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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무슨말일까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아미타'라는 부처와 '관세음'이라는 보살은 인간을 위해 가장 많은 노력을 한 이라고 합니다. '아미타' 부처의 상이 '아미타불'이고, '관세음' 보살의 상이 '관세음보살'입니다. 이에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에게 귀의한다는 뜻입니다.불교에서 말하기를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을 진심으로 믿으면 극락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승려들이나 불교인들이 습관적인 것처럼 되새기듯 말한다고 합니다. 기독교의 아멘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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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3.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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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는 권력에 큰 욕심이 없었던 인물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권력의 욕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명분을 찾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처음에는 권력을 잡을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으나, 원래 북방을 지키는 최고의 장수로 이름났었고, 거의 그 지역에서는 왕처럼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고려말기로 각 호족세력들의 경우 가병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는데, 이성계의 집안은 그 가별초라고 가장 유명하고 강한 사병을 육성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정도전이 최영과 당시 군부세력과 견제하고 역성혁명을 하기 위해 이성계를 포섭하였고, 그러던 중 이성계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위용이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음을 깨닫고, 주위의 강력한 권유도 있어 권력에 대한 야망은 생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드러내놓고 권력의 야망을 보이지는 않았고, 그 명분을 찾다가 최영을 중심으로 한 북방 정벌에 선봉장으로 나서게 되었으나 애초에 여러가지 이유로 전쟁을 반대하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많은 비와 물난리로 더이상 진격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이를 명분으로 군사를 돌렸고, 이에 어명을 어긴 것이 되어 자신과 동참한 모두가 최영에게 죽임을 당할 것임이 뻔하므로 되려 공격하고 역성혁명을 하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혁명 후에도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새로 옹립하여 이성계 스스로 왕위에 오르지 않았으나, 나중에 정몽주가 죽고 난 후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고려라는 국호를 내리고, 새로이 조선을 건국하게 됩니다. 전반적인 흐름으로 볼 때 이성계가 하늘과 백성의 뜻을 받들어 어쩔 수 없이 왕으로 선택된 것처럼 하기 위해 애초에 권력에 욕심이 없는 군인으로 묘사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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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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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나 종교에서 면죄부를 주는 것이 돈을 받고 죄를 사하여 주는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맞습니다. 구원을 판매한 것이죠. 지금보다 훨씬 신실했던 중세 카톨릭신자들은 사후에 지옥이 아닌 천국으로 구원받는 것에 대해 열망이 대단했습니다. 이러한 죄사함에 대한 열망과 두려움을 가진 신도들을 대상으로 로마카톨릭교회가 돈을 받고 면죄부를 판매하였습니다.당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사였던 루터가 이것은 회개없는 용서이자 거짓평안이라 비판하며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역설하며, 성서 중심의 종교개혁을 추진하게 된 것입니다.교황 10세 레오가 모든 주장을 철회하고 물러서라 했지만 성경의 권위를 앞세워 성서에 어긋나는 가르침은 거부하였습니다. 당시 로마카톨릭교회는 믿음은 없고 인간의 탐욕만 가득찼었던거죠. 이러한 움직임을 시작으로 유럽 전역으로 퍼져 종교개혁이 이뤄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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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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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좌식문화로 바뀐 이유는 무엇입니까?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좌식문화의 발달은 온돌의 발달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온돌 형태는 평평한 바닥에 하단을 더 올려 군대 내무반 형태로 단이 있는 북방형 온돌과 한반도 남부지역에서는 평평한 방바닥으로만 온돌을 만드는 남방형 온돌의 형태가 있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황실과 귀족들, 일반 백성 일부가 입식문화였고, 백성들 대부분은 좌식문화(남방형 온돌생활)를 하였다고 합니다.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초기까지는 고려와 비슷하였으나 그 이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대부분 좌식문화로 바뀌었다고 합니다.