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때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 건국의 주축 세력인 신진 사대부는 명으로부터 건너 온 주자학, 즉 성리학자였습니다. 태조인 이성계는 고려의 무인이었으나 고려의 무인정권으로 인한 폐해가 고려 왕조를 몰락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하고, 정도전을 필두로 한 성리학 세력의 지지를 받아 그들이 계획한 국가 건립을 추진하였고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국정의 운영은 무인보다는 문인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조선 건국 후 완벽히 성리학의 나라로 이끌기 위해서 신진사대부들은 명을 상국으로 받들고,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유교사상을 들여오면서 과거 고려시대의 국교였던 불교와의 대립이 자명하였습니다. 이에 과거 고려시대의 불교가 너무 비대해지면서 국고를 많이 낭비하여 국력이 쇠퇴하게 되었고, 종교를 넘어 권력으로 자리잡아 민간에도 피해를 끼졌다고 보며, 더이상 불교가 비대해지는 것을 막고, 사찰 등의 숫자를 줄이고 승려가 가질 수 있는 권한을 대폭 축소하여 불교를 억압하는 대신 유교를 모든 국가 운영의 맨앞에 내세우는 '숭유억불'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조선은 고려와 달라야했기에 태조 이성계에 이은 그 이후 왕들도 왕가에서 불교에 심취한 왕과 왕족들이 있었지만, 이러한 국가 정책을 추진하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여 불교와 유교가 충돌이 나게 된다면 왕족 외 국정운영의 전반을 차지하고 있는 성리학자들의 반발로 인해 또다시 국가가 혼란이 올 수 있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국교였으나 학자들이 추구하는 성리학의 기반 또한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워낙 불교가 왕권과 유착하여 종교 이상의 권력을 가지다 보니 이에 국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왕도 더러 발생하였고, 조선 왕조에서는 그러한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신진사대부들의 전략이었습니다. 이후 이러한 주자학의 인의예지신의 좋은 뜻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쪽으로만 흘렀고, 이후 자신들만 관직을 독점하며, 당파 등 패거리정치를 하게 되고, 상인 계급 등을 천시하며, 일반 민중에게 무리한 관혼상제를 강요하는 등 폐해가 발생하였습니다. 그래도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조선은 성리학을 기반으로 세워진 나라라는 이유로 유교 만을 숭상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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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로 돈을 벌수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선 님을 통해서 좋은 음악이 나오기를 응원하고 기대합니다. 창작이라 하는 것은 참으로 고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내놓은 작품 또한 인정을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니 더욱 답답한 마음이 크리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님은 음악을 다루고 작곡하는 놀라는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재능이 있으나 아직 님의 음악을 경험해보지 못한 많은 가수, 기획사, 청중이 없었을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음악에는 대중가요, 광고음악, 영화음악 등 최근에 이슈가 되고 있는 문화산업들에 해당되는 것이 많다고 합니다. 개인 SNS나 음원 클라우드 등에 업로드 하여 관심있는 뮤지션들이 찾아보고는 역으로 연락을 주어 대중에게 소개되는 경우도 최근에는 더러 있다고 합니다. 당장에 하시는 음악으로만 돈을 벌기가 어려워 생활이 힘드시다 하시면 생활을 위해 다른 일을 병행하시더라도 음악 창작의 일을 놓지는 마시고 끝까지 도전해보시기 바랍니다. 님의 멋진 음악을 경험할 기회를 제게서 빼앗으시면 님은 유죄입니다^^.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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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는 우리나라로 봐야하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원래 고구려가 멸망한 뒤 대중상이 아들 대조영과 함께 건국하여 처음에 후고구려라 칭하고, 중광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후 대조영이 황제가 되면서 국호를 대진국이라고 변경했습니다. 당시 당나라에서 낮춰부르기 위해 중국 동쪽의 바다인 발해의 국왕이라는 식으로 발해국왕의 책봉을 내렸던 것으로 이후에는 국제적으로 발해국으로 통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전까지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도 고려왕이라고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에는 틀림이 없어보입니다."