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는 왜 연개소문 사후 급격히 무너진걸까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구려는 엄밀하게 말하면 부족국가입니다. 중앙집권적 체계가 있었지만, 각 가문을 지역의 책임으로 두고 운영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 5개의 연맹체였는데 계루부, 소노부, 관노부, 절노부, 순노부의 5부족이었고, 그 부족의 장을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가들이 모여 국정을 논의하는 제도를 제가회의라고 했습니다. 원래 왕을 선정할 때 소노부에서 선출식으로 배출하였었으나 태조때부터는 계루부 고씨만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고정되었습니다. 그러다가 5부족제를 고국천왕 때 없애고, 5부제를 실시함으로써 왕이 있는 지역을 중부(계루부)를 중심으로 동(순노부), 서(절노부), 남(관노부), 북(소노부)으로 나누어 다스렸습니다. 왕위를 하나의 가문에서만 이어가는 중앙집권적 모양세를 갖추었지만, 5부제로 각 지역은 권력을 가진 가문이 책임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명칭이 방위로 바뀐 것은 중앙집권적 흔적이라고는 하나 고구려 말기에도 각 가문의 세력은 왕권을 위협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가문이 연개소문이 속한 동부가문입니다. 연개소문은 동부대인 연태조의 자제로 연태조는 신선에 가깝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의 대단히 명망있는 가문이었습니다. 이에 높은 벼슬과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연개소문이 조의(무사집단) 출신이었기에 원래는 고구려의 수련집단(종교적 색채)이었으나 연개소문이 권력의 최상층에 오르고 난 후에 공식적으로 조의라는 이름을 감추고 선인은 최하위관등제에 위치하였으나, 조의는 동부가문의 사병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듯 힘을 가진 연개소문은 군부의 강경세력과 함께 중원의 중심이 되고자 하는 생각이 강했고, 온건파들이 당에 고개를 숙이고 평화만을 부르짓는 것과 극렬하게 대치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온건파였던 영류왕도 장년, 원로대신들과 짜고 연개소문을 제거하고자 하였고, 천리장성을 쌓는 것을 감독하라는 것을 빌미로 연개소문을 변방으로 보내 그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계략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계략을 눈치 챈 연개소문이 역으로 연관된 관료들을 모두 죽이고, 평양성으로 군사를 밀고 들어가 영류왕도 죽이게 되고, 새로이 보장왕을 옹립하게 됩니다. 이후 연개소문은 대막리지에 오르게 되고 그를 중심으로 한 고구려군은 당시 최강이었던 당과의 1, 2차 전쟁에서 모두 승리하였습니다. 하지만 연개소문도 나이가 들게 되었고 666년 사망하게 되었고, 그가 걱정하던 자신의 세 아들들의 반목에 의해 장자인 연남생이 당에 귀화하게 되고 역으로 그를 앞세워 신라와 함께 공격해왔고, 고구려 지도층의 내분이 격화되어 결국 그가 사망한 지 2년 뒤인 668년에 고구려는 안에서 먼저 허물어지고 속이 텅 비어버려 당과 신라의 공격에 무너지게 됩니다. 연개소문은 왕의 시해한 역적이라는 손가락질도 받았지만, 대막리지인 군통수권자로서, 그리고 장군으로서의 지휘력, 전투력으로 볼 때 적군에게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는 두려움의 존재였던 것입니다. 연개소문이 살아생전 백제도, 신라도, 당도 고구려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했던 장수들도 연개소문만큼이나 강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고, 그의 부하였던 검모잠이 보장왕의 아들 안승을 내세워 고구려부흥운동을 벌였으나 내분이 일어나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망명했습니다. 다만 대중상과 그의 아들 대조영과 말갈족 걸사비우가 고구려유민과 말갈인을 중심으로 동모산에서 건국하고 진국이라 명하였고,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하여 고려라고도 불리었다고 합니다 이후 당에서 대중상을 진국공으로 봉하였다고 중국측 사료에 있으나, 그것으로 중국의 영향력을 받는 속국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진정한 국가체제를 갖추고 대조영이 태조가 된 이후로는 당에서 발해군왕이라고 책봉하면서 발해라고 불리었으나 대조영이 그 책봉을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고 당이 그 지역을 자신들의 권역이라고 넣고 싶어 대조영과 진국을 인정하면서 마음대로 책봉서를 보냈다는 것이 합당한 듯 합니다. 일본과의 국서에도 3대 문왕까지도 '고려의 왕 태흠무가 말한다'라고 썼고, 일본에서 파견한 사신도 고려사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후 국제적으로도 첫 국호는 고(구)려, 이후 해동성국 또는 대진국라고 혼용했던 것으로 보이고 당이 세력을 크게 가지고 있었으니 외교적으로 관계한 나라에서는 발해로 알려졌을 것이라 봅니다. 어쩌면 무너진 고구려가 다시 대진국으로 거듭났고, 그 영토 역시 고구려 이상으로 확장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쓰는 황제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으니 새로운 고구려가 탄생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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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시대 전성기였던 왕은??