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가 융성한 진짜 이유가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고려가요도 있고 경기체가도 있는데 굳이 시조라는 형식이 등장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떻게 시조가 만들어진건가요? 그리고 시조가 융성한 진짜 이유가 어떻게 되나요?
시조의 융성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한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시조는 고려 시대부터 불리기 시작해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창작되고 있는 문학 장르입니다. 그러니까 천 년 가까운 긴 세월 동안 시조를 짓고 불러 온 것이지요. 그 긴 역사만으로 시조는 가히 세계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던 이들도 바로 고려 중엽에 등장한 신진 사대부들이었습니다. 신진 사대부들은 자신들만이 가지고 있는 유교적인 이념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문학 형식이 필요했습니다. 당시에는 고려 가요와 비슷하게 귀족들 사이에서 불리어지던 경기체가가 있었지만 그 성격이 향락적이어서 유교 이념을 전달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발생한 것이 시조였다고 합니다. 시조는 초장—중장—종장의 형식으로 작가의 생각을 간결하고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으며 한자가 아닌 우리말 위주로 표현할 수 있기에 향유층이 넓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사대부의 유교 이념을 펼치기에 매우 적절한 형식이었던 것입니다.
시조는 고려시대부터 불리우던 형식입니다.
고려 중엽에 만들어져서 고려 말기에 그 형식이 고착화되었습니다
고려 중엽에 세력이 성장하고 있던 신진사대부들이 불교를 배척하고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유교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새로운 형태의 전달체계가 필요하였습니다.
기존의 고려가요인 경기체가, 속요 등이 있었으나 그것은 대부분은 귀족의 향락, 서민의 애환 등으로 노래하는 세속적인 부분이 대부분이었기에 자신들의 고고한 이념을 전달하기 부적합하다고 판단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초장-중장-종장의 간결한 형식이고 한시의 형태가 아닌 우리말로 불려질 수 있기에 선호되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시대 시조는 대부분 충절 등의 무거운 주제가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이 몸이 죽어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白骨)이 진토(塵土)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정몽주, 「단심가」>
물론 사랑을 노래한 문학적인 작품도 있었습니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 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이조년의 시조>
이후 사대부들의 주축으로 된 이성계의 조선이 건국되고, 그 핵심세력들이 그들이다 보니 더욱 활성화된 것인 아닌가 판단됩니다.
고려 후기에 이르러 신흥사대부들이 역사적 전환기를 맞아 경기체가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유교적 관념과 주관적 정서를 표현하기 위해 창안된 양식입니다. 경기체가는 객관적 사실을 그리기에만 적합하였을 뿐 내면적 정서를 표현하기에는 부적절했기 때문입니다. 시조는 한시, 10구체 향가 3단구조, 고려가요 만전춘별사의 분장 형태의 영향을 받았으며, 민요 두 줄 형식의 영향도 받았습니다.
시조가 조선시대에 대표 시가가 됐던 이유는 위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선비들이 그들의 성리학적 세계관을 표출하기에 알맞은 문학형식을 창조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시조는 형식과 운율이 매우 안정적이고 단아하여 유학자나 사대부들이 그들의 사상과 감정을 절제하여 표현하는데에 가장 적절하였습니다.
고려후기에서 조선전기에 걸쳐 우리 나라에서는 불교가 아닌 유교가 우리 나라 백성들의 종교로 인정 하게 됩니다. 시조는 이렇게 정제된 우리나라 고유의 정형시입니다. 이 시는 3장 45자 내외로 구성되며 유학자들의 정신과 정서를 표출하는데 시조가 쓰이게 된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