대진국 발해는 당연히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입니다."대진국 발해는 고구려가 패망하고 고구려인이 주축이 되어 세운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고구려인이 지배계층이고 말갈인은 피지배계층이었나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고구려의 장수였던 대조영이 주축이 되어 세운 국가이기 때문에 대조영이 왕으로 추대되어 왕족이 되었고 골고루 등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모시몽, 오차지몽, 미발계 등 말갈계 발해 지배층이 기록으로 남아 있고, 대진국 발해가 차지한 영토는 원래 고구려의 영토로 고구려인들이 터전으로 삼았던 곳입니다. 대진국 발해는 고구려계와 말갈계가 혼재된 구조이나 고구려계는 지배층, 말갈계는 피지배층으로 구분되어있었던 것은 아닌 것이죠.그리고 대진국 발해의 지배층이 고구려인이나 말갈인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진국 발해의 귀족은 왕족인 대씨(大氏)를 비롯하여 고씨(高氏), 장씨(張氏), 양씨(楊氏), 두씨(竇氏), 오씨(烏氏), 이씨(李氏)의 여섯 우성망족(右姓望族)이라 불리는 유력 귀족집단이 존재하였고 이들이 발해의 외교, 군사, 정치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고, 장, 이는 고구려계, 오, 양은 말갈계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두씨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 외 하(賀), 왕(王), 임(任), 해(解),수(受), 율(聿), 배(裵), 박(朴), 최(崔) 등의 부여계, 고구려계, 말갈계를 비롯한 중국계, 신라계도 포함된 49개 족성(일반귀족)이 존재하였다고 합니다.중국은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고구려와 대진국 발해의 역사를 자기네 중국의 속국 정도로 치부하며, 어이없이 현재 자신들의 중국 영토에서 존재하였던 모든 국가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몽골의 징기스칸도 자신들의 역사라고 하죠^^. 현재의 중국은 많은 외세의 지배를 받았던 혼란의 땅이었습니다. 여러 민족들이 중국의 땅을 지배했었지요. 중국이 한족이 주축이라고 한다면, 수, 당의 선비족, 원은 몽골족, 청은 여진족, 고조선때는 우리 민족이 현 중국 영토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죠. 현재의 자기네 영토가 넓다고 해서 그 지역의 모든 역사가 자기네 역사라고 하며, 현재 독립국으로 있는 우리나라의 역사가 다 중국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망언입니다. 최근 발견된 과거 대진국 발해 지역의 황후 무덤에서 비석에 발해의 '순목황후'라는 말이 나옵니다. 대진국 발해가 당시 당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이었다면, 당의 황제가 있는데 황제의 아내라는 황후라는 말을 쓸 수 있었을까요? 해당 무덤에서는 고구려의 유물들이 출토되었고, 문자 기록이 있는 묘비가 있는데 자세히 공개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유는 아마도 자신들이 추진하고 있는 동북공정에 유리한 내용은 아닐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유리한 것이라면 벌써 발표하고 난리가 났겠죠. 고구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대진국 발해 모두 우리 조상들이 세운 자랑스런 우리나라입니다. 동북아시아의 여러 민족이 함께한 나라였던 것입니다. 고구려는 구당서에도 요서지방을 중심으로 동서로 3천1백리, 남북으로 2천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식민사학으로 가득 찬 우리 교과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당시 고구려의 영토보다 훨씬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고 중국의 사서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우리 사학자들이 이상한 것이죠. 역사는 모든 나라와 연관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역사가 모두 자기네 역사는 아니죠. 사료들도 확실하지 않은 것들도 많고 없는 것들도 많아 증명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서로의 역사를 존중하며, 자기네 역사와 관계를 맺어왔다는 것으로 역사의 조각을 맞춰 가야하는 것이지 모두 내 것이야 하는 중국의 행태는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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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단순히 많이 쓰기만 해도 작문능력이 올라갈까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정답을 모두 말씀하시고 있네요^^글을 잘 쓰려면 많이 쓰고, 그리고 그 글들을 다시 읽어보면서 전개가 유연하게 이어지는지 논리나 이야기의 흐름에 맞지 않는 부분은 없는지, 맞춤법이 틀린 곳은 없는지 고쳐나가는 퇴고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 이전에 신문사설, 유명작가의 여행기, 에세이, 소설, 시 등 다양한 글을 읽어 기존 작가들이 글을 써내려가는 방법을 배워보는 것도 좋습니다. 