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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민족'의 유래에 대해서 질문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 민족이 백의민족(白衣民族)으로 불리었던 것은 주변국의 과거 사서에도 나타나있습니다. <삼국지-위지 동이전>에 “부여는 흰색을 숭상하여, 흰옷을 널리 입었다, 푸른 들에서 업드려 일하는 사람들의 옷이 모두 희다." 라고 우리 민족의 복색을 기술해놓았습니다. 실제로 삼국시대의 경우 대부분은 일반인들은 흰색 옷을 입었고, 고위 관리나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중국에서 들여온 비단으로 만든 화려한 색의 옷을 입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외국의 기록을 보면 명나라 사신 동월이 다녀가 이르기를, "조선사람들은 모두 흰 옷을 입는다." 라고 <조선부>에 나와있습니다.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南延君) 묘소의 도굴을 시도한 독일의 상인 오페르트가 쓴 책 <금단의 나라: 조선 기행>에서 “조선 남자나 여자의 옷 빛깔은 모두 희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흰 옷을 즐겨입었던 이유는1. 염색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서2. 유교적 관념에 따라 신분을 구분하기 위해 (높은 신분은 화려하게, 평민 이하는 흰색으로, 하지만 이것은 조선시대의 이야기지 삼국시대 때도 흰옷을 주로 입었으므로 아니라고 판단됨)3. 천손으로서 빛을 상징하는 흰 색을 제례, 상례 등에 입다가 그것이 일상까지 전파되어서등 다양한 설들이 제기되었었습니다. 하지만 신분구분을 위해 일부러 복색을 달리하거나 염색기술이 발달하지 못해서라는 말은 그렇게 설득력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다만 관리의 복색의 경우 그 고하를 구분하기 위해 차등을 두었고, 그것은 중국과 한국, 일본도 비슷한 사례를 보입니다. 아마도 중국의 관직제도에 대한 도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일반 백성들의 경우 대부분 자연유래로 만들어진 섬유를 이용하여 옷을 만들어 입었고, 당시 염색을 하는 기술과 염색된 옷감도 있으나 그것은 고가였기에 귀족 등 경제력이 있지 않으면 구하기가 어려웠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화려하게 복색을 갖추는 것보다는 정서상 흰색에 대한 선호도가 높았던 것은 사실인 듯 합니다. 우리는 사실 이러한 것에 크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가 일제 식민 치하에 항일 투쟁 함에 있어서 백의민족이라는 말이 대두되기 시작했고, 흰색의 전통적인 이미지인 지조, 청결 등 고결함이 강조되어 항일운동에서 흰옷을 입는 것을 저항의 철학으로 인식되었다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실제로 조선시대 학자들도 관직에 있지 않고 제야에서 후생들을 가르치고 할 때의 복색은 흰색이 주를 이루었다고 확인됩니다. 위의 자료들과 같이 일상에 양반이든, 평민 이하이든 일상생활에서는 흰색옷을 많이 입고 있는 모습에 대한 기록은 있는데, '왜'라는 이유가 확실하게 기재되어있지 않으니 여러가지로 유추해 볼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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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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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대한제국이 멸망하고 난 뒤의 왕족들은 어떻게 지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대부분의 직계 왕족들은 조선에 남지 못하고 일본으로 볼모 형태로 끌려가게 됩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조선땅에 왕족이 남아있는 것에 대해서 달가워 하지 않았고, 왕족들간의 갈등도 부추기며 회유하여 일본제국에 충성하도록 합니다. 황태자였던 영친왕은 일본 국적을 받아들였으며, 해방 후에도 국민들의 정서가 거부하여 귀국하지 못하고 일본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박정희대통령 때 정부의 배려로 귀국하고 한국 국적을 회복하였습니다. 의친왕의 장남이었던 이건은 죽을 때까지 일본인으로 살다가 갔으며, 친일적 인사로 과일 망신은 모과가 시키고, 조선 망신은 이건 공이 시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해방 이후 모모야마 겐이치라는 일본인으로 귀화하는 치욕적인 행태를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동생인 이우는 일본 히로시마 원폭 때 사망합니다. 조선 황실에 있을 때 만큼은 아니었지만, 직계 왕족들은 일본에서 그래도 기본적인 대우를 받으며 지냈습니다. 물론 그다지 행복한 삶을 살지는 못했고, 항상 감시와 조롱을 받으며 살았지만,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일본인으로 귀화하는 행위 등으로 볼 때 경악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왕족의 태도는 아니었지요. 행방 이후까지 살아있었던 왕족들은 그렇고 일본에서 풍요롭게 살지는 못했고, 말년에 빈곤층으로 살아갔다고 합니다. 그나마 의친왕과 이우 공의 경우에는 일본의 지원을 받으며 살았으나 정서상으로는 반일의식을 가지고 살았고, 물밑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일국의 왕족으로 나라 잃은 국민들을 배신했다는 사실에서 벗어나지는 못하며, 평생을 죄책감에 살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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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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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장군의 군사들은 사병개념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곽재우는 성리학자였고, 임진왜란이 발생한 후 정규군이 아닌 의병장으로 붉은 옷을 입었다 하여 홍의장군이라 불리었습니다. 