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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는 왜 고대국가의 단계 가지 못한 건가요?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부여가 연맹국가에 머물렀고 왜 고대국가 단계에 가지 못했는지 정확한 원인에 대한 자료가 부족합니다. 부여의 경우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을 받아 왔고, 494년에는 고구려에 합병되면서 멸망했는데요. 부여가 언급이 적은 이유는 아무래도 부여 자체가 남겨놓은 역사적 기록들이 부족하기 때문에 정확한 부여 역사를 언급하지 어려웠으리라 추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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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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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는 어떤 인물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알렉산더를 말씀하는 것일까요? 마케도니아의 왕인 알렉산더 대왕은 매우 짧은 기간에 지중해 동부, 이집트, 중동 및 아시아 일부를 정복한 것으로 매우 유명한 역사적 인물입니다. 그의 제국은 정복한 땅에 많은 주요 문화적 변화를 가져왔고 지역 역사의 흐름을 바꿨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 자치령 전체를 정복하여 제국을 인도로까지 확장하는 등, 고대 역사에서 다른 어떤 군사적인 지도자보다도 더 많은 업적을 이룬 왕입니다. 알렉산더는 고대 역사상 가장 성공한 군인이자 제왕으로 인정받았는데요, 하지만 그의 통치는 매우 잔혹하고 폭군적이었으며 야심적이었고, 자신을 신으로 여기기도 했습니다. 그 정복으로 인해 지중해 국가와 페르시아 제국 및 일부 인도 지역은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것을 단 32년만에 성취한 유례 없는 군사 지도자입니다. 알렉산더의 제국은 왕 사망 당시 약 520만 제곱킬로미터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가진 당대 최대 국가였습니다. 아시아 여러 지역은 마케도니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이 지역 중 많은 나라가 다음 세기로 넘어가서는 그리스의 통치를 받게 되었습니다. 알렉산더 제국은 동서 지역간의 교류와 무역을 크게 증진시켰고, 알렉산더의 이름을 딴 수많은 도시가 세워졌으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고대 서쪽 문화적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였습니다. 알렉산더와 그의 업적은 당시 유럽 전체와 로마 통치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았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간주되며, 그의 군사 전략은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그는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장군 중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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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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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에 대해 몇가지 궁금한게 있어서요.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말로도 얘기되며 쾌락과 행복을 가져오는 행동은 옳고 고통과 불행을 가져오는 행위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윤리관입니다. 이 공리주의는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와 밀의 '질적 공리주의'로 나뉘어 볼수 있는데요. 이 차이는 결과를 바라보는 의견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양적 공리주의란 모든 쾌락이 질적으로 같다는 가정을 한 후 양의 차이를 중시하였습니다. 공리성의 원리를 도덕과 입법의 원리로 제시했으며 공공의 이익 원리에 부합하는 원리를 도덕의 원리로 제시했습니다. 질적 공리주의란 쾌락의 양만 따져서가 아닌 그 쾌락의 질적인 차이 역시 고려해야한다고 봤습니다. 어떤 종류의 쾌락이 더 가치 있는지를 따져봐야한다는 시선입니다. 불만족이 만족보다 더 나을수 있다는 것은 아마도 질적 공리주의의 주장의 경우 쾌락에도 질적 차이가 있기 때문에 하급 쾌락(식욕.성욕같은 1차원적 쾌락)을 과도하게 추구하면 오히려 비만이나 공허함 같은 더 큰 고통을 얻게 되므로 어느정도 불만족한 상태를 유지하는 편이 고급 쾌락(예술 자유 문화)을 추구하기는 것이 만족스러울 수 있다는 의미라고 여겨지네요. 질적 공리주의와 양적 공리주의는 완벽하게 다른 개념이 아니었고 양적공리주의로 시작된 이론이 발전되어 질적공리주의로 다듬어 진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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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23.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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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적이 나타난 이유가 뭔가요?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한나라 시절은 중국 후한 말기 인데요. 대부분 나라가 그렇듯이 나라가 오래 부강하게 유지되다보면 으례 그렇듯 한나라 역시 부패한 정치로 인해 백성들이 매우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배경에서 태평도라는 미신적 민간신앙이 나타가 현생을 구제한다는 교세로 크게 유행을 타게 됩니다. 이런 추세로 인해 교세가 커지고 조직화 되면서 군대의 형식까지 띄게 되고 교주였던 장각이 민중을 선동하려 정부를 무찌르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한다고 선동하게 되면서 일어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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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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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포르투갈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는 1580년에 포르투갈을 장악하여 포르투칼 땅을 이중 군주제로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역사도 그렇듯이 포르투칼 역시 외국 통제관이 포르투갈 국민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에 포르투 국민들의 분노가 수년에 걸쳐 쌓였고 이 결과로 포르투갈은 강력하게 독립을 원하게 됩니다. 포르투갈은 스페인 왕 필립5세에 의해 과세되고 있었고, 과세에 비해 포르투갈은 식민지취급을 당하며 적절하게 보호되지 않았습니다. 1640년 12월 1일 John 4세가 왕이 되면서 스페인으로부터 포르투갈의 독립을 주장하면서 포르투갈 독립 전쟁이 시작됩니다. 