좋은 글 쓰시기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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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이 왜 8월15일 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45년 8월 15일은 일본의 히로히토 천황이 태평양전쟁에서 항복을 한다고 NHK 라디오방송을 통해 공식 발표를 하여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이 일본제국의 조선총독부의 통치에서 해방된 날입니다. 이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이에 모든 시스템이 조선의 것으로 완벽히 그 시점에 되돌려졌다고 볼 수는 없으나 일본 패망의 시점이므로 그 날을 국권을 회복한 날이므로 광복절로 기념하였고, 1949년 10월 1일 제정된 국경일법에 의해 정해졌습니다.대한민국의 광복절과 같은 의미로 해방, 독립,승전일로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을 기념하는 나라들도 있습니다. 우리와 같은 1945년 8월 15일을 기념하는 나라는 북한, 호주, 네덜란드, 뉴질랜드, 영국입니다. 미국, 중국, 대만은 9월2일을 승전 기념일로 하고 있습니다. 필리핀은 9월 3일입니다. 연합국의 공식 항복 조인식이 9월2일이었기에 그날로 광복절을 정해야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에서의 공식 항복 조인식은 9월9일에 미국 입회 하에 조선총독부에서 이뤄졌으니 그 날을 주장할 수도 있을 듯 합니다. 광복의 의미를 두고 어느 날에 기념하는가는 각국 정서에 따라 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공식문서에 사인한 날이든, 항복 선언을 한 날이든 각 해당국에 더 큰 의미를 가진 날로 하면 되는 것이고 그 날을 잊지 않고 순국선열들을 기리고 과거의 치욕을 잊지 않으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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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불교 국가가 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은 유교 지식인들이 창업의 설계자였습니다. 따라서 이들로 하여금 건국의 이념과 운영 원리를 제시하게 했죠. 그로 인해 명의 성리학을 추종하던 그 세력들이 당시 조선이 처한 정치·외교·경제적 현실을 고려하여 숭유억불(崇儒抑佛) ·중농주의(重農主義) ·사대교린(事大交隣) 의 세 가지 통치 이념을 내세웠습니다. 불교가 크게 번창하지 못했던 이유는 그 중 바로 숭유억불 정책에 있습니다. 불교는 오랫동안 고려의 정신과 종교 생활을 지배해왔지만 지나치게 커져 국가 재정을 약화시켰습니다. 또 고려 말에 심하게 부패해 국가의 주 이념으로 유지하기 어려웠습니다. 이에 정도전을 필두로 한 성리학자들이 새로운 국가 이념으로써 성리학(유학)을 내세우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세상에는 새로운 것이 필요했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무인이었지만 조선을 문치주의 국가로 건설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유교를 중심으로 국가와 사회를 조직하고 운영하려 했죠. 따라서 주자학 중심의 참모들은 성리학의 정립을 위해 불교를 반대하였습니다. 불교 자체는 물론이고 불교와 연결된 귀족 세력도 함께 탄압했고 많은 불교 사원을 정리하여 종단에 귀속된 토지와 노비를 국가 소유로 바꾸었습니다. 세금과 군역을 피해 스스로 승려가 되었던 양민들도 불교에 대한 핍박을 피해 승려를 포기하였습니다. 이처럼 숭유억불 정책은 성리학의 나라 조선의 통치 이념 실현과 함께 국가 재정 강화에도 기여했습니다.불교는 고려시대에 팔만대장경 같은 훌륭한 유산을 남겼으나 권력화되어 부패하였고 조선의 건국 밎 통치 이념과 거리가 멀고 그 통치 주축이 대부분 성리학자들이다 보니 왕이 불교에 관심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개인의 취향으로 인정할 뿐 통치 이념이 되는 국교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나라의 근간이 흔들리게 되는 것이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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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잘 쓰려면 무엇을 해야할까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잘 쓰여진 글을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글도 트렌드가 있기에 최근 널리 읽혀지는 글이 좋겠죠.문학작품을 쓰고 싶으신 것이면 최근 이슈가 되고 문학상 등을 수상한 글 위주로 많이 읽어보시고, 블로그 등의 소개글, 여행문, 맛집투어 등 글을 쓰고 싶으신 것이면 유명한 인플루언서의 글을 많이 읽어보셔서 그 트렌드와 방식(사진활용법 등)을 연구하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이후 자신이 정한 장르와 주제의 글을 많이 써보셔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만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정립되고 개성을 갖춘 글을 쓸 수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건필하셔서 좋은 글을 쓰게 될 것입니다. 