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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는 어떤 이유로 경제위기가 왔는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그리스의 경제는 높은 수준의 공공 부채, 약한 경제, 구조적인 것을 포함한 복합적인 요인들에 의해 야기되었다고 합니다. 금융 및 정치 시스템의 문제, 막대한 예산 적자, 그리고 국제 투자자들과 금융 기관들의 행동 등도 거기에 한 몫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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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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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선뒤 다시 고려왕조로 되돌리려는 움직임은 없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가 망하고 초기에는 고려 왕실을 부흥 하고자 하는 운동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김가행 , 박중질 등이 왕화, 왕거등을 앞세워 왕씨 복원 운동을 하려다가 들통이 나서 다 참수 당합니다. 고려 마지막 왕족인 공양왕과 왕씨 왕가 혈통들도 강화도로 가는 뱃길 에서 모두 다 수장 당해 죽습니다. 그 이후로는 고려 왕조에 대한 복원 운동은 없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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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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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에서 '대한독립의군부'가 했던 일들에 대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국내에서 활동했던 비밀결사 독립운동 단체입니다. . 1906년 최익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던 임병찬은 대마도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대한제국으로 귀국하였고 이후 고종의 강제 퇴위와 정미의병, 1910년에 경술국치를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임병찬은 한일합방이 선포되자 의병을 일으킬 준비를 했고, 그러던 와중에 임병찬은 1912년 고종의 밀지를 받고 호남지방에서 의병과 유생들을 모아 비밀결사인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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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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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당정치 시기에 예송논쟁에 대해서 알기 쉽게 설명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지금이야 사실 상을 당하면 거의 다 검은 옷을 입고 3일장을 치루지만 유교를 숭상하는 조선의 그것도 궁에서는 이러한 장례문화가 굉장히 중요시 여겨 졌습니다. 예송 논쟁이란 효종 승하 후, 현종 즉위 직후 효종의 의붓 모후인 장렬왕후가 행해야 했던 상례 격식을 두고 서인과 남인 간에 여러 차례 격렬하게 벌어졌던 학술적, 정치적, 사회적 논의를 말합니다. 1차(기해예송 1659년)는 효종이 사망한 이후, 모후인 장렬왕후가 입어야 하는 상복 '규례'를 두고 일어난 논쟁이고 2차(갑인예송 1674년)는 장렬왕후가 며느리 되는 인선 왕후에 대해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느냐로 벌인 논쟁입니다.(현종 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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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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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스톤헨지는 누가 어떤 용도로 쓰기 위해서 만들어진 건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스톤 헨지는 기원전 2000년 경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 거석의 용도에 대해서는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현존하는 문서들 중 스톤헨지에 대해 언급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130년 헌팅던의 헨리(Henry of Huntingdon)가 쓴 『앵글인들의 역사(Historia Anglorum)』인데, 여기서 저자는 "누가 무엇을 위해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유적"이라고 언급했다. 하지만 그 새김새나 만들어지 시기 등으로 미루어 볼때 많은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고인돌과 같이 죽은 사람을 위한 무덤이지 않았을까 라고 추측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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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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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자화상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도 있긴 합니다. 바로 윤두서가 직접 그린 자신의 자화상의 대표작인데 크기는 가로 20.5㎝, 세로 38.5㎝입니다. 윤두서(1668~1715)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이자 정약용의 외증조로 조선 후기 문인이며 화가입니다.종이에 옅게 채색하여 그린 이 그림에서 윤두서는 윗부분을 생략한 탕건을 쓰고 눈은 마치 자신과 대결하듯 앞면을 보고 있으며 두툼한 입술에 수염은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화폭의 윗부분에 얼굴이 배치되었는데 아래 길게 늘어져 있는 수염이 얼굴을 위로 떠받치듯 표현 했습니다. 숙종 36년인 1710년에 그린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상 조선시대에 그려진 자화상중 남은것 중에서 최고의 수작으로 꼽힌다. 강세황도 자화상을 그려서 전하지만 윤두서의 것과 비교하면 세밀한 묘사나 표현력에서 모자라다고 합니다. 조선 시대 자화상이 서양에 비해서 적은 이유는 나보다는 상대방 혹은 우리를 중심으로 하는 동양 사상에서 '자아와의 대결'이라는 명제가 쉽지 않기 때문 입니다. 사실적 섬세한 묘사를 중요시하는 화단에서 탁월한 관찰력과 기량이 겸비 되야 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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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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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뚜기란 말의 유례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말 '메뚜기' 는 산이라는 의미를 가진 고유어 '묏 (山)+뛰기' 에 어원을 두고 있으며, 산에서 뛰어다닌다는 특성에서 유래한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농경문화를 주도했던 인도의 말 'metti'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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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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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또가 일하는 관청의 이방과 같은 하급관리직도 녹을 받았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지방 향리를 비롯한 토착세력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 큰 목적이기에 조선이 추구하던 중앙집권화에 큰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 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녹봉과 토지를 안 주었다고 합니다. 어차피 대다수의 향리들은 땅을 가지고 있는데다 지방 유력자로 지내다보니 재산도 많아 녹봉을 안줘도 먹고 사는 문제가 크게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향역을 수행하면서 드는 비용이나 지방 관아의 경비, 수령을 맞이하고 보내는 직무를 수행하면서 드는 비용을 모두 향리가 부담하고 이행하지 않을 경우 처벌을 받았기 때문에 조선 초기부터 향리들이 온갖 수단을 써서 향역을 피하려 들었고 향역에 들어가는 경비를 메꾸려고 수작질을 부리거나 백성들을 침탈하였다고 합니다. 사실상 조선 시대 지방행정 부정부패의 가장 큰 원인이 바로 이들 외 아전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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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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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할 수 밖에 없는시대적.사상적 배경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시 조선은 수많은 외세 관련 사건들이 터져 나옵니다. 제너럴셔먼호 침략사건, 오페르트의 남연군 묘 도굴 사건, 병인양요, 신미양요와 같은 서양의 무력 도발은 당연히 흥선대원군으로 하여금 쇄국정책과 국방력 강화 후문호를 개방해야겠다는 생각을 강하게 했다고 합니다. 쇄국 정책으로 조선이 개화의 흐름에 대비하지 못해 멸망하고 일제 강점기, 남북분단, 한국전쟁과 같은 비극을 겪어야 했던 것에는 흥선대원군이 일말의 책임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흥선 대원군도 나라를 생각 하는 마음은 누구 보다 더 했지만 그 방법이 쇄국이 아닌 조금 더 적극적인 문호 개방 이였다면 어땟 을 까 하는 생각을 가벼이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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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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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셰라는 말은 어디서 쓰인 단어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클리셰란 19세기 초반 인쇄 업자들이 쓰던 용어로써, 반복적으로 사진이나 인쇄물을 찍어 내기 위해 만들어 놓은 틀입니다. 불어에서 온 말인데 '상투적 문구' 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상투적인 문구라는 것은 너무 나도 당연하고 속담도 아니고, 격언도 아니지만 굉장히 뻔하고 자주 쓰이는 말 들입니다. 이런 게 바로 Cliché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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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2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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