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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린 이유는?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영국이 15세기부터 식민지로 삼았던 지역들,British Empire(브리튼 제국)은 15세기 대항해시대에 20세기까지 식민지를 건설했고, 이 때 대영제국의 통치 지역은 세계 역사상 가장 큰 영토였죠.위 지도에서 보듯이 전세계 어느 지역에나 식민지가 있었기때문에,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렸죠.1921년에는 당시 전 세계 인구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4억 5천 8백만 명의 인구,지구 육지 면적 1/4에 해당하는 대략 35,500,000 평방킬로미터의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그러나 세계대전을 두 차례 치르면서 대영제국은 사라졌고, 영국연방이 되었으며, 식민지들은 독립했죠.마지막으로 홍콩이 반환되었고,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전쟁도 겪었죠.그러나 여전히 영국의 영토들이 세계 곳곳에 남아있습니다.영국 영토만 아니라, 영국 왕실의 영토도 3개나 있죠.14개의 해외영토영국령 인도양지역, 사우스조지아 사우스샌드위치 제도, 영국령 남극지역, 케이맨제도, 세인트헬레나, 핏케언 제도, 앵궐라, 몬트세렛,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 지브롤터, 터크스 케이크스 제도, 버뮤다가 있고, 이 모두를 합쳐도 인구가 25만이 되지 않기때문에, 이 지역은 독립을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영국령 지역들은 영국 정부로부터 자치권을 부여받아 행정이 유지됩니다.왕실령은 영국 국왕에게 소유된 영토인데, 채널 제도, 맨섬으로 영국의 주변에 흩어져 있는 섬입니다.케이맨제도는 자치권을 가지고 있어서 영국령으로 분류되지만, 왕실령이라고 표기되기도 합니다.조세피난처로 유명한 곳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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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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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나라나 자기만의 신화를 가지고 있는것 같습니다.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건국신화는 기록된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다.단군신화 역시 고려의 승려였던 일연이라는 분이, 아마도 고려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기록을 남겼을텐데요.이분은 승려이지만, 보각국사(普覺國師) 지위에 오른 분이죠.역사적 배경은 몽골의 고려 침공인 것 같습니다.고려는 원나라의 속국이나, 식민지로 편입되었던 시기라고 볼 수도 있을텐데요.이렇게 되면, 나라를 완전히 잃어버릴 수도 있죠.그래서 원나라와는 다른 고려의 역사적, 지역적 독자성과 문화적 우수성을 강조하기 위해 건국신화를 기록한 것입니다.특히 고조선을 고려 왕조의 기원으로 보고, 단군 조선(檀君朝鮮)으로부터 삼한(三韓)과 삼국을 거쳐 고려에 이르는 역사를 설정했죠.질문자님의 질문대로, 단군신화가 우리 민족에게 주는 교훈 중 가장 큰 부분은 우리는 원나라가 아니란 것입니다.침략 당한 나라로서, 홍익인간, 재세이화를 강조하는 것은 방어적 요소가 강해 보입니다. 호랑이가 아닌 곰도 수사학적으로 공격적이지 않고 방어적이죠.여기에, “바람의 신[風神], 비의 신[雨神], 구름신[雲神]등을 거느리고는 곡식과 목숨과 질병과 형벌제도와 선악의 구별 등을 다스리면서 인간세상의 삼백예순 일들을 갈무리하였다.”고 하는 기록은 제국을 거부하고, 일반 시민들을 위한 정치를 중요하게 생각해야한다고 강조함으로써, 원제국화에 대한 거부를 드러냈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이후로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를 침공한 적이 없고, 방어적이었으며, 시민을 위한 정치가 우선되어야한다는 의식이 강하게 되었다고 하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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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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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로마 신화는 어떻게 전해지는 건가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글이 있었죠. 헬라제국을 형성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소아시아, 이집트, 아케메네스 왕조, 그리고 지금의 파키스탄 변경(당시 인도)까지를 병합하고 중국으로도 제국을 확장하려고 했으나, 부하들의 반대로 제국확장을 그만 두었죠.알렉산더가 헬라제국을 확장한 이유는 바로 그리스문명의 확산이 그가 할 소명이었기때문입니다.그의 스승은 아리스토텔레스로, 아버지 필리포스가 그를 가르치도록 했습니다.그리스어로 가장 오래된 문학작품은 기원전 8세기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죠.동시대에 헤시오도스도 '신통기', '노동과 나날'을 남겼고, 여기에 그리스신화와 관련된 신들의 서사가 등장합니다.그리스신화를 채용한 로마신화는 로마제국 초기에 존재한 신화는 아닌 것 같습니다.로마시민은 신을 믿지 않았습니다.위대한 정쟁 영웅을 신으로 묘사했죠.최초의 로마 전쟁영웅 신격화는 '시이저(Gaius Julius Caesar)'겠죠.기원전 42년 원로원을 그를 신으로 Divus Caesar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그러나 이후 로마제국이 국교로 정한 기독교는 신화를 모두 파기해 버렸기때문에, 그리스신화도 자취를 감추죠.그리스 로마 신화는 중세시대가 마감되는 르네상스를 여는 시기에, 고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복고풍이 유행하면서 각 분야에서 그리스신화를 자주 인용하게 되었죠.