게릴라, 유격전을 주로 하였으며, 심리전, 기만전술을 능수능란하게 지휘하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청년기에 무예에 몰두하였는데 이유는 지방 사족의 자제들은 중앙에 진출하기 위해 대과에 급제해야 하나 사실상 한양 내 집안 자제들과 경쟁하기에 부담이 커 경쟁이 낮은 무과로 지원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그러했던 것으로 사료됩니다. 34세에 정시에 지원하여 대과에 장원으로 급제를 하였었으나 이후 감수에서 몇 개의 답안이 문제가 되어 파방, 즉 최종 불합격 처리되었습니다. 이후 임진왜란이 발생하였고, 거병하여 의병장이 되었습니다. 왜군과의 전투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나 전면전으로 보기 어렵고, 실제 사료에도 왜구의 수송선, 소부대를 기습하는 방식으로 승리하였습니다. 임진년 5월초부터 전승에 대해 알려졌는데 부장 4명과 낙동강에서 왜선 4척을 물리쳤다는 기록, 13명과 함께 같은 곳에서 올라오는 11척의 왜선을 몰아냈다는 기록 등으로 볼 때 소규모였던 것으로 확인되며, 이후 의병의 규모가 커지면서 2천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곽재우는 자신의 경상남도 의령 쪽에 의병훈련지를 정하고 의병을 모은다 널리 알렸으며, 사람들이 모였고, 처음에는 수십에서 시작하여 늘어났습니다. 그들은 정규군은 아니었고, 지역에서 무예를 수련하거나 힘 좀 쓰는 장사들과 뜻이 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였던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솔선수범하여 나서는 리더들과 그와 함께 하는 이름 모를 영웅들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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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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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평등이 조선시대에 불평등해진 계기는 뭔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 역사에서 고대국가 때부터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완전한 남녀평등이었다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특히 국가 운영 등의 정치적인 영역에서의 여성의 진출은 고대국가에서도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여의 태후, 고구려의 유화부인과 소서노 등이 일부 정치적으로도 영향력을 발휘하기는 하였지만, 그 이외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고구려 때에는 군에 여성만으로 이루어진 부대도 있었다고 하니 가장 진보적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신라에는 선덕, 진덕여왕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신라의 특이한 골품제의 탓에 왕이 될 수 있는 골품에 남자가 없어서 선덕, 진성여왕이 되었던 것이지 같은 골품에 남자가 있었으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 여성의 활동성이 보장되었었지만, 삼국시대에도 완전한 남녀평등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천제를 지낼 때 여성을 제물로 바치기도 하였습니다. 다만 일상생활에서는 고려시대 이전 여성들의 활동이 더욱 왕성했다는 것은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재산소유, 재산상속을 할 수 있었고, 길쌈이라는 시장제도를 통해서 경제활동을 할 수 있었으며, 남녀의 만남과 결혼, 재혼도 자유로웠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성리학적 기반으로 유교사상이 기존의 불교사상을 멀리하는 숭유억불 정책이 시행되면서 유교적 가치 중 부부유별 같은 근본적으로 역할의 구분을 가져오면서 남녀의 차별이 심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역할의 구분으로 시작하였지만, 점점더 국정운영, 국방, 경제활동 등 주요 활동을 남성이 역할을 하고, 여성에게 집안, 가문의 운영에 대한 역할로 고착화되어 여성의 역량을 한게화하는 지경에 이르러 더 극심한 남녀차별로 이어진 것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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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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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왜 연개소문 사후 급격히 무너진걸까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구려는 엄밀하게 말하면 부족국가입니다. 중앙집권적 체계가 있었지만, 각 가문을 지역의 책임으로 두고 운영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 5개의 연맹체였는데 계루부, 소노부, 관노부, 절노부, 순노부의 5부족이었고, 그 부족의 장을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가들이 모여 국정을 논의하는 제도를 제가회의라고 했습니다. 원래 왕을 선정할 때 소노부에서 선출식으로 배출하였었으나 태조때부터는 계루부 고씨만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고정되었습니다. 그러다가 5부족제를 고국천왕 때 없애고, 5부제를 실시함으로써 왕이 있는 지역을 중부(계루부)를 중심으로 동(순노부), 서(절노부), 남(관노부), 북(소노부)으로 나누어 다스렸습니다. 왕위를 하나의 가문에서만 이어가는 중앙집권적 모양세를 갖추었지만, 5부제로 각 지역은 권력을 가진 가문이 책임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명칭이 방위로 바뀐 것은 중앙집권적 흔적이라고는 하나 고구려 말기에도 각 가문의 세력은 왕권을 위협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가문이 연개소문이 속한 동부가문입니다. 연개소문은 동부대인 연태조의 자제로 연태조는 신선에 가깝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의 대단히 명망있는 가문이었습니다. 