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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이지란은 여진족으로 알고 있는데 어떤 연유로 조선인이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최초에는 건주여진족 부족장의 아들 출신이었습니다.아버지의 뒤를 이어 원나라의 천호라는 직위를 수행하였는데 원나라가 약해지고 망할 기미를 보이자 고려에 1백기의 병사와 함께 귀순합니다. 당시 이성계가 있는 지역으로 귀순하였는데 그때 이성계를 만나 다툼이 생겼고 서로 활로 내기를 하다가 이성계에게 활솜씨에서패배를 인정하고 의형제를 맺게 되고 그 이후 이성계를 형님으로 모시면서 많은 전투에서 공적을 세웁니다. 이성계를 끝까지 따라 다녔고조선의 건국에도 큰 역할을 하게 되고 이성계에게 무한 신뢰를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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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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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에게 제거 당한 김종서는 장군으로 쓰는 어떤 업적을 세웠나요 군사적으로?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종서 장군은 문관 출신이었지만당시 조선에서는 문관 출신이 군사를 이끌고 공을 세웠던 적이 많이 있습니다.김종서 장군의 별명은 백두산 호랑이로 세종의 명을 받아 지금의 함경도 일대의 여진족들을몰아내고 그곳에 4군 6진을 설치하고 조선의 땅으로 병합하여 버립니다. 조선의 영토를 넓힌 공이큰 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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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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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는 여진족이라는 썰이 있더라고요 이런 주장을 하는 근거가 있는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그의 아버지인 이자춘이 고려시대 쌍성총관부 소속 장군이었고 그곳에서 이성계도 아버지 밑에서 전장을 누볐고 쌍성총관부가 당시는 원나라 령이었지만 그 지역에 여진족들이 많이 살았고그지역의 여진부족들과도 어우러져 지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의형제 이지란 장군도 여진족 출신이고 그곳에 오래 살았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이 나오는 것이지만 족보를 따라가 보면 전주지역의 고려의호족이었다고 합니다. 지방관리의 미움을 사서 도망치다 보니 여진족이 사는 지역까지 와서 정착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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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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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을 성군이라 할 수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은 성군이라고 할 수 는 없습니다.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물론 건국초기 나라를 안정시키려고 하였다는 명분은 있지만자신의 반대파를 너무 많이 숙청하였습니다. 정몽주, 정도전 일파를 다 죽였고 자신의 처가와 세종의 처가를 너무 말도 안되는누명을 씌워서 제거합니다. 물론 조선이 안정되고 세종이 나라를 잘 다스리려면 왕에게 대항하는 권신들이나 외척들을 제거해야 한다는명분이 있지만 굳이 죽였어야 했나라는 아쉬운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후계자 수업을 잘했고 왜구가 조선의 해안을 괴롭히자 이종무 장군을필두로 대마도 정벌을 단행한 것은 강력한 왕권이 아니면 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부분은 속시원하고 잘한 업적이라고 생각합니다.하지만 공도 있지만 과가 컸던 왕이였다고 평가하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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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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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는 왜 요동 정보를 하지 않고 위화도회군을 하였나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당시 명나라가 생긴지 얼마되지 않아 북원과의 세력 다툼으로 요동의 군사력이 약했던 것은 사실입니다.하지만 우리가 요동을 정벌하려 하면 명나라 주원장은 가만있지 않을 것이고 명나라와 전면전이 벌어지면자원이 부족한 조선의 피해가 클 것이고 이성계도 전투의 승리에 확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위화도에 들어섰는데비가 너무 많이 와서 활이 못쓰게 되었고 그렇다고 요동정벌에 실패하면 자신에게 돌아올 실패에 대한 책임이 컸을 것입니다.만약 이성계가 자신의 가별초 등 신진사대부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면 회군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반역행위니까요하지만 대부분의 신진사대부가 이미 이성계의 편이었고 자신이 이끌고 온 군대의 지도부도 이미 이성계 장군을 따르기로 다짐 한 상태였으므로 요동정벌로 죽임을 당하느니 개경으로 돌아와서 정권을 잡자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아마 이성계 장군도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고정치적 판단도 했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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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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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원나라 침략기에 여러가지 풍습을 전해 주었는데 어떤 풍습을 원나라에 전해주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원나라에 전해 주었다기 보다는 당시 원나라는 유목민족이었기에 문화적 수준이그렇게 높지 못하였습니다. 