이 전쟁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리스본 조약에 서명한 1668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 협정에 따라 포르투갈은 자체 통치자로 남게 되었고 세우타 도시는 스페인에 주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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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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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종교라는 것은 언제 처음 전파가 된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에 종교라는 개념이 언제 처음 생긴건지 정확하게 알수는 없지만 인간의 역사는 항상 종교를 뗄수 없는 역사였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에서 항상 종교는 이미 있어왔기 때문인데요. 예를들어 현대에 정착된 기독교 불교 같은 종교가 아니더라도 삼국시대같은 경우 민간에 천신 일월신 해신 산신같은 샤머니즘이나 점술이 널리 퍼져있었습니다. 또한 고구려는 종교적 의식을 치뤘었고 백제 시대는 불교가 전해졌습니다. 불교는 그 이전시대에 인도에서부터 생긴 종교라고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에 종교가 처음 전파된 시기는 미정으로 남을거서 같습니다. 아마도 민간종교까지 하면 우리나라 역사와 함께 계속 됐을 것이고 가장 최조의 정식 종교를 불교라고 본다면 중국에서 전파되어 백제시대때부터 있었다고 볼수도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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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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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두 나라간의 긴장으로 인해 시작됐습니다.스파르타와 아테네는 고대 그리스 시절 당시 오랜 라이벌이었는데요. 그리스에는 다른 많은 도시 국가가 있었지만 이 두 국가가 가장 강력한 도시로 떠올랐습니다. 그들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반대성향이었는데, 스파르타는 전체 사회를 강력한 군대로 발전시키는데 집중하였고, 아테네는 주로 교육, 철학, 경제 건설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후 아테네가 더 많은 권력과 힘이 모이게 되면서 스파르타는 미래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두 지역의 힘과 점점 커지는 경쟁은 델리안 리그(페르시아 전쟁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짐)로 인한 긴장 고조로 인해 갈등이 본격화 되었습니다. 아테네의 권력은 델리안 동맹의 수장이 되었을 때 매우 커졌고, 스파르타와 다른 많은 도시 국가들을 긴장시켰습니다. 스파르타가 아테네의 권력에 도전하기 위해 동맹국을 모았을 때 전쟁이 발발했는데, 이는 아테네의 군사력을 고려할 때 위험한 선택이었습니다. 전쟁은 기원전 431-404년에 벌어졌고 전쟁 중반에 휴전도 했었찌만 이후 도시 국가들은 다시 분쟁에 휘말렸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지만, 전쟁 이후 그리스의 분열고 인해 마케도니아가 쉽게 그리스를 침략하고 정복하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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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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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안경의 최초도입은 언제 일까요?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도입된 시기는 당시 지봉유설 기록(1614년 이수광 편찬)을 참고할때 16세기 말쯤으로 추측됩니다. 이후 정조실록에서도 안경이 처음 생긴 시기에 대해 비슷하게 기록되어 있는데요. 우리나라에 도입된것은 중국을 통해서였을 것이고 당시에 '개화경' '애체'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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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3.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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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간은 어떤 인물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태조 이성계의 아들은 신의왕후 한씨의 넷째아들입니다.신의왕후 한씨의 소생은 6남2녀였는데, 진안대군(이방우) 정종(이방과) 익안대군(이방의) 회안대군(이방간) 태종(이방원) 덕안대군(이방연) 경신공주 경선공주 입니다. 회안대군이던 이방간은 태종 이방원을 질투했었다고 합니다. 문신이었고 1차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웠으나, 이후 2차 왕자의 난 때는 박포의 꼬임에 꾀어져 이방원과 등을 돌렸으나 패배하게 됩니다. 이후 죽을때까지 유배를 가게 됐으며 58세에 사망한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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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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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저리제도는 통일 신라의 상수리제도와 고려 시대 기인 제도와 비교했을때 어떤 차이점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 지방의 각 고을에서는 서울에서 편의를 돕는 경저와 감영을 연락하는 영저를 두었습니다. 이는 고려 초에 지방 향리의 자제를 선발하여 '기인'이라 이름을 붙이고 서울에서 일하게 한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이후 중앙집권이 강화되면서 향리의 지위가 약해지며, 경저들은 고역에 사역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경저가 서울에 두어서 공물 상납과 연락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또한 본읍 향리의 서울 내왕 때 여러 가지 편의 업무를 처리하기도 했습니다.이때 있었던 조선 시대 경저리 제도는 중앙과 지방 관아의 연락 사무를 담당하기 위하여 지방 수령이 서울에 보내는 공문을 처리하는 제도였습니다 경저에는 몇 사람의 경저리를 두었고, 이후에도 존속하였습니다. 차이라고 한다면 상수리 제도는 지방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제도였고 경저리 제도는 실무를 위한 제도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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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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