이에 높은 벼슬과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연개소문이 조의(무사집단) 출신이었기에 원래는 고구려의 수련집단(종교적 색채)이었으나 연개소문이 권력의 최상층에 오르고 난 후에 공식적으로 조의라는 이름을 감추고 선인은 최하위관등제에 위치하였으나, 조의는 동부가문의 사병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듯 힘을 가진 연개소문은 군부의 강경세력과 함께 중원의 중심이 되고자 하는 생각이 강했고, 온건파들이 당에 고개를 숙이고 평화만을 부르짓는 것과 극렬하게 대치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온건파였던 영류왕도 장년, 원로대신들과 짜고 연개소문을 제거하고자 하였고, 천리장성을 쌓는 것을 감독하라는 것을 빌미로 연개소문을 변방으로 보내 그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계략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계략을 눈치 챈 연개소문이 역으로 연관된 관료들을 모두 죽이고, 평양성으로 군사를 밀고 들어가 영류왕도 죽이게 되고, 새로이 보장왕을 옹립하게 됩니다. 이후 연개소문은 대막리지에 오르게 되고 그를 중심으로 한 고구려군은 당시 최강이었던 당과의 1, 2차 전쟁에서 모두 승리하였습니다. 하지만 연개소문도 나이가 들게 되었고 666년 사망하게 되었고, 그가 걱정하던 자신의 세 아들들의 반목에 의해 장자인 연남생이 당에 귀화하게 되고 역으로 그를 앞세워 신라와 함께 공격해왔고, 고구려 지도층의 내분이 격화되어 결국 그가 사망한 지 2년 뒤인 668년에 고구려는 안에서 먼저 허물어지고 속이 텅 비어버려 당과 신라의 공격에 무너지게 됩니다. 연개소문은 왕의 시해한 역적이라는 손가락질도 받았지만, 대막리지인 군통수권자로서, 그리고 장군으로서의 지휘력, 전투력으로 볼 때 적군에게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는 두려움의 존재였던 것입니다. 연개소문이 살아생전 백제도, 신라도, 당도 고구려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했던 장수들도 연개소문만큼이나 강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고, 그의 부하였던 검모잠이 보장왕의 아들 안승을 내세워 고구려부흥운동을 벌였으나 내분이 일어나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망명했습니다. 다만 대중상과 그의 아들 대조영과 말갈족 걸사비우가 고구려유민과 말갈인을 중심으로 동모산에서 건국하고 진국이라 명하였고,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하여 고려라고도 불리었다고 합니다 이후 당에서 대중상을 진국공으로 봉하였다고 중국측 사료에 있으나, 그것으로 중국의 영향력을 받는 속국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진정한 국가체제를 갖추고 대조영이 태조가 된 이후로는 당에서 발해군왕이라고 책봉하면서 발해라고 불리었으나 대조영이 그 책봉을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고 당이 그 지역을 자신들의 권역이라고 넣고 싶어 대조영과 진국을 인정하면서 마음대로 책봉서를 보냈다는 것이 합당한 듯 합니다. 일본과의 국서에도 3대 문왕까지도 '고려의 왕 태흠무가 말한다'라고 썼고, 일본에서 파견한 사신도 고려사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후 국제적으로도 첫 국호는 고(구)려, 이후 해동성국 또는 대진국라고 혼용했던 것으로 보이고 당이 세력을 크게 가지고 있었으니 외교적으로 관계한 나라에서는 발해로 알려졌을 것이라 봅니다. 어쩌면 무너진 고구려가 다시 대진국으로 거듭났고, 그 영토 역시 고구려 이상으로 확장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쓰는 황제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으니 새로운 고구려가 탄생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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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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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시대 전성기였던 왕은??누구??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백제의 전성기는 4세기경 13대 근초고왕 때라고 합니다.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여 위협하였고 당시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사망하였습니다. 가야와 마한을 복속하여 한반도 남서해안 모두를 백제의 지배하에 두었다고 합니다. 왜는 그전부터 백제 왕가가 넘어갔고, 우리 서해와 인접한 남중국 쪽도 백제의 영향권에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현재 중국 영토에 있었다는 대륙 백제와 실질적으로 왜를 다스렸다는 백제 왕가의 이야기는 중국 사료 등에 언급은 되어있으나 교차 검증이 확인되지 않아 논란이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2002년 한일월드컵 즈음에 일본의 아키히토 천황이 인터뷰에서 일본 천황가가 백제와 관련이 있다고 밝힌 것으로 보아 근거가 없는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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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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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래스카는 원래 미국땅이 아니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원래는 러시아 땅이었으나 오랜 세월 진행된 크림 전쟁으로 재정이 바닥이 난 러시아는 지방 행정비용을 아끼고, 재원도 마련하고자 당시 미국에 제안하여 알래스카를 매각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으로서는 알래스카의 위치가 북아메리카 북서부쪽에 위치하여 캐나다와 인접해있고,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는 지리적 요충지이기도 하였고, 그 지역에 자원 개발의 기회까지 잡을 수 있어 큰 이익을 보게 되었습니다. 1867년 당시 720만 달러라는 돈으로 알래스카와 그 주변 부속 도서(섬)까지 매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판단하면 아주 헐값에 큰 전략적 요충지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알래스카에 인접한 캐나다가 아닌 미국에 매각한 것일까요?