당시 대몽항쟁이후 원의 간섭으로 공녀 및 공물을 원나라에 보내게 되는데 이때 고려의 문화수준은몽고족 보다 높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의 옷이 몽고족의 옷 보다 세련되어 보여 의복문화가 전파 되었고 고려 만두, 떡 등 음식문화가 전파되어 원나라가 즐겨 먹었는데 이러한 부분을 고려양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늘날 한류와 비슷하나 현재의 한류는문화의 전파 속도가 더빠르고 광범위하다고 생각하고 이때는 아픈역사의 어쩔수 없는 문화교류로 고려의 문화중 우수한 부분이원나라에서 어필을 한 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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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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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은 정말 혁명인가요 아니면 시대의 흐름을 잘 못 읽은 오판인가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백성들이 나라를 위해 그리고 자신들의 삶을 위해 들고 일어난 혁명이라고 생각합니다.외세의 개입이 없었다면 성공했을 것이고 조선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외세를 불러드린 것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세력이었습니다.어떻게 자신의 백성들을 상대로 외세를 끌어들어 무참히 학살 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되는 부분입니다. 그들이 요구한 것은 살 수있도록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탐관오리가 판을 치고 조선조정은 강대국들의 세력다툼에 놀아놔고 그가운데 백성들은 세금으로 모든 것을 다빼앗겨 버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위해 전주화약을 맺고 자진해산한 동학농민운동의 정신은 숭고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는조선왕조가 그 운명을 다했고 아래로 부터의 혁명이 반드시 필요했다고 봅니다. 명성황후 및 민씨 세력은 그들의 기득권만을 지키기 위해백성은 어찌되든 생각을 안했던 위인들로 보입니다. 제 개인적인 사견입니다. 고종이 중심을 잡았어야 했는데 너무 휘둘렸습니다.고종이 동학농민군의 이야기를 조금만 더 들어주고 같이 힘을 합해서 외세에 대항했으면 어땠을까 지더라도 한번 크게 싸우고 지면억울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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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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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공민왕의 죽음에 관한 것은 조선 건국 세력이 역사를 조작한 것이 아닐까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공민왕이 홍륜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당시 고려조정의 권력은 이인임 등 권문세족에게 있었습니다. 이성계, 정도전 등의 급진개화파는 아직 고려조정에 세력을 이루지도 못하였습니다. 공민왕이 자신의 왕비의 죽음 후 마음이 너무 약해져서 실정을 한 듯 한데 그것에서비롯된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권력을 차지하고 싶었다면 당시의 권문세족인 이인임 세력이 주가 될텐데 공민왕사후 그들은 공민왕의 아들인 우왕을 섬겼고 왕위에 올렸습니다. 조선의 건국세력이 조작했다기에는 시기가 조금 맞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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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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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시대 유목민들은 공통적으로 전투력이 강해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하던데 그 원동력이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유목민족들은 말을 잘 다루고 어렸을때 부터 말을 이용하여 생활하였기 때문에말 위에서 검이나 활을 잘 씁니다. 당시는 현대와 같이 전차가 없었기 때문에 중세유럽도 그랬고 동양도 그랬고 기마병이전차의 역할을 했습니다. 즉 대열을 흩트려뜨리고 적의 중심부를 공격하여 와해시킵니다. 그들 부족이 서로 다투고 나누어져있을때는 그힘이 약하지만 그 기마병이 군단을 이루면 그 시너지효과는 커지고 그것을 막는 부대는 공포의 대상이 됩니다.강한 기동력으로 달려와서 창과 검으로 내리치면 파괴력이 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근 만주족과 같은 경우는 명나라에게홍이포 기술까지 빼앗아 명나라와 대등한 화력으로 그들을 공격하였습니다. 기마전술에도 밀리는데 화력까지 대등하게 되면전투는 패배하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작은 유목민 부족이 통일되면 엄청난 힘을 자랑하게 되고 그 기동력과 파괴력을 바탕으로강력한 전투력을 가지게 되고 농경문화를 정복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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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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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이 오랫동안 고려를 굴복시키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몽항전 시기에 고려는 최우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최우는 최충헌의 아들로서 완벽하게 당시 고려의 황제인 고종을 장악하고 있었고 철두철미한 자였습니다.그는 몽골군이 공격할 기미를 보이자 고려 조정 전체를 미리 강화도로 이동하고 황제가 지낼 왕궁까지 세웁니다.그리고 모든 조세는 해운으로 강화도로 받습니다. 그리고 육지의 장군 및 백성들에게는 결사항전의 의지를 보내고그들을 독려하고 지원합니다. 그의 기대에 부응하여 곳곳에서 몽골군을 물리쳤고 특히 처인성과 충주성에서 김윤후 장군이보여준 무공으로 몽골군은 총사령관 살리타이가 사망하는 등의 타격을 입게 됩니다. 그리고 몽골군은 해전을 경험해 보지 못하여해전에 약하여 그것을 고려군이 노렸고 일부러 섬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바다라는 장애물에 의지하여 고려는 30년간 대몽항쟁을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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