누구??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백제의 전성기는 4세기경 13대 근초고왕 때라고 합니다.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여 위협하였고 당시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사망하였습니다. 가야와 마한을 복속하여 한반도 남서해안 모두를 백제의 지배하에 두었다고 합니다. 왜는 그전부터 백제 왕가가 넘어갔고, 우리 서해와 인접한 남중국 쪽도 백제의 영향권에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현재 중국 영토에 있었다는 대륙 백제와 실질적으로 왜를 다스렸다는 백제 왕가의 이야기는 중국 사료 등에 언급은 되어있으나 교차 검증이 확인되지 않아 논란이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2002년 한일월드컵 즈음에 일본의 아키히토 천황이 인터뷰에서 일본 천황가가 백제와 관련이 있다고 밝힌 것으로 보아 근거가 없는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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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래스카는 원래 미국땅이 아니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원래는 러시아 땅이었으나 오랜 세월 진행된 크림 전쟁으로 재정이 바닥이 난 러시아는 지방 행정비용을 아끼고, 재원도 마련하고자 당시 미국에 제안하여 알래스카를 매각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으로서는 알래스카의 위치가 북아메리카 북서부쪽에 위치하여 캐나다와 인접해있고,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는 지리적 요충지이기도 하였고, 그 지역에 자원 개발의 기회까지 잡을 수 있어 큰 이익을 보게 되었습니다. 1867년 당시 720만 달러라는 돈으로 알래스카와 그 주변 부속 도서(섬)까지 매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판단하면 아주 헐값에 큰 전략적 요충지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알래스카에 인접한 캐나다가 아닌 미국에 매각한 것일까요?그것은 당시 국제적으로 영국과 그레이트게임이라 불리는 패권 전쟁을 하고 있는 시기였는데 적국이었던 영국이 영유하고 있는 캐나다에게 판매하는 것은 우려가 있었고, 러시아에 우호적이면서 덜 위협적이었던 미국에 판매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미국이 현재처럼 지구 최강의 패권국가가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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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단강 건널뻔 했다.. 요단강 함 건너볼래? 하는데...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요단강을 건너다' 뜻을 죽음과 결부짓는 것은 사실 잘못된 이해가 전해진 것입니다.원래 요단강은 아브라함 종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지역인데 구약성서에 따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인 가나안 땅으로 가기 위해 그 앞에 있는 요단강(요르단강, 팔레스타인 지역)을 건넜다는 의미로 믿음의 길에 들어섰다는 의미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가다, 하나님의 땅=천국, 천국은 죽어서 갈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로 왜곡되면서 '요단강을 건너다'의 의미를 죽음과 동일시 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노역으로 팔려가던가, 떠돌이 유랑을 하며 어렵게 살았고, 그러므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가는 것은 너무나도 멀고도 험한 길이었기에 죽어야만 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원래 의미는 고행과 침례의 경계의 뜻으로 요단강은 죄악의 삶과 믿음의 삶의 경계였고, 그 경계인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도 세례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공공 사역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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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왜 아직도 야스쿠니 신사에다가 참배를 하는 건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였고, 전범국가가 되었지만 자신들의 입장에서는 군국주의가 되었더라도 일본 자신들만의 입장으로는 일본을 위해 싸운 위인들이 안장되어있는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것은 일반적인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직접 피해를 겪었던 우리나라와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한 국가들, 그리고 국제적, 도덕적으로 본다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단순히 야스쿠니 신사에 한 개인 가문의 조상이 안장되어있다면 그가 전범이든 아니든 큰 반대는 없으나 일본의 총리나 정치인이 공개적으로 참배한다는 것은 일제 식민지배를 받았던 우리나라로서는 분노할 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일본 사람들은 우리가 절에 가서 기도하듯 신사에 가서 공물을 바치고, 향을 피웁니다. 