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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어린이날은 언제 누구에 의해 제정이 된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19년의 3·1 운동을 계기로 어린이들에게 민족 정신을 고취하고자, 1923년 방정환을 포함한 일본 유학생 모임인 ‘색동회’가 주축이 되어 처음에는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였다가 1927년 날짜를 5월 첫 일요일로 변경하였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행사만 추진하였고, 1961년에 아동복지법에 공식적으로 어린이날을 5월5일로 명기되었습니다. 1973년에는 기념일로 지정되었고, 1975년부터 공휴일로 제정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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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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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인시대의 김두한이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란 것이 팩트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사실로 판명된 일로 판단됩니다. 우선 안동김씨 족보에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로 올라가 있고, 호적에도 김좌진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김좌진은 부인이 여럿이었는데 정실부인과 다른 부인들이 김두한을 김좌진 아들로 인정하고 일제 시대와 김두한 사망 이후 1980년대까지도 김두한이 김좌진 아들임을 증언했다는 것을 볼 때 사실이라 확인됩니다. 일제시대 김좌진 아들 김두한을 요주의 인물로 지정하고 감시했던 일제시대 공식문서가 있고, 김두한이 어렸을때 김좌진 아들이라며 행적을 보도한 당시의 각종 신문기사도 존재하며, 해방 이후에 김구와 청산리 동지였던 이범석 등 독립운동가들이 김두한을 김좌진 아들로 공식석상에서도 인정하고 발언하였다고 합니다. 도올 김용옥이 거지였던 이가 자신을 김좌진의 아들 김두한이라고 속였다는 음모론을 제기하였었으나, 1990년대에 김좌진의 여러 부인 가족들과 김두한 가족들이 한 가족으로 방송 다큐에 출연하여 가족이 확실함을 밝혔습니다. 그게 사실이 아니라면 거지 하나가 안동김씨 가문 전체와 국가와 언론과 일본까지 다 속였다는 것인데 사실상 불가능하고, 그에 따른 공식 기록들이 사실로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사실상 국내의 여러 매체의 내용보다도 철두철미한 일본 정부에서 김좌진을 잡고자 그의 아들인 김두한을 종로를 벗어나지 못하게 철저하게 특별 감시하였다는 것만 보아도 사실 관계가 확인되었으니 그랬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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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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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연호는 언제부터 사용 된건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대한민국에는 고구려에 대한 유물이나 사서가 거의 없는 관계로 확인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보통 광개토태왕비문 기록되었는 영락이 최초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중국의 사서에서는 신라와 발해의 연호 사용에 대해서는 기록되어있고, 특히 발해에 대해서는 연호가 바뀔 때마다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만 북한학계에서 발표한 바로는 발견된 고구려 유적에서 나와있는 것으로 영락 이전에도 사용했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태왕명 / 사용확인년도 / 연호 / 발견 유적 소수림태왕 / 374-377년 / 태령 / 집안성벽 명와광개토태왕 / 391-412년 / 영락 / 광개토태왕비 (비문 기록으로 다른 설 없이 확실성 인정)장수태왕 / 413-419년 / 연가 / 연가명 금동 여래상 / 451-472년 / 연총 / 서봉총 은합우 / 472-479년 / 건흥 / 건흥명 금동 불상문자명태왕 / 508-511년 / 백선 / 곡산군 경4년 불상양원태왕 / 544-546년 / 태화 / 신포시 금동판평원태왕 / 565-571년 / 영강 / 영강명 불상 광배====================================광개토태왕비문에 기록되어있는 영락은 이견 없이 확실하게 인정된 것이고, 나머지는 유물에서 확인되었으나, 정확한 시기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이견이 있는 듯 합니다. 고구려를 이은 발해 대진국의 경우도 초기부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도 초기부터 연호를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추론일 것으로 판단됩니다. 광개토태왕 이전의 경우 근거가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확실하게 인정된 광개토태왕 시기 영락 이후에도 유물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 시기가 명확하지 않더라고 확실하게 연호를 사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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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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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신라 신분제도는 어떻게 나뉘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골품은 뼈[골(骨)]의 등급[품(品)], 곧 타고나는 신분을 뜻합니다. 신라시대부터 있었고, 통일신라가 되면서 일부 변경되었습니다.