로마신화는 이런 시기에 중복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그런데, 우리가 읽고 있는 그리스로마신화는 19세기가 되어서야 편집된 내용입니다.19세기 미국의 교사이자 작가인 토마스 불핀치가 편집한 것이죠.편집이기때문에, 고대 그리스인들이나, 로마인들이 전수했던 내용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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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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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이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 건국한 연대가 언제인가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단군 건국 년도는 단기라고 기록하고,서기 보다 2333년이 앞서기 때문에,BC 2333년이라고 할 수 있고,단기계산이나 지금부터 몇 년 전이었는지를 계산하려면,서기 + 2,333년 하면 됩니다.지금이 2023년이니,2023 + 2,333 = 4,356년즉 단기 4356년 또는 4356년 전에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했다라고 말하면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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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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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탄 이라는 나라는 왜 불행한 나라로 전락했나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와 UN 국가별 행복지수로 비교해 보면,부탄이 우리나라보다 행복지수가 높았던 적은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2010년, 영국 런던에 있는 신경제재단이 지구촌행복지수를 발표했는데, 부탄이 1위를 했습니다.신경제재단의 지구촌행복지수를 측정하는 지표는 삶의 행복, 환경오염, 기대지수로, 국가총생산보다 생산을 위한 자원을 얼마나 적게 투입하느냐로 지수를 측정했습니다.부탄에 살고 있는 분들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지수가 높으려면, 산업을 활성화시키지 않아야 하는 셈이죠.부탄은 자체 행복지수도 만들었습니다. GNH(Gross National Happiness)로 얼마나 행복하다고 느끼느냐를 설문한 것입니다.이렇게 2010, 2015년에 통계조사를 한 후,행복하다는 사람은 더 행복하게,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을 느끼도록 국가 정부가 만들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그래서 지구상에 가장 행복이라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나라로 부탄이 생각되도록 했죠. 그러나 UN이 조사한 국가별 행복지수에서는 부탄은 100위 근처에 있었고,위 도표에서 보듯이 부탄 국가 정부는 이 조사에 응하지 않고 있습니다.질문자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부탄이 행복에 젖어 있었던 적도 없고, 가장 불행한 나라가 된 적도 없습니다.그냥 조사 방식이 다른 통계를 잣대로 사용한 것을 일직선상에 놓고 보았기때문입니다.부탄의 백성들은 왕과 함께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질문자님이 부탄에 가서 그 나라 백성이 되어 살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면, 질문자님의 관점에서는 그 나라는 행복한 나라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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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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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보다가 민며느리에 대해나오던데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한자로 '豫婦'예비신부네요^^10살쯤된 여자아이를 미리 데려다가 키우고,혼인할 나이가 되면, 자기 집으로 돌려보내 혼인준비를 하도록 하고혼례를 치르는 경우로,주로 가난한 집안의 여자 아이가 조금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집으로 민며느리가 되는 경우가 있었다고,'옥저'의 풍습으로 기록되어 있는 제도네요.'민'은 미리의 줄임말, 밀이 며느리와 결합되면서 발음이 민으로 변한 것이 아닌가 하더군요.그러니까 '미리 며느리'라고 보면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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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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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중동,인도 사람들이 쓰는 히잡이나 부르카는..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머리에 미사포(천주교 여성이 미사를 드릴 때 머리에 쓰는 천)를 쓰는 것은 이슬람 경전 꾸란이 나오기 전부터 있었던 관습이었습니다.그런데 꾸란에는 "여성은 가족 앞을 제외하고는 베일을 써서 몸을 가려야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정확하게 어느 부위를 가려야하는 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기때문에,부르카는 가장 보수적인 이슬람 윈리주의자들에 의해,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두 가리고 눈마저 망사로 처리된 천을 사용합니다.부르카를 착용하는 나라는 아프가니스탄과 이집트 베두인족이 있고, 이들은 푸른색이나 검은색 천을 사용합니다.니캅은 눈 아래 얼굴을 가리는 수준인데, 히잡을 머리에 쓴 상태에서 눈 아래에 천으로 가린 것입니다.파키스탄, 모로코에서 사용된다고 하네요.