그러고 보면 고려시대까지는 중국 주거문화와 비슷하여 주택이 단층이 아니라 2~3층의 복층 한옥도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과거부터 남아있었던 것은 있었으나 새롭게 건축된 것으로는 정자와 같이 필로티 형태가 아니면 복층이 거의 없었다고 보입니다. 이유는 아궁이를 이용하여 바닥에 만드는 온돌의 경우 2층에 설치하기란 목조건물 위주였던 당시로는 어려웠을 것이라 판단됩니다. 그래서 보통 고려시대까지도 활발했던 2층 이상 구조의 건물의 경우 12층은 생활을 하고 2층 이상은 서고나 창고를 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런 생활문화 외 추가적으로 정치적인 이유를 추론해보자면, 조선은 과거 고려의 문화가 온갖 사치하고 비유교적이며, 부패하여 이를 배척하고 새로운 성리학이 기반이 된 국가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고려시대의 입식보다는 정숙한 유교적인 생활을 권장했지 않았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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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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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을 북침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 논란은 북힌이 남한을 침략했느냐, 남한이 북한을 침략했느냐의 논란이 아니라 국어학적인 해석과 표현의 오류로 판단됩니다. 즉 질문 주신 것과 같이 625전쟁이 '북침'이냐 '남침'이냐의 판단인 것이죠. 현재 전세계적으로 625전쟁은 공산주의 적화통일을 위해 북한이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아 남한을 침략하여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은 사실이니까요. 이념 갈등으로 인해 38선 부근에서 북한과 남한의 잦은 다툼이 있기는 했지만, 전쟁으로까지 끌고간 것은 북한의 남한 침략임은 명확합니다. 하지만 표현에 있어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적인 내용과 사전적 의미가 달라 간혹 혼돈이 생기곤 합니다. 일반적인 표현상 해석으로 이렇게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북한이 남한을 침략했을 경우 : '북한의 남한 침략, 북한의(에 의한) 침략'이므로 '북침'이라고 이해합니다.- 남한이 북한을 침략했을 경우 " '남한의 북한 침략, 남한의(에 의한) 침략'이므로 '남침'이라고 이해합니다. 하지만 사전적 의미는 일반적인 생각과 다르게 표현되는 경우가 있습니다.표준국어대사전과 국립국어원에서는 다음과 같이 사전적 의미를 표기하고 있습니다. - 남쪽에서 북쪽으로 침략함을 '북침'이라고 합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침략함을 '남침'이라고 합니다.따라서 625전쟁의 경우 '남침'이 맞는 표현이고, 좀 더 명확하게 표현하자면 '북한의 남침'이라는 것이 올바른 표현입니다. 보통 언어적 표현과 사전적 표현이 같은 의미인데도 다르게 이해되어 반대의 말을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할 때는 주어, 목적어, 소유격 등을 자세히 표현해주어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즉 예를 들면, 방향으로만 표현하여 행동주체에 대한 책임소재가 불분명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목적어 행태로 표현하게 되면행동 주체인 주어인 북한이 '남한을 침략'한 것이니 '남침'이다 라고 하는 것이 편하고 명학하지 않을까 판단됩니다. 결론적으로 남침, 북침의 남과 북은 행동의 주체를 표기한 것이 아니라 목적어, 즉 행동의 대상을 표기한 것이므로, 625전쟁에 대한 표현을 할 때에는 '남침'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습니다. (남한이 북한을 침략했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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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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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벽란도라는 곳은 어떠한 역할을 하던 곳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시대 벽란도는 경기도 개풍군 서면의 예성강 하류에 있었던 '하항(河港)-강의 항구'였습니다.예성강은 황해도 고달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경기도와 황해도의 경계를 따라 흘러 황해로 들어가는데, 이 일대는 산지 지형에 가까워 강의 흐름이 비교적 빠르며 바다에 가까이 위치하고 있어 조수가 밀려드는 불리한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비교적 물이 깊어 선박이 자유로이 통행할 수 있었고, 고려 시대의 수도였던 개성과 가까이 위치하여 고려 시대 제일의 하항이자 실질적인 유일의 국제 항구로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중국 송나라 상인 뿐만 아니라 일본을 비롯하여 멀리 남양지방(南洋地方)과 서역지방(西域地方)의 해상들까지 자주 드나들며 교역을 하였던 곳으로 국제적인 교역뿐만 아니라 외국으로 나가거나 국내로 들어오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고려의 관문적 역할을 하던 곳이었습니다. 즉 교통의 요지였던 것이죠. 조선 시대에도 나루터로 교통의 요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던 곳이었고, 도승(渡丞)이 한 명 배치되어 나루터를 관할하게 할 정도로 중요한 곳이었다고 합니다.[참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회-변란도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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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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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명증이 존재하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예술가를 증명하는 것은 작품과 작품활동입니다. 