골품제는 신라 지배층, 곧 귀족을 등급으로 구분하는 신분 제도인데 성골,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의 다섯 등급으로 나누어 관리하였습니다. 그 아래로 3,2,1두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특별한 혜택도 없고, 일반 백성과 구분의 필요성이 없어지면서 사라진 것으로 판단됩니다. 또 성골의 경우도 진덕여왕을 마지막으로 소멸되어 통일 신라 시대에는 진골, 6, 5, 4두품의 4개 등급만 존재하였다고 합니다.골품제는 골제와 두품제로 나뉘어서 관리되었고, 왕과 고위관리가 될 수 있었던 성골, 진골의 골제, 그 이하 관리와 귀족층을 구분하는 6, 5, 4품제가 그것입니다. 사실상 이것은 왕경, 즉 수도권에서만 운영되던 제도이고, 지방의 호족들은 4, 5품의 대우를 해주기는 하였으나 실질적으로 두품제를 시행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즉 신라에서는 수도권과 지방권을 분리하여 관리했다고 볼 수 있네요.골품제는 그들의 골품을 유지하기 위해서 근친혼을 한다던가 동일계급간 혼인을 하는 폐쇄적인 신분제도였기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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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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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편지 같은 것들은 어떻게 전달을 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는 개인의 우편물은 대부분 사람이 직접 전달하였습니다. 글을 아는 중상위층이 주로 사용하였으며, 자신이 직접 가지고 가던지 가노를 시켜 전달하게 했습니다. 근대적인 우편제도가 실시되기 전의 통신 방식은 중앙정부에서 지방관서에 이르는 도로 곳곳에 역을 세워놓고 말을 갈아타고 달리며 공문 등을 전하는 역전제였습니다. 또다른 말로는 우역제라고도 합니다. 일반 백성들이 이용하는 편의가 아닌 공무 또는 지배계층 즉 양반들이 이용하였다고 보시면 됩니다. 조선시대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보면 “걸어가 전하는 것을 우(郵)라 하고 말을 타고 가 전하는 것을 역(驛)이라 한다.”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역제는 말을 타거나 걸어가 공문서나 명령을 전달하는 것이죠. 긴급을 요할 때는 말을 타고 달리며 통신 업무를 수행했고, 급하지 않으면 걸어가 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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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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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왜 불교를 탄압하교 유교를 앞세웠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 고려 말 상황은 군부의 핵심들이 왕권을 위협하며 난장판이었습니다. 거기에 당시 최영이라는 군부 핵심이 독점적 권한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죠. 마지막까지 그와 대립하다 위화도 회군을 빌미로 역성혁명에 성공하고 당시 왕을 강제로 내리고 공양왕을 옹립했다가 결국에는 그도 파하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 당시 기존 고려의 것을 멀리하고 새로운 개혁을 시도하기 위해 제일 먼저 국호를 바꾸는데 그것이 조선입니다. 사실 조선은 과거의 고조선에서 따온 것이라기 보다는 과거에 썼던 조선이라는 이름을 가져다가 쓴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의 조선과 근대의 조선을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고 명명한 것이지 공식명칭은 조선이었습니다. 당시 동북아 강대국이었던 중국의 명나라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외교적으로 공식 국호로 사용하게 됩니다. (당시 힘이 없어서 명나라가 국가로 인정해야 했으니 짜증이 좀 나네요 ㅎ)그리고 조선의 건국은 사상적으로 불교가 아닌 성리학을 기반으로 세워진 나라입니다. 고려 불교의 영향력이 강해져 고려 후기에 이르러 불교의 패해가 심해지고, 부패하여 권력화 되어 국가를 위기에 빠지게 했던 과오가 있었습니다. 조선의 건국 세력이었던 정도전과 그를 따르는 이들은 고려의 3대 악을 부패한 불교, 왕권을 위협하는 특정 군부세력, 그리고 유약한 왕권으로 규정하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롭게 성리학의 반석 위에 나라를 세우기를 바랐습니다. 이성계는 그것을 실현시켜 줄 도구였던 것이죠. 하지만 그 도구의 힘과 야망을 간과하였기에 이후에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조선 건국 후에도 태조 이성계, 정종, 태종 이방원으로 이어지면서 정도전의 바람대로 성리학을 기반으로 국가를 운영하고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불교를 억제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숭유억불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는 세속에서 멀어져가고 점점 산으로 산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불교의 몰락은 정치적인 이유와 불교계 자체의 부패가 이유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를 금지시킨 것이 아니라 불교계에 지원하던 많은 혜택들을 몰수하였고, 이에 더 발전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중기를 지나면서 국가의 전란 시에 승병 등이 국가에 기여하면서 명예를 회복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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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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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가 한국으로 귀국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50년대 초반에 당시 『서울신문』 도쿄 특파원이었던 김을한이 병원에 입원 중이던 덕혜옹주를 방문하였다가 충격을 받아 반드시 귀국시켜야 한다고 결단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가 1961년 11월 김을한이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를 만나, 병상에 있는 덕혜옹주와 영친왕이은의 사정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이들의 귀국은 빠르게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박정희 의장은 덕혜옹주와 영친왕이은 부부의 귀국을 적극 돕기로 결정하고, 이를 추진했고 덕혜옹주는 1962년 1월 26일 유모 변복동 및 상궁들, 그리고 옛 학교 친구의 마중을 받으며 37년 만에 한국에 돌아왔다고 합니다.