그것은 당시 국제적으로 영국과 그레이트게임이라 불리는 패권 전쟁을 하고 있는 시기였는데 적국이었던 영국이 영유하고 있는 캐나다에게 판매하는 것은 우려가 있었고, 러시아에 우호적이면서 덜 위협적이었던 미국에 판매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미국이 현재처럼 지구 최강의 패권국가가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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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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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단강 건널뻔 했다.. 요단강 함 건너볼래? 하는데...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요단강을 건너다' 뜻을 죽음과 결부짓는 것은 사실 잘못된 이해가 전해진 것입니다.원래 요단강은 아브라함 종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지역인데 구약성서에 따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인 가나안 땅으로 가기 위해 그 앞에 있는 요단강(요르단강, 팔레스타인 지역)을 건넜다는 의미로 믿음의 길에 들어섰다는 의미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가다, 하나님의 땅=천국, 천국은 죽어서 갈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로 왜곡되면서 '요단강을 건너다'의 의미를 죽음과 동일시 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노역으로 팔려가던가, 떠돌이 유랑을 하며 어렵게 살았고, 그러므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가는 것은 너무나도 멀고도 험한 길이었기에 죽어야만 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원래 의미는 고행과 침례의 경계의 뜻으로 요단강은 죄악의 삶과 믿음의 삶의 경계였고, 그 경계인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도 세례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공공 사역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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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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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왜 아직도 야스쿠니 신사에다가 참배를 하는 건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였고, 전범국가가 되었지만 자신들의 입장에서는 군국주의가 되었더라도 일본 자신들만의 입장으로는 일본을 위해 싸운 위인들이 안장되어있는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것은 일반적인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직접 피해를 겪었던 우리나라와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한 국가들, 그리고 국제적, 도덕적으로 본다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단순히 야스쿠니 신사에 한 개인 가문의 조상이 안장되어있다면 그가 전범이든 아니든 큰 반대는 없으나 일본의 총리나 정치인이 공개적으로 참배한다는 것은 일제 식민지배를 받았던 우리나라로서는 분노할 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일본 사람들은 우리가 절에 가서 기도하듯 신사에 가서 공물을 바치고, 향을 피웁니다. 한 개인들이 그러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외교적으로 지탄을 받을 수 있는 국가지도자가 그러는 것은 일본이 삼가야 할 것입니다. 진정으로 대한민국의 미래의 파트너로 생각한다면 그러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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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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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식을 함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대사부터 근현대사까지 잘 정리되어있는 서적을 중심으로 먼저 공부해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환단고기부터 삼국유사, 삼국사기,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 근현대사 서적들을 추천해드리고 싶습니다. 환단고기의 경우 꽤나 잘 정돈되어있고, 중국의 사료 등과 비교해보았을 때 진서일 가능성이 더 높은 것으로 최근에 대두되고 있으나, 실물이 없고 전해내려온 필사본을 근거로 한 사료가 있고, 해당 사료에 고대에 쓰지 않는 표현이 있다는 논쟁으로 현재 강단사학계에서는 위서 논쟁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배달환국 시대부터 고조선, 부여 등의 역사를 언급한 내용이 있으니 참고만으로라도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삼국시대의 역사를 기술한 삼국유사, 삼국사기를 거쳐, 고려사, 고려사절요,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의 순으로 고대사를 정리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조선말기부터 근현대사는 정확한 자료들이 많으니 서점에서 마음에 드시는 역사학자의 저서로 골라 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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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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