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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4.27

병자호란 이후 인조와 소현세자의 사이와 갈등

병자호란 이후 삼전도의 굴욕 겪고나서

인조와 소현세자의 사이가 왜 안 좋아진것인가요?

그리고 실제로 인조가 아들인 소현세자를 독살하라고 지시한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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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2개의 답변이 있어요!
  • zudaish
    zudaish23.04.28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소현세자가 청의 심양에 있을 당시 청나라 사람들과 무역을 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는 내용과 귀국 후 곧바로 죽은 사실을 기록함으로써세자의 죽음에 인조가 상당한 관여를 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특히 실록에서조차 약물 중독을 언급할 정도로 독살설의 의혹이 제기되었다.

    실제 인조는 세자의 장례도 서둘러 마쳤고, 가장 중요한 후계 문제에 있어서도 특별한 결정을 내린다.

    당시 소현세자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지만 인조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세손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는 없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결국 인조의 둘째 아들이자 소현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후의 효종)을 후계자로 지목한 것이다.

    이것은 정상적인 왕위 계승의 원칙에 어긋나는 방식으로서 인조가 소현세자를 극도로 불신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후대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게 한 영조조차도 왕위는 세자의 아들인 정조에게 물려준 것만 보아도 인조의 조처는 파격적임이 분명하다. 왜 소현세자는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일까? 그 비밀의 열쇠는 소현세자가 보낸 심양에서의 8년 간의 생활에서 그 단서가 찾아진다.


  •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병자호란 삼전도의 굴욕 이후에는 부자사이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습니다.

    인조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전쟁실패로 내 아들이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게 되었으니 아버지로써 마음이 썩 편안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소현세자가 심양에 있는 동안 그의 기록을 보고 받으면서 갈등의 씨앗이 커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홍타이지가 인조와 소현세자를

    비교하면 자꾸 거슬리게 하면 소현세자를 왕으로 봉해 버리겠다라는 협박도 근근히 했구요. 거기에 소현세자가 오랜 볼모생활을 마치고

    궁궐에 돌아왔는데 서학(천주교)를 배워서 서양문물을 가지고 돌아온 것입니다. 청나라라면 이를 갈고 있던 인조 입장에서는 아버지를

    이렇게 모욕을 준 청나라의 문물을 배워오다니 하는 괘씸한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거기서 두사람의 갈등이 커졌고 그 갈등이 깊어진 것입니다. 인조가 아들인 소현세자를 독살 한 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럴수도 있다고 추측한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