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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학교는 어떤 특성을 가진 교유기관 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공교육의 문제점을 보완하고자 학습자 중심의 자율적인 프로그램을 운영하도록 만들어진 종래의 학교교육과는 다른 학교입니다. 대안교육은 제도교육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대안적 사회를 구성하면서 새로운 교육을 모색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안학교 중에는 학력이 인정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는데 대부분이 후자입니다. 그래서 대안학교를 나온 경우 향후 대학진학을 위해서는 검정고시를 봐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대안학교는 특별한 아이들이 가는 학교는 아닙니다. 초등학교, 중학교는 부모의 교육관이 그 결정의 큰 비중을 차지하며, 공교육에 대한 불신 등이 있는 경우 좀더 나은 학교환경을 위해 부모가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최근 전인교육 등을 내세우며 예전보다는 좀더 많은 대안학교가 생겨나고 있지만, 공교육 기관이 아닌 대안학교를 보낼 때는 잘 확인하여 그 가치가 오랜 기간 운영을 통해 증명된 곳으로 선택하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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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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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평온함을 깨트리는 아주 좋지 않은 방법인듯합니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전쟁을 통해 발전되어 왔다고 하는 학자들의 의견이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전쟁은 인류 역사상 있어서는 안되는 비극이지만, 과거에는 인류가 무리를 이루어서 살고 그 규모가 커져가면서 생존을 위해 발생되었었습니다. 전쟁을 위해서는 식량의 안정적 공급이 필요하고, 무기의 생산과 공급, 무기의 고도와 등이 동반되어야 했습니다. 구석기시대부터 본다면 주먹도끼에서 좀더 날카롭고 정교한 돌을 이용한 무기가 개발되고, 이후 자연에서 금속을 추출하고 제련하는 기술이 발달하여 청동기가 개발되었으며, 그보다 더 강하고 대량생산이 가능하며 가벼운 철기가 발명되었습니다. 상대방에게 던지던 돌을 더 큰 돌로 더 멀리 던지기 위해 투석기가 개발되었고, 상대의 성을 공략하기 위해 여러가지 공성기계들이 발명되었습니다. 이처럼 전쟁과 함께 과학기술과 그에 따른 산업이 발전해왔으니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전쟁의 순기능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어떤 이들은 전쟁을 하면 사람들이 다치고 사망하니 인구조절의 순기능이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므로 순기능이라고 구분하지는 않겠습니다. 과거에는 그랬다고 하지만, 현재에 들어서는 굳이 전쟁이 아니더라도 많은 연구를 통해 과학이 발전하고 있고, 전쟁을 위한 것이 아닌 작물의 재배와 보관, 유통에 대한 기술들도 별도로 발달하고 있으니 그냥 전쟁은 해롭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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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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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한 적은. 몇 번이나 되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일본이 한반도 지역을 침략 또는 약탈한 횟수는 기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신라시대 왜구 침략 (삼국사기 ) : 20회2) 고려시대 왜구 침략 (고려사 ) : 515회3) 조선시대 왜구 침략 (조선왕조실록) : 178회4) 대한제국 일제 침략 (1910∼1945, 식민지시대 포함): 1회 로 총 714회 있었다고 합니다. 해당 횟수는 해변 마을이나 국경 지역에서의 노략질까지 포함한 기록이고 전쟁이나 국토 침탈만 본다면, 조선시대와 대한제국시대로 국한되는데 아래의 3회로 기간으로 보면 총 50년간 전쟁 수준 이상의 침략과 침탈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1) 임진왜란 4년 (1592~1596) - 도요토미 히데요시2) 정유재란 1년 (1597~1598) - 도요토미 히데요시3) 일제강점기 45년 (1910~1945) - 메이지 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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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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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언제부터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세상 만물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그것의 용도와 모양, 의미에 따라서 각기 다릅니다. 그에 따라 불려지고 구분되어지는 것을 이름이라고 합니다. 종교적으로 본다면 태초부터 사물과 동물을 명명하였다고 판단됩니다. 성경에서 보더라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만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BC 2천년경에 제작된 길가메시 서사시에도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명명백백한 것을 보면 그 이전에도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다만 그 불려지던 이름이 증명되는 것은 문자가 만들어지고 난 이후입니다. 처음 이름을 사용한 정확한 시기를 특정할 수는 없습니다.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시간처럼 흘러온 것이니 시간의 시작을 특정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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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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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라는 문학을 가장 먼저 만든 나라는 어디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소설의 기원은 각 나라나 민족의 신화, 서사시 등의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소설이라는 장르는 누가 가장 먼저 만들었는지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서양에서 근대적 소설의 바탕이 된 것 가운데 가장 전형적인 것은 기사들의 영웅담 등을 소재로 한 로망스입니다. 특히 로망스에서 프랑스 남부의 기사 영웅담은 환상적으로 미화된 기사가 주인공이 되어, 권선징악의 주제를 이끌며 낭만적인 이야기를 펼쳐나가는데, 이것들이 여러 방향으로 변형되어, 현재 환상적 무용담이나 연애담을 뜻하는 로맨스라는 장르로 남았다 합니다. 한국의 춘향전도 이러한 성격을 다분히 지녔다고 볼 수 있습니다.근대 소설을 뜻하는 영어의 Novel은 중세 이탈리아에서 유행하던 Novella에서 온 것으로 이 말은 새로운 것, 신기한 것이란 뜻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노벨라는 데카메론과 같이 현실의 세태를 반영한 이야기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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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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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나누어지는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구분은 간단합니다.