가진 양반 관료, 중간계층, 농민 등 정호와 그렇지 않은 백정호, 그리고 향소부곡민이 있습니다. 천인은 국역의 부담을 지지 않으며 관직 진출이 불가합니다. 주로 노비, 화척, 진척, 기생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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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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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신분제는 신분의 이동이 허용되었나요?
고려시대에는 신분 이동이 개방적이었습니다. 과거를 통해 관리로 임명되면 신분 상승이 가능했습니다. 예를 들어 중간계층인 향리도 과거를 통해 고위 관리가 가능했으며, 군공을 세워도 신분 상승이 가능했습니다. 예를 들면 이의민의경우가 대표적입니다. 또한 외거 노비는 재산을 형성하여 신분을 얻을 수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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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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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의 병마용은 어떻게 보존이 가능했나요?
진시황릉과 병마용갱은 1974년에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농부들에게 의해 우연하게 발견되었습니다. 매우 혼란한 시기였으나 비교적 잘 보존되었습니다. 발견한 농부들은 즉시 당국에 신고되었고 고고학자들이 신속하게 현장에 도착하여 발굴 작업을 시작해 빠르게 보호 조치가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문화대혁명이라도 병마용갱은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호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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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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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금과 명의 전쟁시에 명의 파병요청에 대해 광해군이 취한 조치는 무엇인가요?
광해군은 명나라가 원군을 요청하자 신중하게 대처하였습니다. 명나라와의 관계를 고려해 지원군을 보내기로 결정했지만 동시에 후금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중립적 태도를 보인 것입니다. 광해군은 강홍립을 도원수로 임명하고 약 1만 3천명의 군대를 파견하면서 전투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결국 후금과의 전투에서 패해한 후 항복하게 되었고, 이는 광해군의 중립외교로 해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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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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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당근이 눈에 좋다는 이야기는 영국의 프로파간다로 정보가 더 퍼졌다는데 사실인가요?
당근에 포함된 베타카로틴 성분이 비타민 A로 전환되어 시력 유지에 좋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당근이 눈에 좋다는 이야기는 제 2차 대전 중 영국의 프로파간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영국 공군이 독일군 야간 공습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레이더 기술을 사용했지만 이를 비밀로 유지하기 위해 당근이 조종사들의 시력을 향상시켰다는 이야기를 퍼드렸습니다. 즉 레이다 기술 보유를 독일에 속이기 위해 당근을 이용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당근이 눈에 좋다는 믿음이 전 세계에 퍼지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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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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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땅속에서 유무를 발견하면 제소유가요?
매장 문화재를 발견하면 우선 발견 장소의 현상을 변경하지 말고 그대로 유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발견한 날로부터 7일 이내에 관할 시군청,경찰서 또는 문화재청에 신고해야 합니다. 그리고 신고를 받은 기관이 실태 조사 및 발굴을 진행한 이후 국가에 귀속됩니다. 매장 문화재는 국가에 귀속되지만 발견자는 보상금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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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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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은 어떻게
강릉 무장 공부 침투 사건은 1996년 9월 18일 인민무력부 정찰국 소속 특수부대원 26명이 탑승한 상어급 잠수함이 강원도 강릉시 해안에 좌초되면서 일어났습니다. 이에 우리나라는 군과 경찰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펼쳐 49일간 교전이 벌어졌으며, 26명 가운데 24명이 사망하고, 1명이 생포되었으며 1명은 행방불명 상태로 추정됩니다. 또한 국군도 12명, 경찰 1명, 예비군 1명, 민간인 4명이 사망하고 27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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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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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루스 2세가 페르시아의 왕이 된 과정이 어떻게 되나요?
키루스 2세는 기원전 600년 페르시아의 왕 캄비세스 1세와 메디아 왕국의 공주 만나다 사이에 태어났습니다. 그는 기원전 559년 아버지를 이어 국왕에 즉위하고, 외조부 메디아의 왕국에 반란을 일으켜 외조부를 공격하여 메디아를 정복했습니다. 이로써 페르시아는 메디아를 흡수하여 독립을 이루고 키루는 페르시아 제국의 초석을 다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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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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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당 시절 거창 공비사건에 대한 역사평가에 대하여 역사적 평가는 어떠한 결론이 내렸는지? 궁금합니다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은 1951년 2월 6.25 전쟁 중 거창군 신원면에서 국군에 의해 발생한 민간이 대량 학살 사건입니다. 공비 소탕을 명분으로 약 500여명의 민간인 학살되었습니다. 거창 양민 학살은 민간인들이 희생된 비극적 사건으로 사건 직후 국회 조사단이 파견되어 진상 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당시 군부의 은폐 시도로 제대로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으나 4.19혁명 이후 진상이 제대로 밝혀져 관련자들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특사로 풀려났죠.1990년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거창 양민 학살 사건 재조사와 명예회복이 이루어졌습니다. 1996년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 조치법'이 제정되었고 2022년 대법원은 국가 배상 소멸 시효가 지나지 않음을 인정하여 유가족들에 배상이 확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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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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