한 개인들이 그러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외교적으로 지탄을 받을 수 있는 국가지도자가 그러는 것은 일본이 삼가야 할 것입니다. 진정으로 대한민국의 미래의 파트너로 생각한다면 그러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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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식을 함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대사부터 근현대사까지 잘 정리되어있는 서적을 중심으로 먼저 공부해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환단고기부터 삼국유사, 삼국사기,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 근현대사 서적들을 추천해드리고 싶습니다. 환단고기의 경우 꽤나 잘 정돈되어있고, 중국의 사료 등과 비교해보았을 때 진서일 가능성이 더 높은 것으로 최근에 대두되고 있으나, 실물이 없고 전해내려온 필사본을 근거로 한 사료가 있고, 해당 사료에 고대에 쓰지 않는 표현이 있다는 논쟁으로 현재 강단사학계에서는 위서 논쟁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배달환국 시대부터 고조선, 부여 등의 역사를 언급한 내용이 있으니 참고만으로라도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삼국시대의 역사를 기술한 삼국유사, 삼국사기를 거쳐, 고려사, 고려사절요,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의 순으로 고대사를 정리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조선말기부터 근현대사는 정확한 자료들이 많으니 서점에서 마음에 드시는 역사학자의 저서로 골라 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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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다음 사람에게 왕위를 넘기면 그 왕은 상왕이 되는데요 그렇다면 세자의 경우에는 뭐라고 부르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맞습니다. 형식상으로는 세자의 자격이 폐하였으니 폐세자라고 하지만, 공식적인 명칭으로는 세자가 되기 전 위치인 대군 또는 군으로 불리게 됩니다. 왕은 최상위 결과이니 왕이었다가 선위를 하게 되면, 자신은 이전 왕이니 상왕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연산군이나 광해군처럼 왕이었다가 왕의 자격이 폐해진 경우도 마찬가지로 대군이나 군으로 명명합니다. 세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종 이방원의 정실부인 세 아들 중 첫째인 양녕대군이 원래 왕세자였으나, 여러가지 이유로 왕세자의 자격을 폐하게 되었고, 이후 셋째 아들인 축령대군이 왕세자로 책봉되어 향후 세종대왕이 되었습니다. 이에 첫째는 다시금 양녕대군의 지위로 오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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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기스칸은 몽골내 납치혼을 금지시켜놓고 왜 전쟁때 유부녀겁간은 전쟁의 낙이라고 부추겼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동족 내 납치 혼을 금지한 것입니다. 전쟁 중 적국 점령지에 대한 것은 전사들에게 주는 포상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전투력을 높이기 위해 포상안으로 둔 것입니다. 당시에는 현재와 같은 윤리의식이 있는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현재의 생각으로 판단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시 중국이나 한민족 고대국가들에서도 전쟁 후 점령하게 되면 포로를 본토로 데리고 와서 노비 등으로 쓰기도 하고 노략질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진 왕 같은 경우 점령지에 그러한 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를 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당시 몽골의 경우에는 전쟁에 승리하게 되면 그러한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으로 포상을 두어 더 큰 전투력을 고취시키는 방법으로 사용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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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은 옮길수 있을지언정 이미 내린 결정은 고칠수없다는 말로서 한번 결심한 일은 절대로 굽히지않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사자성어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南山可移(남산가이)입니다. 