협회 등에서 예술인증명을 하기는 하는데 그것은 예술가들에 대한 복지 및 지원제도 등을 진행하기 위해 확인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한 것이 아니라면 증명서나 증 같은 것은 의미없습니다. 그렇게 증명서나 증을 받기 위해서 어차피 자신의 작품을 제출하여 확인을 받았다는 확인서 수준입니다. 그 외에는 문단, 화단 등과 같이 함께 작품을 하는 사람들끼리 모인 회원증 수준입니다. 예술가의 자격은 작품이고, 그 인정도 작품으로만 평가됩니다. 모든 것은 예술이 될 수 있고, 모든 사람은 예술가입니다. 다만 어떤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표현하는 능력이 특출나냐 아니냐, 그것이 직업이냐 아니냐에 따라 예술가로 불리는 것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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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23.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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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차례상은 원래 음식이 작게 올라 갔다고 하던데..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원래라는 것은 없습니다. 기제사의 제사상이든, 명절의 차례상이든 집안마다 그 특색이 다릅니다. 제사상이든 차례상이든 과거가 지금보다 훨씬 거하게 차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떡이든, 전이든, 다과든 접시에 쓰러질 정도로 높이 쌓아 올렸지요. 지금도 그것이 전통이라며 유지하는 곳도 있습니다. 과거나 현재에도 제사상이나 차례상을 푸짐하게 차리는 이유는 다들 자신의 삶에 얽매여 살다가 기제사나 명절에 일가친척이 다같이 모여 식사를 하다보니 그 양이 더 많아졌다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과거 너무 과도한 허례허식을 지적하며, 국가에서도 캠페인으로 차례상 간소화 등을 추진하였었습니다. 지금은 제사나 명절의 풍속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제사상, 차례상이 아닌 고인이 생전에 좋아하셨던 음식 등을 올린다던지, 딱 한 두 끼만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적게 차린다던지 하는 방식으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결혼 후 양가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10년 넘게 제사와 차례를 지내온 저희 집에서도 갈수록 음식의 양을 줄여가고 있습니다. 간혹 조상에 대한 마음이 강해서 더욱 푸짐하게 차리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아닌 듯 합니다. 어느 쪽이 옳고 그르다 판단할 수는 없고 각자의 집안 사정에 맞게 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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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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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에서 표절의 기준은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표절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음악이 저작권법에서 보호 받을 만한 창작적 요소가 존재하는지 확인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음악의 창작적 요소를 의도적으로 모방한 것이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진짜로 유사한 부분이 있어야 합니다. 대체로 멜로디에 집중되지만, 화음이나 리듬, 음악의 형식, 전개방식까지도 판단의 대상이 됩니다.음악을 만들 때 기존의 곡을 그대로 가져와서 일부 사용하는 경우 샘플링이라는 것으로 인정되기도 하지만, 곡 전반에 걸친 것은 표절이라고 판단됩니다. 그러면 여러 곡을 짜깁기 해서 만들다면 샘플링인가? 아닙니다. 이것은 한 곡을 표절한 것은 아니지만 곡 전반을 그렇게 해서 만들었다면 표절이 됩니다.표절이라는 것이 정말 판단하기 애매한 부분이 있는 것이지만, 창작하는 사람들간의 법이 아닌 더 강력한 무언의 약속으로 꼭 지켜져야 하는 금기 사항인 것은 명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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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23.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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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종교별 신자 수는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종교인구에 대해 전수조사한 것은 아니라 표본 조사의 결과종교가 있는 사람이 40%, 없는 사람이 60%로 나왔습니다. 그 40% 중에 개신교 17%, 불교 16%, 천주교 6%이고 기타가 1% 정도입니다. 남성보다는 여성이, 청장년층보다는 고령층이 종교를 가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래의 내용은 1984년부터 2021년까지 한국갤럽에서 제주도를 제외한 성인 1,000~1,500명을 표본으로 면접 조사한 내용이라고 합니다.청소년 이하는 빠져있으나 전체적으로 청소년의 경우 부모의 종교를 따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이 표본 조사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표본 조사에서는 개신교가 불교보다 1% 정도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으므로, 통계상으로는 개신교인들이 가장 많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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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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