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시점은 고려시대였고, 이후 정도전의 의견을 받아들여 고려의 색을 없애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국호를 바꾸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당시 강국이었던 명나라에 새롭게 조선이라는 국호로 외교적으로도 인정받았던 시점부터 고려 시대는 막을 내리고 조선시대가 시작된 것이라 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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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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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묘화란 무엇이며, 이 예술 형식의 주요 특징과 특유한 스타일에 대해서 설명해주세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점묘화는 점을 찍어서 그림을 그리는 화법으로 프랑스의 화가 조르주 쇠라가 개발했다고 알려져있고, 그의 동료인 폴 시냑도 함께 점묘화의 개발에 이바지를 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신인상주의로 분류가 되었습니다. 보통의 그림의 경우 선이나 면을 물감으로 칠해서 표현하는데 점묘화는 그 선이나 면을 점으로 찍어서 표현하고 명암등을 구분할 때 농도를 달리한 점을 찍어 그라디에이션을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점묘법으로 그린 그림은 가까이서 보면 그 점들이 드러나 이질감이 느껴지지만 멀리서 작품을 바라보았을 때는 일반 유화와 같은 느낌입니다. 즉 터치의 방법이 점으로 표현되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점묘화는 상당히 과학적인 원리가 들어가 있는 그림으로 빛과 물감의 차이를 인지하고, 색이 섞여지면 탁해지고 검은 색에 가까워진다는 것에서 착안하여, 점묘법으로 찍은 여러 점에서 반사되는 빛을 우리의 시각이 각기 다른 빛이 아닌 여러 빛이 섞인 색으로 인식한다는 원리로 색의 조화를 표현하였습니다. 즉 물감은 섞이면 탁해지지만, 점묘법으로 찍은 물감들은 섞이지 않고 반사되는 그 빛이 섞이는 것이므로 훨씬 밝고 선명하게 보이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러한 점묘화의 원리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스마트 기기의 이미지를 화면에 표출하는 방식과도 다르지 않는 최첨단의 과학원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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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3.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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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나 차례지낼때 술잔을 향불위에서 두번돌려서 올리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원래 초에 불을 붙이고, 향을 피우는 이유는 조상의 영혼을 불러온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제를 올릴 때 술잔을 두 손으로 받쳐 올려 상에 올리는 행위가 제단 앞에 있는 향 위를 지나다 보니 그것을 잘못 이해한 사람들의 행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집에서는 오른쪽으로 몇 번 왼쪽으로 몇 번 돌리는 집도 있고, 향 연기에 한번 그을리는 정도로 하고 술잔을 올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확한 설이 없으니 음향오행에 의해 제사상 기준으로 시계 방향으로 6시-9시-12시-3시 또는 북동남서 방향으로 돌려야 한다는 집안도 있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려야 하다는 집안도 있고, 잔을 돌리지 않고 그냥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올린다는 집안도 있고 아주 다양합니다. 어떤 이유로 다르게 이어져 왔는지는 모르나 그 정확한 사실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냥 각 집안에서 내려오는 전통적인 방식에 대해 존중하고 서로 간의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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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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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공신으로 인정되면 특혜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삼국시대에도 녹공을 내렸다는 기록은 있으나 공신책봉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는 듯 합니다. 고려 때는 공신의 경우 토지와 노비를 내리고, 무신정권 이후에는 그 자손에게도 특혜를 대물림하게 확대되었습니다. 조선에도 그대로 이어져 그 명칭만 달리하였다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공신의 정도를 더욱 세분화하여 1~4등 공신 등 등급을 나누어 그에 따른 특혜의 정도도 달리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의 공신호는 개국공신부터 시작하여 총 28개에 달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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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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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관련서적보다가 조세형이란인물이 있던데 왜 대도라고 부르는지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과거 조세형이라는 사람은 1970~80년대 전과 17범으로 유명한 절도범이었습니다. 그가 유명인사의 집도 많이 털었기 때문에 별명이 대도 조세형이라고 불리었습니다. 전직 국회의원, 현직 부총리, 유명기업 사장, 국내 재벌가 딸의 집 등에서 엄청난 명품들을 훔쳤기에 그랬습니다. 조세형은 밤에는 도둑질을 하지 않고, 낮에 부자집만을 골라 절도행각을 벌였습니다. 부자들이 뒤가 구려서 잘 신고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절대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훔칠 것이 많아도 딱 20분만에 작업을 하고 나왔다고 합니다. 외국인의 집은 나라망신이라 털지 않고, 판검사의 집도 털지 않았다고 합니다. 판검사의 집은 자신은 잡히지 않겠지만, 다른 절도범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그랬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훔친 돈 및 재물의 30%를 가난한 사람을 위해 썼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도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당시 정치인, 부자들에 대한 반감이 심했으니까요. 하지만 조세형은 그냥 절도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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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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