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경저리제도는 통일 신라의 상수리제도와 고려 시대 기인 제도와 비교했을때 어떤 차이점이 있나요?
통일 신라의 상수리제도와 고려시대의 기인제도는
일명 인질제도라 알고 있는데
조선 시대의 경저리 제도는 어떤 목적의 제도인가요?
경저리제도도 그 대상이 일반인이나 천민이 아닌
향리인데
상수리제도, 기인제도와 어떤 차이점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지방의 각 고을에서는 서울에서 편의를 돕는 경저와 감영을 연락하는 영저를 두었습니다. 이는 고려 초에 지방 향리의 자제를 선발하여 '기인'이라 이름을 붙이고 서울에서 일하게 한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후 중앙집권이 강화되면서 향리의 지위가 약해지며, 경저들은 고역에 사역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경저가 서울에 두어서 공물 상납과 연락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또한 본읍 향리의 서울 내왕 때 여러 가지 편의 업무를 처리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있었던 조선 시대 경저리 제도는 중앙과 지방 관아의 연락 사무를 담당하기 위하여 지방 수령이 서울에 보내는 공문을 처리하는 제도였습니다 경저에는 몇 사람의 경저리를 두었고, 이후에도 존속하였습니다.
차이라고 한다면 상수리 제도는 지방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제도였고 경저리 제도는 실무를 위한 제도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고려 초기의 기인이 맡았던 임무인 각 고을의 공물 상납 및 연락 등을 담당하는 지방 각관의 분실로 경저를 서울에 두었습니다. 공물 상납을 위하여 상경한 공리(貢吏)들은 경저에서 숙박하는 것이 통례였고, 공납 물품도 여기를 경유하여 각사에 상납되었습니다. 경저에는 몇 사람의 경저리(京邸吏)를 두었는데, 그 장을 경주인(京主人)이라 하고 그 아래 서원(書員)·서리와 관노를 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