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는 왜 요동 정보를 하지 않고 위화도회군을 하였나요
이성계장군이 우리 역사의 좋은 기회를 놓친 것 같은데 위화도회군을 단행하여 요동이라는 넓은 영토를 확보는 것에 실패를 했다고 봅니다 이성계장군이 위화도회군을 단행한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그때 날씨와 기후 탓이라 하는데 이성계는 승산없는 싸움과 죽음을 두려워하여 회군하여 반역을 한 것이라 판단 됩니다.
안녕하세요. 조사를 해본 결과 이성계 장군이 위화도회군을 단행한 이유는 위화도군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고자 했던것 같습ㅈ니다. 위화도는 조선과 일본 사잉에 무역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지점으로 여겨졌기에 위화도를 확보함으로 경제적 이익을 확대하고자 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밖에 위화도를 본격적으로 정착해 침입에 대비하고자 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요동정벌이 단행될 때 수문하시중 이성계는 4불가론을 들어 반대했으나 우왕과 최영이 강력하게 주장해 실행되었고 이에 따라 고려에서는 8도의 군사를 징집하는 한편, 세자와 여러 비들을 한양산성으로 옮기고 찬성사 우현보로 하여금 개경을 지키게 한 뒤 우왕과 최영은 서해도로 가 요동정벌의 태세를 갖춥니다.
이해 4월 우왕이 봉주에 있으면서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임명하고 창성부원군 조민수를 좌군도통사로 삼아 서경도원수 심덕부, 서경부원수 이무, 양광도도원수 왕안덕, 양광도부원수 이승원, 경상도상원수 박위, 전라도부원수 최운해, 계림원수 경의 등을 소속시켰고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안주도도원수 정지, 안주도동상원수 지용기, 안주도부원수 황보림, 동북면부원수 이빈 등을 소속시켜 좌,우군을 편성하였습니다.
곧이어 우왕과 최영은 평양에 머물면서 독전하고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끄는 와주군은 10만 대군을 자칭하며 평양을 출발해 다음 달 위화도에 둔진합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도망치는 군사가 속출, 큰 비를 만나 압록강을 건너기 어렵게 되자 이성계는 이러한 실정을 보고하면서 요동정벌을 포기할 것을 요청하나 우왕과 최영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요동정벌을 독촉하자 결국 이성계는 조민수와 상의 후 회군을 단행합니다.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시 명나라가 생긴지 얼마되지 않아 북원과의 세력 다툼으로 요동의 군사력이 약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요동을 정벌하려 하면 명나라 주원장은 가만있지 않을 것이고 명나라와 전면전이 벌어지면
자원이 부족한 조선의 피해가 클 것이고 이성계도 전투의 승리에 확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위화도에 들어섰는데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활이 못쓰게 되었고 그렇다고 요동정벌에 실패하면 자신에게 돌아올 실패에 대한 책임이 컸을 것입니다.
만약 이성계가 자신의 가별초 등 신진사대부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면 회군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반역행위니까요
하지만 대부분의 신진사대부가 이미 이성계의 편이었고 자신이 이끌고 온 군대의 지도부도 이미 이성계 장군을 따르기로 다짐 한 상태였으므로 요동정벌로 죽임을 당하느니 개경으로 돌아와서 정권을 잡자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아마 이성계 장군도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고
정치적 판단도 했다고 생각됩니다.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위화도회군
위화도회군이란 1388년(우왕 14) 5월 요동정벌에 나선 우군도통사 이성계가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서 군사를 회군한 사건이다.
원인
우왕 즉위 뒤 고려의 외교는 친명에서 친원으로 바뀌어, 고려·명나라 관계가 악화되었다. 1388년 3월 명나라가 쌍성총관부 관하지역을 영유하기 위해 철령위 설치를 통고하자, 고려에서 최영이 중심이 되어 명의 대 고려 전진기지인 요동정벌론이 제기되었다. 이에 우왕은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삼아 평양에 나아가 독전하게 하고 조민수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정벌군을 이끌고 출정하게 하였다.
경과
요동 출정은 본래 이성계의 본의와 소원은 아니지만 출정군은 음력 4월 18일 평양을 출발하여 음력 5월 7일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 진주하였다. 때마침 큰비를 만나 강물이 범람하고 사졸 중 환자가 발생하게 되자, 이성계는 군사를 더 이상 진군시키지 않고 좌군 도통사 조민수와 상의, 요동까지는 많은 강을 건너야 하는데 장마철이라 군량의 운반이 곤란하다는 등 4가지 불가론을 왕께 올리며 회군을 청한다.
그러나 평양에 있는 팔도 도통사 최영과 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속히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래도 이성계 등은 또 한 번 평양에 사람을 보내어 회군시킬 것을 청하고 허락을 구하였으나 평양에서는 역시 이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일이 이에 이르자 이성계는 마침내 회군의 뜻을 결심하고 드디어 음력 5월 22일 회군한다.
이 돌연한 회군에 왕과 최영은 당황하여 평양에서 송도로 급히 귀경하여, 이성계군에 급히 반격하였다. 그러나 최영은 회군 9일 만인 음력 6월 1일에 개경에 당도한 이성계에게 잡혀 고봉현(고양)에 귀양 보내졌으며, 우왕은 강화도로 추방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