실패는 없죠. 다만 시간이 걸릴 뿐입니다. 그 시간은 투자하는 시간에 달려있는 것 같아요.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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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는 어떻게 조선을 건국하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당시는 원나라가 쇠퇴하고 명나라가 중국의 전체를 장악해가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명나라가 과거 원나라가 쌍성총관부를 세워 관리하던 철령 이북의 땅을 내놓으라고 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곳에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겠다는 의도였죠. 하지만 당시 군부의 실권자였던 최영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여 당시 왕이었던 우왕(공민왕)을 설득하여 요동을 먼저 치자고 하며 전쟁으로 맞서게 됩니다. 당시 이성계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쳐서는 안되며, 여름이라 농번기로 군사를 모으기가 어렵고, 많은 군사를 이동시키면 남으로 왜구가 쳐들어오며, 여름에 장마가 지면 덥고 습해 전염병으로 전쟁이 어렵다는 4가지 이유로 전쟁을 반대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군부의 실권자이자 왕권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최영은 자신의 뜻대로 요동정벌에 나서게 됩니다. 이 때 최영 자신이 8도 도통사가 되고, 좌군도통사에 조민수, 우군도통사에 이성계를 선봉으로 하여 전쟁을 시작하거 됩니다. 위화도에 도착한 이성계는 압록강이 불어났다는 이유로 2주를 지체하게 되고 회군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성계는 반드시 회군을 해야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조민수와 논의하여 회군을 결정하였고, 왕명과 최영의 명을 어겼으므로 죽임을 당할 것이 뻔하다고 생각한 그들은 개경을 공략하여 우왕을 폐위시키고, 최영을 유배 보낸 뒤 죽여버립니다. 이후 바로 새로이 국가를 세운 것은 아니고 우왕(공민왕)의 아들을 창왕으로 세읍니다. 이후 함께 역모를 한 조민수와 권력 대립하다 조민수도 유배를 보내게 만들고 창왕도 폐위한 후 다시 공양왕을 세우게 됩니다. 그러면서 과거 최영이 가졌던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고, 이러한 권력이 결국 조선 건국의 초석이 됩니다. 이후 가신들과 주변의 권유에 적절한 시기라고 생각했던 이성계가 왕에 오르고 국호는 과거 고려와 같이 할 수는 없다 하여 옛 국호에서 살펴 조선으로 정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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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전쟁 후 북한보다 빨리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60년 당시 북한은 세계 GDP순위 60위, 한국은 101위였습니다. 대한민국은 세계 극빈국에 속하는 나라였지요. 분단 이후 북한은 군사력 증강을 위한 기술 개발에만 집중했던 반면에 한국은 먹고 사는 문제 해결을 위해 우선 식량자급자족에 집중하였습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었습니다. 1차 산업인 농업을 육성하고 2차 산업, 경공업, 3차 서비스업까지 점진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현재 우리는 식량자급자족을 초과하여 주식인 쌀이 남아돌고 있는 상황이지만 북한의 경우 2012년부터 자급률이 10% 정도 밖에 되지 않아 원조를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문명의 발달의 최우선 조건은 안정적인 식량의 확보입니다. 그러한 근간이 없이 발달한 나라는 거의 없습니다.경제개발5개년 계획은 유럽부흥모델이었던 마샬계획을 근간으로 하여 1960년 4월19일 이후 제2공화국의 장면 총리에게 미국이 제안한 것입니다. 이에 미국은 1~3차에 걸친 15년간의 경제개발5개년 계획에 150억달러, 250억달러, 450억 달러를 지속적으로 차관 지원함으로써 발전의 기반을 닦게 됩니다. 4차부터 9차까지는 자력으로 하여 중화학공업 및 첨단공업에까지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실질적으로 대한민국과 북한의 격차는 80년대 후반부터 확연하게 보였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당시 소련의 경우도 북한에 그러한 계획을 제시하였지만, 제대로 된 원조가 되지 않았고, 공산주의 체제의 북한으로서 일의 능률도 없고, 식량의 확보도 제대로 되지 않아 모두 실패하게 됩니다. 현재도 그렇고 공산국가 중 식량의 자급을 이룬 나라는 중국이 유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1차 산업의 기반이 제대로 되어있고, 2차, 경공업, 3차 서비스업 등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으면, 균형적인 발전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참고로 러시아의 경우 소련이 붕괴되었을 때 최첨단 우주과학 기술을 가진 국가였지만, 경공업이 거의 발달하지 않아 붕괴 후 대한민국으로부터 생필품을 수입해 갈 정도였습니다. 