생활은 낙선재에서 했으며, 서울대병원에서 입원했다가 이후 통원치료 할만큼 경과가 좋아졌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1989년 4월 21일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4월 25일 경기도 미금시 금곡동(金谷洞)에 있는 아버지 고종의 무덤인 홍유릉(洪裕陵)의 부속림에 안장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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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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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시기 신라는 왜 가장 늦게 중앙집권체제를 이루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신라의 경우 특이한 부족국가의 형태로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박, 석, 김 성을 가진 핵심세력들이 돌아가면서 왕을 했습니다. 처음 박혁거세가 주위 6개의 부족을 통합하여 신라를 건국하고, 그 부족의 포섭을 위해 핵심되는 세력들이 번갈아가면서 왕을 했기 때문에 권력의 분산도 심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신라는 김씨성으로 왕족이 단일화되었고, 엄격하게 골품제라는 신분제도 내에서 승계를 해나가면서 권력도 집중되기 시작했습니다. 초기에 지도자를 '거서간(시조)→차차웅(무당)→이사금(왕,우두머리)→마립간(왕,우두머리)→왕'으로 당시 중국 및 주변국에서 사용하는 명칭으로 바꾸면서 중앙집권적 개혁을 추진합니다. 왕이라는 호칭은 문무왕 때부터 사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차돈의 순교를 기점으로 불교를 국교로 들이면서 종교를 이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시기를 거치다보니 건국부터 단일 왕권을 가졌던 고구려나 백제보다 초기에는 발전이 더뎠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가장 늦은 시기에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갖추었으나, 국력이 약했지만 외교력이 강했고, 이에 외교를 통해 국가의 위기를 넘기면서, 뒤로는 국력을 키워갔습니다. 그렇게 100% 삼국의 통일을 이루지는 못하였어도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의 3국 중 가장 마지막에 남아 한반도를 차지한 국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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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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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가 프랑스 사람이 아닌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알베르 카뮈는 1913년 11월 7일에 프랑스령 알제리 콩스탕틴 주 몽도비에서 태어났고, 1960년 1월4일 프랑스 부르고뉴 욘주 빌블르뱅에서 사망하였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많은 식민지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알제리는 단순 식민지가 아니라 프랑스의 확장된 영토로 생각할만큼 각별하여 프랑스 사람들이 본토로부터 기회의 땅이라고 많이 이주하였습니다. 알베르 카뮈의 부모도 그랬습니다. 현재의 시점에서는 알제리는 독립 국가이기 때문에 알베르 카뮈가 알제리 지역에서 태어났으니 알제리 사람 아닌가 하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애초에 프랑스 국적을 가진 순수한 프랑스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일본이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여 운영하였지만, 당시 일본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우리 땅에서 자녀를 낳았고, 국적도 일본이었는데, 지금에 와서 대한민국이 독립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한국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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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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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딸을 부를 때 '옹주', '공주'라고 부르는데, 무슨 차이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정실부인 즉 중전에게서 낳은 자손은 아들은 대군, 딸은 공주라 부르고, 후궁에게서 낳은 자속은 아들은 군, 딸은 옹주라고 부릅니다. 부름에 있어서 차이는 있었으나, 후계로 낙점된 세자가 아니고서는 대우는 동일하다고 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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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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