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튼실한집게벌레137
튼실한집게벌레13722.08.08

고려말 위화도 회군에 대해서 ...

고려말에 공민왕이 요동정벌을 위해 출병했을때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안했으면 역사가 어떻게 됐을까요.

자신의 주장을 말씀해 주세요. 정말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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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시는 원나라가 쇠퇴하고 명나라가 중국의 전체를 장악해가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고려의 군이 출병한 이유는 이러한 명나라가 과거 원나라가 쌍성총관부를 세워 관리하던 철령 이북의 땅을 내놓으라고 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곳에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겠다는 의도였죠. 하지만 당시 군부의 실권자였던 최영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여 당시 왕이었던 우왕(공민왕)을 설득하여 요동을 먼저 치자고 하며 전쟁으로 맞서게 됩니다.

    당시 이성계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쳐서는 필패하므로 안되며, 여름이라 농번기이므로 군사를 모으기가 어렵고, 지금 많은 군사를 이동시키면 남으로 왜구가 쳐들어올 가능성이 크며, 여름에 장마가 지면 덥고 습해 전염병이 창궐할 가능성이 높다는 4가지 불가론을 세워 전쟁을 반대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최영은 군부의 실권자이자 왕권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뜻대로 요동정벌에 나서게 됩니다. 이 때 자신이 8도 도통사가 되고, 좌군도통사에 조민수, 우군도통사에 이성계를 선봉으로 하여 진격하게 됩니다. 위화도에 도착한 이성계는 압록강이 불어났다는 이유로 2주를 지체하게 되고 회군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성계는 반드시 회군을 해야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조민수와 논의하여 회군을 결정하였고, 황명과 최영의 명을 어겼으므로 죽임을 당할 것이 뻔하다고 생각한 그들은 개경을 공략하여 우왕을 폐위시키고, 최영을 유배 보낸 뒤 죽여버립니다.

    이후 우왕(공민왕)의 아들로 창왕을 세우고 함께 역모를 한 조민수와 권력 대립하다 조민수도 유배를 보내게 만들고 창왕도 폐위한 후 공양왕을 세우게 됩니다. 그러면서 과거 최영이 가졌던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고, 이러한 권력이 결국 조선 건국의 초석이 됩니다.

    만약 회군을 하지 않았더라면, 당시 기세가 등등했던 명나라 군사에 맞서 오랜 전쟁 끝에 고려는 패배해 항복을 했을 것이고, 원의 영향력에 있었던 것처럼 명의 영향력 아래에서 힘없는 고려왕조가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전쟁에서 많은 가병들과 힘을 잃어 이성계와 그의 가문도 역모를 꾀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원래부터 건국을 꿈꾸고 있던 이성계와 그의 가문으로서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선택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로 인해 만약 이성계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건국의 주축세력이고 브레인이었던 정도전은 다른 세력을 끌어들여서라도 자신이 꿈꾸던 나라를 건국하기 위한 일을 지속적으로 해나갔을 거라고 봅니다. 이성계도 건국을 꿈꾸었고, 정도전도 건국을 꿈꾸었으니 둘은 서로가 서로를 이용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였고, 정도전은 성리학의 나라를 건국하게끔 하였습니다.

    둘다 목적은 달성하였다고 할 수 있고, 위화도회군이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군부를 끌어내리고, 학자들이 주축이 되는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시도는 계속되어 언젠가는 조선과 비슷한 나라가 세워졌을 거라 생각됩니다.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 분야, 재무설계 분야, 인문&예술(한국사) 분야 전문가 테스티아입니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지 않았다면 조선이라는 국가의 건국도 없었을 것이고, 사실상 발흥하던 명나라에게 한반도 전체가 흡수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즉, 이렇게 되었다면 사실상 현재의 한반도는 '중국'의 영토 중 일부로 남았을 가능성도 배제 못합니다.


  •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육아·아동전문가입니다.

    역사에서 가정은 없고 무의미할 수 있지만, 왜냐하면 역사학은 과거의 사실을 연구 대상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상상을 한다면 고려 왕조는 더 오래 지속되었을 것입니다. 공민왕의 개혁 정책은 더 강하게 추진되고 친원파는 제거되고 개혁파를 등용하며, 온건한 개혁이 지속되면서 고려 사회의 모순을 완화시켰을 것입니다. 사대부와 신흥무인은 분열되고 온건사대부는 제도권에 들어가고 급진사대부와 이성계를 비롯한 신흥무인층은 제거되고 최영 등 고려 왕조를 지지하는 무인층은 승승장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긴 시대적 관점으로 보면 결국 고려의 모순이 심화되어 조선은 아니더라도 새 왕조가 들어설 가능성은 컸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