南: 남녘 남 山: 매 산 可: 옳을 가/들을 가/가히 가/쯤 가(정도)의 뜻으로 '呵(가)' '訶(가)의 원자에서 파생하여, 좋다, 가능(可能)의 뜻임移: 옮길 이 당나라(唐)의 정사(正史)로 이십사사(二十四史) 가운데 하나인 구당서(舊唐書)의 이원굉전(李元紘傳)에 민사소송을 담당하는 벼슬아치인 이원굉은 사람됨이 정직하고 안건 처리에 대단히 공정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승려가 어떤 사람이 절간의 석마(石馬)를 빼앗아 갔다고 하면서 탄원하였는데 그 범인은 태평공주라는 조정의 권세를 등에 업은 세력가였습니다. 하지만 이원굉은 조공정하게 판결하여 석마를 돌려주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이에 이원굉의 상관인 두회정이 태평공주가 두려우니 원래 판결을 고치라고 권고하였는데 이에 그는 판결문에 '남산은 옮길 수 있어도 판결은 흔들릴 수 없다.'라는 뜻의 南山可移 判不可搖(남산가이 판불가요)라는 여덟 자만을 썼다고 합니다. 이후로 남산은 장안성 남쪽의 큰 산인데 이원굉의 뜻은 원래 판결을 움직인다는 것은 남산을 움직이기보다 어렵다는 의미로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결정에 대해 비유해서 표현할 때 남산가이(南山可移)라고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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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합스부르크왕가는 근친결혼을 고집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합스부르크가는 신성로마제국의 선제후가 되기 위해 문서까지 위조해서 귀족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가문의 위대함을 증명하고자 오스트리아 지역의 빈을 문화의 도시로 육성시켰고, 슈테판대성당과 빈대학을 설립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많은 음악가들의 활동무대가 됩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다른 가문들과 결혼정책을 펼쳤고, 심지어는 황제의 외동딸인 엘리자베트와 결혼하여 130년만에 황제가문으로 상승했고, 영토도 가지게 됩니다. 합스부르크가의 막시밀리안1세는 부르타뉴 가문의 안과 결혼했고,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와 자신의 딸 마르게리따를 결혼시킵니다. 그러나 부르타뉴 영토를 차지한 막시밀리안 1세에게 불만을 가진 샤를 8세가 자신의 결혼을 무효화 시키고 무력으로 부르타뉴를 다시 차지하고 자신의 장모 겪이었던 안과 결혼하면서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가문은 숙적이 됩니다.이에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합스부르크가는 스페인 왕가와 사돈을 맺었으나 스페인의 상속자들이 모두 사망하고 결국 합스부르크가의 수장인 카를 5세가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 국왕에 오르게 됩니다. 이후 헝가리 왕가와도 사돈을 맺었는데 헝가리 왕이 전쟁에서 전사하자 헝가리 지역도 차지하게 됩니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반합스부르크의 성향이 강했기에 합스부르크가에서 차지하고 있는 스페인과 오스트리아(그 사이는 프랑스임)를 다스리기에 어려움을 느꼈고, 카톨릭인 스페인은 이교도와 개신교와의 결혼은 금지하고 있었기에 영토를 지키기 위해 혈통이 중요하다는 의식이 박히면서 궁극적으로 근친혼을 선택하게 됩니다. 근친혼에 의해 태어난 자식 중 돈카를로스는 지금에 와서 말하는 취약X증후군이라는 유전적 질환을 가졌는데 주걱턱, 짝다리, 정신질환을 자겼었고 젊은 나이에 사망하게 됩니다. 이후 필리페 4세 국왕은 여동생의 딸과 결혼하는 등 근친혼을 이어갔고, 그의 딸 마르가리따는 외삼촌인 레오폴트 1세와 정혼합니다. 그녀도 자랄수록 주걱턱이 심해지고 21세에 사망하게 되었고, 그의 남동생 카를로스 2세도 38세에 사망하였습니다. 후대에 조사해보니 근친혼일 시 나타나는 유전병에 의해서 스페인 왕실의 자녀 34명 중 50%가 10살 이전에 사망하였으며, 근친혼에 의해 유전병으로 주걱턱 등이 나타날 확률이 높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10여년간 이어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끝에 결국은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가 스페인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합스부르크가문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최초의 여왕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정략결혼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인 로드링겐 가문의 공작 프란츠 1세와 결혼하면서 근친혼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슬라브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당한 이유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마지막 황제인 카를 1세는 재산을 몰수당하고 국외로 추방당하게 되면서 전쟁에서 패한 합스부르크 제국은 마침내 종지부를 찢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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