히잡은 머리에 쓰는 두건으로 히잡이라는 단어가, 아랍어로 '가리다', '격리하다'의 의미가 있다고 하네요.히잡은 큰 수건 모양으로 머리에서 상체로 늘어뜨린 상태로 착용합니다.튀니지와 북아프리카, 시리아에서 사용하는 방식이라네요.차도르는 이란어, '덮는다'란 의미의 단어라고 합니다. 이란에서 사용하는 망토형 베일인데, 검은색이 대부분이죠.질문자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종교적인 의미 이전에, 사막 모래바람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방식이었을 것입니다.그러나 천주교는 미사포에 의미를 부여했는 데요.바로 고린도전서 11장 3-5절과 7절에,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고, 여자의 머리는 남편이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여기 보면 여자가 머리에 미사포같은 것을 쓰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남편을 머리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듯한 의미로 해석하는 데요.그 당시 시대상을 표현하는 말이겠죠.이후 꾸란에는 여성은 완전히 외부인에게 자신의 신체의 모든 부분을 보여주지 않아야된다는 의미가 도입이 되었네요.그러나 시대가 변했으니, 여성인권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죠.현재 이란에서는 히잡시위가 이어지고 있고, 이슬람국가들의 여성들이 동조하고 있습니다.아주 얇은 천으로 베일을 만들거나, 아바야(학생들의 교복이나, 전통의상)를 몸매가 잘 드러나게 입는 것이 유행이고,이에 대한 원리주의자들의 테러도 있었죠.뭐든 강제한다는 것은 강제하는 쪽에서도 잃을 것이 많은데요.탈레반(학생이라는 뜻)이 정권을 잡은 아프가니스탄은 심지어 여성에게는 대학 수업을 받지 못하게 하는 규정도 발표했죠.원리주의자들이 강제조항을 만들면, 그에 못지 않게 원리주의자 자신들도 일상에서 금지되는 것이 많고,일상생활에서 원리주의자들도 지켜야할 금기들이 많죠.서로를 이렇게 강제하게 되는 것이 사회 전반의 흐름을 왜곡하기때문에, 이제는 자유롭게 자신이 선택하도록 허락하는 방향으로 바뀌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참고로,천주교에서도 아직 여성은 신부님의 성경책이나 미사에 쓰는 도구를 뒤따르는 복사(남자 아이)를 하지 못하고 있는데요.미사에서 집전하는 이들은 남성만으로 구성되어 있기도 하죠.인습은 참 오랫동안 원리주의자들 자신도 억압하는 무서운 규정인 것 같습니다. 부르카와 히잡, 미사포 등 이런 차별은 규정을 없애고, 여성에게 자유롭게 선택하게 할 시대가 온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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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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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나눌때 광역시가 되기위한 조건은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 6개의 광역시 인구가 백만명이 넘는군요.광역시가 되기 위해 주변의 지역을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보면,인구 백만명을 기준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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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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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를 통일한 왕은 누구인가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김춘추는 태종무열왕이고 즉위한 지, 8년만에 AD661년 59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문무왕은 김춘추와 문명왕후(김유신의 둘째 누이)의 맏아들로 이름은 법민(法敏)입니다.그는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죽자, 왕위를 계승하여 문무왕이 되었습니다.그는 아버지가 생존해 있는 660년에 백제를 정복했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왕위에 올라, 668년 고구려를 정복했으며,나당전쟁에서 당나라군대를 격퇴하여 676년에 삼국통일을 이루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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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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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잖아요? 기독교는 왜 일요일에 예배 하나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 일요일이고, 그 날을 기념한다는 의미에서 '주의 날', '주일'이라고 기독교에서 부르네요.초기기독교가 예수님의 부활하신 요일에 예배했다고 할 수는 없고,가정에서 사람들이 모일 수 있으면 언제든지 모였던 것 같습니다.공동생활을 하는 그룹들도 있었다고 하네요.지금 수도원을 생각해 보면 비슷한 방식이 있었겠죠.당시 유대인들이 살던 이스라엘을 비롯한 팔레스타인 전역이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때문에,로마황제가 기독교인들이 황제숭배를 하지 않았기때문에 핍박을 했고, 정상적 생활이 어려워 외딴 곳에서, 또는 무덤으로 사용되던 깊은 굴 속 같은 곳에 집단생활도 했죠. 그런데 동로마가 기독교를 인정하고, AD313년에는 서로마도 기독교를 인정해 줍니다.이렇게 되자, 로마제국 시민들의 80%가 기독교인이었다는 통계도 있네요.아마 로마제국과 기독교의 교황 사이에는 일요일을 예배하는 날로 정하는 것이 서로에게 편리했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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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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