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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천주교가 역사적으로 분리가된계기는 무엇때문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기독교라는 말은 사실 주교(천주교)와 개신교(예수교)를 통틀어서 지칭하는 가장 넓은 개념입니다. 주교(가톨릭)와 개신교는 사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에서 분리된 종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가톨릭이란 말은 '두루 따르는, 모두를 포함한'이란 뜻을 가진 고대 그리스어 카톨리코스(Katholikos : 영어 Catholic)에서 온 말인데 '보편적'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하나같이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으로, 특히 당시의 유대교에서 분리된 여러 종교 집단들로부터 구분하는 의도도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대에 와서 가톨릭은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와 구분하는 종파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이처럼 종교개혁 이후 성경에 대한 견해, 성직자에 대한 인정 범위 등의 차이로 인해 기독교의 종파로서 자연스럽게 의미가 분리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재는 그 종파가 별개의 종교인 것처럼 구분되어 운영되는 것은 안타깝기도 합니다.상기 내용은 일전에 유사한 질문에 제가 답변에 달았었던 내용을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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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4.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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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보면 108배라는 게 존재하는 데요~ 108배는 어떤 의미일까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불교에서의 108배는 108가지 번뇌를 참회하며 벗어버리기 위해 수행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왜 108배일까요?그것은 우리의 감각 기관을 나타내는 안(눈)/이(귀)/비(코)/설(혀)/신(몸,피부)/의(머리,생각)의 6가지 기관과 그것으로 인식할 수 있는 대상 색(모양과 빛깔)/성(소리)/향(냄새)/미(맛)/촉(촉각)/법(생각의 대상)의 6가지가 과거/현재/미래 세 시기에 나타나므로 과거를 참회하고, 현재를 다스리고, 미래를 다짐하는 의미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기관 6가지 + 대상 6가지 = 12가지 번뇌가 존재하며,그 12가지 번뇌가 3생 즉, 과거/현재/미래 각 시기에 발생하였거나, 발생하고 있고, 발생할 가능성이 있으니 각 시기마다 12가지 번뇌가 존재하게 되니 총 36개의 번뇌가 존재하게 됩니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3귀가 있습니다. 3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부처께 지심으로 귀의합니다둘째로 법보(불법)께 지심으로 귀의합니다.셋째로 승가와 승보(승려 또는 승려집단)께 지심으로 귀의합니다.따라서 거의 모든 경우에 절을 할 때 3번의 절을 합니다. 그래서 위의 총 36가지 번뇌를 잠재우고 없애기 위한 수행으로 절을 하며 다짐을 하는데 '36가지 번뇌 X 3번의 절 = 108배'가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108배라고 하는 것은 다른 불교 문화에는 의미는 같은 것이 있지만, 절의 횟수까지 같은 것은 없는 것으로 보이나 우리나라의 경우 오랜 시절부터 그렇게 의미를 부여하여 수행의 방법으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내용은 비슷하나 108이라는 숫자를 만드는 것에 다르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으니 검색엔진에서 찾아보셔서 비교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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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4.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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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는 유화가 발달할수있었던 이유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유화의 시초는 얀 반 에이크(1395년생)라고 보았습니다. 정확히 누가 유화 물감을 발명하고 시작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반 에이크 가문이 안료에 섞는 기름을 개발하고 유화를 발전시켰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므로, 유화의 시초를 그렇게 보는 것이 현재의 정설인 듯 합니다.색을 내는 안료의 분말을 기름에 섞은 것이 유화 물감입니다. 유화 물감 발명 이전에는 안료 분말에 달걀을 사용하였고 이름 템페라 기법이라고 합니다. 달걀은 그림을 그리던 중 마르는 속도가 너무 빠른 나머지 그림을 그리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벌꿀, 아교, 송진, 나무수액, 각종의 기름을 섞어 시도해보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것이 이탈리아로 전해졌고, 르네상스 회화가 발전하면서 대부분의 그림들이 유화로 그려지게 되었던 것으로 봅니다. 서양은 유화, 동양은 수묵화가 주를 이루었던 이유는 서양은 처음 그림 등은 양피지나 나무판 등에 그려졌습니다. 아니면 프레스코화처럼 벽면에 그려졌습니다. 그러므로 작품의 보존성에 무게를 두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후 배의 돛으로 사용되던 질긴 재질의 캔버스가 사용되면서 더욱 유화로 굳어졌던 것 같습니다. 그에 반해 동양은 일찌기 종이가 발달하였고, 그림보다는 문자의 기록을 위주로 하여 먹을 사용하였고, 자연스럽게 종이에 그림을 그리게 되다 보니 그대로 발림성이 좋은 먹을 사용하여 그림을 그렸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후 색을 내는 안료를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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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4.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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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궁선수 일본풍가게에 매국노라고 sna저격해서 난리던데 매국노 의미가뭔까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매국노 (賣國奴)는 한자어로팔 매 賣나라 국 國종 노 奴글자 그대로를 풀이하면 나라를 팔아먹은 종놈이라는 뜻으로 과거 일본 또는 열강에 빌붙어서 국가의 이익이 아닌 개인의 이익을 위해 배신하는 행위를 하는 이들을 속되게 비하하여 부르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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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4.