여전히 러시아는 식량의 많은 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대한민국과 북한의 경제력의 차이는 첫째로 식량의 자급 문제 해결, 둘째로 체계적인 경제개발계획의 추진, 셋째로 우호국의 적극적인 지원, 넷째로 자유민주주의 &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효율성의 차이로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북한도 최근에는 일부 자본주의 제도들을 도입하고 있고, 개선을 해나가고 있는 상황이니 조금씩은 나아질 것이고, 정신차리고 우리와 진정한 통일을 논한다면, 상생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라고 봅니다. 처음에는 어렵겠지만, 대한민국이 더욱 세계로 뻗어나가고 중국과 더욱 대등하게 경제 및 외교를 해나가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으로의 통일이 꼭 필요한 것 같습니다. 체제의 성패는 결정이 났으니 북한 지도층들의 담대한 결정이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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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 백두산이 화산폭발을 했다는데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백두산의 화산 폭발 시기는 과거 고려시대인 939년에 한번의 조짐을 보였다가 946년~947년 경에 본격적으로 폭발하여 화산폭발지수 7에 해당하는 정도일 것으로 추정되며, 폭발로 인해 분출된 쇄설물의 양이 83~117세제곱킬로미터는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947년 이후 총 16회의 화산분화 기록이 발견되었으며, 폼페이 멸망에 기인한 벳비오 화산의 100배, 아이슬란드 화산의 1000배에 달하는 강한 폭발이었다고 합니다.[기상청블로그 2019.2.12 참조]해당 기록은 우리 기록으로는 <고려세가>, <고려사절요>에 나와 있다고 합니다. 또한 일본의 한 사찰에서 발견된 연대기의 내용 중에서 ‘하얀 잿가루가 눈처럼 내렸다’는 946년 11월 3일의 기록이 있고, 당시 화산재가 일본까지 날아간 사실도 일본 지질조사단에 의해 밝혀진 바 있다고 합니다. 피해규모는 정확히는 기록되어있지 않으나 당시 폭발에 의해 백두산 천지가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북한 / 미국 / 영국의 과학자로 구성되어진 공동연구진의 백두산 암석 분석 연구 결과에 따르면, 1815년 인도네시아의 탐보라 화산 폭발의 규모보다 컸고, 공기 중으로 방출된 황의 양은 4500만톤, 화산재는 상공으로 500km 솟은 뒤 반경 600km 지역을 3일 동안 뒤덮었으며, 약 8만명이 사망하고 지구의 기온을 1도 정도 낮췄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이듬해 미국과 유럽까지도 여름이 오지 않아 곡물생산에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그리고 또 한 가지 제기되었던 가설로는 당시 백두산 폭발과 발해의 멸망과도 관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거란의 요사에서는 발해를 공격한 지 10일만에 926년에 발해가 멸망하였다고 기록되어있지만, 그것은 100% 사실이라고 믿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의 역사에 의하면 발해가 멸망하였다고 하는 해인 926년 이후 930년대에도 지속적으로 일본에 발해의 사신이 방문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고려사>에도 934년 발해의 태자 대광현이 수만명을 이끌고 고려에 투항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거란의 요사가 이후 400년이나 이후에 기록되었기에 그 연대가 정확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발해가 고구려인, 거란, 말갈의 다민족국가였기에 내부적인 문제가 발생했다고는 보이고 그로 인해 혼란의 틈을 타 거란이 침입하여 도성을 함락시켰던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그러나 당시 거란의 태조인 야율아보기는 정복 후 땅을 차지하지 않았고, 돌아오다 사망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볼 때 침입하여 오랜 전쟁을 했다고 볼 수 있고, 결국 발해의 태자 대광현이 고려에 투항했던 934년에 지도층들이 완전 분열된 것으로 보이고, 이후 얼마지 않아 백두산이 폭발하면서 국가가 와해되어 최종적으로 멸망한 것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멸망의 주 원인이 백두산 폭발은 아니었겠지만, 마지막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의심해 볼 수 있는 사안이라고 봅니다. 이후로도 1413, 1597, 1668, 1702, 1898, 1903년에 분화했다고 Vocano Discovery 분화기록에 나와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도 백두산 아래에 존재하고 있는 마그마의 양은 1256제곱킬로미터로 서울시 면적의 2배에 달한다고 합니다. 백두산이 폭발하게 되면....생각만 해도 두려운 일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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