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4대문이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시대 한양을 방비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4대문은 흥인지문(동대문).돈의문(서대문).숭례문(남대문).숙정문(북대문)을 말합니다. 한양을 둘러싼 성곽의 정문이었던 숭례문은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의 대표적 도성 건축물입니다. 규모가 장중하고 절제미와 균형미가 있어 조선 전기 건축 특징을 잘 보여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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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뇽 페스티벌'에 대해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아비뇽 페스티벌 혹은 연극제 (Festival d'Avignon)는 남부 프랑스 보클뤼즈 에 속한 코뮌 인 아비뇽 광장에서 매년 7월에 열리는 세계적인 연극제 입니다. 1947년 장 빌라르 (Jean Vilar)가 설립한 이 축제는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축제이며 그 규모 또한 전 세계적으로 가장 큰 축에 속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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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세계대전 때 연합군 쪽으로 승기가 기운 전환점은 언제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44년 6월 연합군의 프랑스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 후를 기점으로 연합군이 독일군을 확실하게 누를 수 있는 기반을 마련 하게 됩니다. 상륙 후 전선은 한동안 교착 상태가 이어졌으나 독일군의 방어선은 일단 구멍이 뚫린 다음엔 순식간에 무너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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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시기에 제주도가 원에 편입되었던 적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아닙니다. 고려말 까지도 제주조는 독립국으로 남아 있다가 조선 초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왕권을 강화하기 시작 한 이후 조선에 복속 됩니다. 그러니 고려 시대 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고 그러기에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제주도 까지 가서 원나라와 항쟁을 할 수 있었던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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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해군이 왕이 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선조의 정비인 의인 왕후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후궁인 공빈 김씨의 큰아들이 임해군 인데 임해군은 성격이 포악 하고 인진왜란 발생 당시에도 왜군에게 잡혔다가 풀려 나는등 모가나는 행동을 보이다가 결국 왕이 되 지 못하고 둘째인 공해군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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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이 폐위된 후 세자는 어떻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해군의 아들 즉 세자였던 이지와 부인은 광해군 폐위이후 폐세자 / 폐빈으로 강등당하고 유배되는데 위리안치되어 아내인 폐빈과 함께 감시를 당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유배 생활 중 몰래 땅굴을 파고 폐빈과 함께 도주를 시도하다 붙잡혀 감옥에 수감되었다고 합니다. 폐빈은 목을 매 자결했고 이후 폐세자도 자결을 명받아 자결하게 됩니다. 둘 사이에는 딸이 하나 있었으나 역시 요절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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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임금 중 묘호가 없는 임금은 누구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묘호가 없는 왕은 조선의 역사 상 총 3명인데 반정 (反正)으로 축출된 연산군 (燕山君), 광해군 (光海君), 그리고 왕위를 강제로 빼앗긴 노산군(魯山君) 뿐이었습니다. 역대 왕들이 재임시 신하들이나 정종 임금의 후손들이 정종에게 묘호를 내려달라고 상소를 많이 올리고 하였으나 그때마다 거부 당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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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명이나 청을 통해서가 아닌 다른 나라와 직접 교류한 적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국을 제외 하고는 우리는 왜국과 직접 교류를 했습니다. 일본 사신이 서울에 오면 동평관(東平館)을 유숙소로 쓰게 하였습니다. 이때 일본의 진상물은 은(銀)·동·연·유황·소목(蘇木)·단목(丹木)·백반(白礬)·감초·호초·수우각(水牛角)·상아 등이었으며, 회사품은 면포(綿布)와 쌀을 비롯하여 서적·저포(苧布)·마포(麻布)·인삼·표피(表皮) 등으로서 한국과 중국과의 경우처럼 일종의 관무역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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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때 잡혀갔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636년 병자호란에서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한 이후 60만 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포로로 잡혀갔다. 최명길은 “청군이 항복을 받고 정축년 2월 15일 한강을 건널 때 포로로 잡힌 인구가 50여만이었다”고 썼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 인구는 1000만 명 정도였다. 전체 인구의 6%가 전쟁포로로 끌려간 셈입니다. 포로들은 노예시장으로 팔려나갔습니다. 청나라 사람들은 남자든 여자든 조선인 포로의 옷을 모두 벗기고 건강 상태를 본 뒤 값을 치르고 노예를 사갔다고 합니다. 약소국의 첨혹한 시대 상황 을 보여 주는 부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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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양자를 들일때 정해진 기준이 존재하였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시대 양반들은 보통 아들이 없는 집에서 자신의 대를 잇기 위한 목적으로 동성동본(同姓同本) 구성원 중에 항렬이 맞는 남자를 자식으로 맞아 들이고는 했습니다. 동성 동본이라 함은 적어도 자신과 어느 정도 인척관계가 있는 가문의 자식을 받아 들이고 전혀 상관 없는 집안의 자식은 양자로 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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