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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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시대때 가장 유명한 황제가 누구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로마 제국의 황제 중 유명한 사람은 아래와 같습니다. 가장 먼저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로마 제국 최초의 황제입니다. 그는 로마 제국의 황제에 대한 정치적 체제를 정립하였고, 놀랄만한 통치력으로 '파크스 로마나' 라고 불리는 로마의 평화 시대를 이끌었던 인물입니다. 그리고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 제국의 성장을 이끈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가 있을 당시는 공화정이었으나 그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이후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될 수 있도록 유연한 리더십과 정치력으로 로마 제국을 세운 인물로 지금에 와서는 황제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카이사르 전쟁과 공화정 시대의 끝을 알리는 역사적 사건 등으로 유명합니다. 그리고 네로 황제는 로마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황제 중 한 명으로, 그의 잔인하고도 흉악한 행동은 역사에 오래도록 남아 있었습니다.마지막으로 황제 트라야눌루스는 로마 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 중 하나로, 최대 규모의 로마 제국을 만들고 이끌었으며, 그의 군사적 업적과 건설 사업을 추진하여 끊임없이 발전시켰습니다. 그의 통치는 로마 역사상의 최고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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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4.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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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붓다는 신인가요 성인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불교의 석가모니는 원래 이름이 고타마 싯다르타입니다. 그가 깨달음을 얻고 부처의 반열에 들어 성인이 되었기에 석가모니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석가'라는 뜻은 부처가 인도 북부 히말라야 고지대에 살았던 샤캬(Sakya)족 출신이었기 그 음을 한자로 따서 석가라도 하였습니다. '모니'라는 것은 고요한 성자라는 뜻으로 속세를 벗어나 힘들고 고독한 수행을 하는 성자에 대한 존칭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석가모니'는 샤캬족 출신의 성자라는 뜻입니다.이 말에 답이 있습니다. 불교의 석가모니는 부처의 반열에 든 사람입니다. 신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현재는 신격화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불교는 여러 부처들에게 먼저 깨달음에 대한 가르침을 구하고 그들과 같이 되고자 행동하고 수행하는 것을 추구합니다. 사실상 종교로 되어있기는 하나 불교는 사실 사상에 가깝습니다. 부처, 보살은 깨달은 자와 깨닫기 위해 수행하는 행위의 뜻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유일신 사상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유일신이 있고, 그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메시아로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뜻은 머리에 성유 부음을 받은 자, 곧 구세주, 메시아를 뜻합니다. 기독교에서도 예수를 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믿는 사람이 신격화 한 것이죠. 세계의 4대 성인은 석가모니, 예수, 공자, 소크라테스 일컫습니다. '신'이 아닌 '인'을 씁니다. 따라서 그들은 신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다만 석가모니나 예수 그리스도는 종교와 연관되어있으니 신격화 된 것이라고 이해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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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24.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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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센징” 단어는 왜 모욕적인지?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센징이라고 부른 것은 단순히 조선인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자신들이 위에 있고, 조선인들을 천대하고 하대하며 차별하는 분위기와 상황에서 불렀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냥 단순히 '당신은 조선인입니까?'라는 뜻으로 '아나타와 조센징데스까?' 정도로 이야기 하는 것은 듣기 싫은 욕이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현대에도 다른 사람들을 부를 때 아는 사람이면 사람 이름을 부르고, 모르는 사람이면 '실례합니다'와 같은 호칭 대신 주의를 끌 수 있는 정중한 말을 사용한 후 대화를 이어가게 됩니다. 외국 사람의 경우도 '어이 미국인', '이봐 중국인'과 같은 호칭은 인종차별적인 발언이 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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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4.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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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후손인 발해는 어떻게 세워졌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가 동북쪽 이민족들을 통제 관리하였는데 요서지방의 영주 지역에 고구려 유민, 말갈족, 거란족이 모여 살았습니다. 틈틈히 고구려의 재건을 노리고 있던 대중상, 대조영, 걸사비우 등이 조금씩 세력을 키우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당나라의 가혹한 통치에 반발한 거란 세력이 족장인 이진충과 손만영을 필두로 반기를 들었고, 당의 유주 지역까지 공격하여 막대한 타격을 입히게 됩니다. 여기서 대중상, 대조영의 고구려 유민 집단과 걸사비우를 필두로 한 말갈족 들도 함께 하였습니다. 사실상 고구려 유민과 말갈은 고구려 연합국이었으니 같은 국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반란이 장기화되어 당에서도 군대를 보내어 역공을 하였고, 거사가 실패로 돌아갈 시점에 대중상, 대조영의 고구려 유민집단과 말갈족은 요서 지방의 동만주 지역으로 이동하였고, 고구려의 옛 땅이었던 동모산을 근거로 주변에 성을 쌓고 연해주까지 확장하였고, 고구려를 이은 새로운 국가를 선포하였고 국호를 '진'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동모산에도 옛 고구려 사람들이 터전을 잡고 있었으나 고구려 부흥의 명분이 있어 큰 전쟁 없이 협상 및 회유 등으로 영토를 복속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대진국이라고 불리며, 정복전쟁을 통해 영토를 넓혀갔으며, 해동성국이라는 칭송을 받을 정도로 막강했습니다. 대중상 이후 대조영이 왕이 되자 당에서는 막강해진 진국을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되었고, 그에게 발해군왕이라는 형식적인 책봉 서신을 보내왔으나 대진국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며 황제국으로서 면모를 이어갑니다. 그렇지만 당시 당의 국제적인 영향력이 큰 시대라 대진국도 외교적으로 발해라는 국호를 병용하여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698년 건국 시에는 진이었다가 713년에 발해라는 국호를 공식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문왕 때 왕권을 강화하는 시기인 774~779년에 국호를 고려(고구려도 장수왕 이후 고려로 국호 변경)로 썼다가 왕권강화정책이 실패로 돌아간 780년부터는 일본의 천황에게 문왕이 보낸 서신에도 발해국왕이라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후에는 발해로 공식적으로 확정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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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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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조선은 무슨 뜻을 가지고 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이란 명칭이 ‘땅이 동쪽에 있어 아침 해가 선명하다(地在東表 朝日鮮明)’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했지만, 이는 조선이란 한자의 뜻을 새긴 풀이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중국의 만주어 관할 구역의 경우 과거 우리의 지역이었기에 그 어원이 ‘주신(珠申)’에서 왔고, 조선, 숙신, 여진 등이 모두 같은 어원을 지녔다는 설이 있고 단군신화에서 나오는 ‘아사달’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가장 이른 시기에 제기된 설로, 위나라 사람 장안(張晏)은 습수(濕水)·열수(列水)·산수(汕水)라는 강 이름에 조선이란 명칭의 연원이 있다고 주장하였다고 합니다. 현재까지로선 조선이란 국호의 어원은 명확치 않은 상황입니다. 고조선이란 국호는 원래는 그냥 조선이었지만 후대의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서 오랜 예전의 조선이라는 뜻입니다. 조선이라는 국호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처음 사용하였는데 고조선은 왕검조선(王儉朝鮮))이라 하였고 이는 기자조선(箕子朝鮮)이나 위만조선(衛滿朝鮮)과 구분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 후로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는 단군조선을 ‘전조선(前朝鮮)’, 기자조선을 ‘후조선(後朝鮮)’이라 표기하였습니다.조선이라는 뜻은 한자의 뜻대로 동방의 해뜨는 나라로 예의가 있고 고운 나라라는 뜻이라고 풀이하지만, 이것이 고조선이 개국할 당시에도 그런 뜻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중국의 산해경이라는 고서에도 조선이 동방예의지국이라 되어있고, 공자도 조선의 예를 배울 수 있다면 뗏목을 띄워서라도 조선에 가고 싶다고 할 정도였으니 그 뜻을 유추하여 조선이 '동방의 해뜨는 나라이며 예가 바르고 높은 나라'라는 뜻이 아닐까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후한서 동이열전에도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내용이 나온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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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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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어를 먹는 나라는 우리가 유일한가요? 해외에서 수입까지 해서 먹는 다고 알고 있는데~~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홍어를 삭혀서 먹는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한 것 같습니다. 비슷한 방식으로 바이킹의 나라 아이슬란드의 경우 상어를 삭혀서 먹습니다. 전라도 잔치에 홍어가 빠지면 안되듯이 아이슬란드의 경우에도 잔치에 삭힌 상어가 빠지면 안될 정도로 인기가 많다고 합니다.홍어의 경우 먹게 된 유래를 살펴보면, 여러가지 설들 중에서 고려시대 몽고와의 항쟁 때 고려 조정이 몽고에 항복을 한 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 삼별초 군이 남해안 일대를 최후의 보루로 진을 펼쳤습니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삼별초를 토벌하기 위해 토벌군을 내려보냈고 삼별초군을 고립시키기 위해 인급의 모든 주민들을 내륙으로 이주시키는데 흑산도 앞 영산도 섬사람들이 나주의 한 포구로 이주하게 됩니다. 이곳이 영산포입니다. 사람들은 해마다 홍어를 잡아 흑산도에서 영산포로 실어나르는 도중에 홍어가 발효되어 삭아버리게 되었고, 코를 찌르는 악취가 났지만 썩지는 않은 것에 이상히 여겨 먹어보았더니 독특한 맛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맛에 매료되어 지금까지 이어오는 것이라는 설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흑산도는 삭히지 않은 홍어가 유명하고, 영산포는 많이 삭힌 홍어가 유명하다고 합니다. 홍어가 썩지 않고 발효되는 것은 개체의 요소 배출 체계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생물들은 우리가 소변을 볼 때처럼 요소를 몸 밖으로 배출하나 홍어의 경우에는 피부로 보냅니다. 그래서 홍어가 죽게 되면 이 요소가 분해되어 암모니아로 변환되는데 이것이 코를 찌르는 냄새를 발생시키지만 부패균을 억제하여 오랜 기간 썩지 않고 발효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연골여류의 특징이라 아이슬란드 사람들이 삭혀서 먹는 상어의 경우에도 동일한 원리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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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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