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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일본은 대통령이 없는건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정치 형태가 다릅니다. 우리나라는 대통령 중심제 이지만 일본은 영국하고 비슷한 천왕이 존재 하는 수상을 중심으로 하는 의원 내각제를 하고 있습니다. 입헌 군주제라고 할 수도 있지요. 일본에서의 천왕의 영향력은 다른 나라들과는 약간 다릅니다. 천왕은 마치 조선 시대의 왕처럼 국민들로부터 굉장한 신뢰와 존경을 받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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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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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은 실화를 바탕한 소설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홍길동전은 허균이 쓴 조선 시대 최초의 한글 소설 입니다. 물론 그 주인공인 홍길동은 실제 도둑의 인물을 근거로 글을 썼다고 하지만 그 주인공인 홍길동은 가상의 인물이고 현실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흥미와 오락을 위해서 이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하며 당시 사회상( 서자 차별 등)을 적나라하게 풍자하는 풍자 오락 소설 이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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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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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관련된 그림을 그렸던 화가가 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렘브란트를 ‘명암법의 화가라고 하지만, 그건 단순히 기법상의 문제이고 그는 종교화가이며, 의미를 중심으로 밝음과 어둠을 직시하였다고 합니다. 동판화 <목동들의 경배>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한 목동이 들고 있는 등에서 새어 나오는 빛에 의존해 그려나갑니다. 이 작품은 예수가 탄생했을 때 그분을 둘러싸고 있는 어둠과 가난을 분명하게 보여준다고 하지요. 그가 어둠을 강조한 것은 어둠 자체를 좋아해서도 아니고, 다만 삶의 고난과 비참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였다고 합니다. 그는 인간의 삶이 추하면 추한 대로 그대로 표현 합니다. 그는 삶을 어떤 식으로도 이상화 하지 않았으며, 거짓 되게 미화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스무 살이 채 되기 전에 그린 첫 작품이 <스테파노의 순교>(1625)입니다. 여기서 렘브란트는 ‘예수님을 믿는 길은 날마다 죽는 길’임을 의심하지 않았다고 하지요. 그는 복음과 종교개혁의 정신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어했다고 합니다.“나는 화가가 되었지만 스스로는 목사, 신학자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말로 구구 절절이 복음을 소개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림으로 종교개혁의 정신을 묘사하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함으로서 그의 종교화가 임을 스스로 인정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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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3.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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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사람들은 양치질을 어떤걸로 헀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495년 중국에서 칫솔이 발명 돼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당시의 칫솔은 나무에 돼지털을 촘촘히 꽂아 만든 거였기에 값이 비싸서 귀족만 사용했다고 합니다.이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한 것은 ‘소금’이었다고 하지요. 소금을 이용해 손가락으로 문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시대 허준의 동의보감에는 ‘소금으로 이를 닦고 더운 물로 양치를 하면 이에 남은 술독이 제거된다’는 말이 담겨있다고 합니다.그러나 소금도 서민에겐 귀했지요.그렇다고 식사 후 양치질을 안 한 게 아니었 는데요. 이들은 주로 강가의 고운 모래를 이용해 이를 닦았다고 합니다. 또 쑥을 달인 물을 이용해 입 안을 헹구기도 하고, 지푸라기를 이용해 치아를 닦아냈다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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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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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위기라고 하는 이유와 이에 대한 대책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인문학의 위기가 초래되었다. 가장 큰 원인은 근대 산업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생산성을 갖춘 인간, 실용적 인간을 추구하면서 인간성이나 삶의 질을 실현하기 보다는 물질적 생산을 중시하는 경제 개발 논리에 부응해 철학이나 역사와 같은 기초 인문학보다는 경제, 과학, 기술과 같은 실용주의 학문을 중시하게 된 것입니다. 또, 사회적으로 생산적 가치가 있는 학문이 사회 발전과 개인의 출세 수단으로 인식되면서 인문학을 도외시하고 실용주의 학문을 선호할 수 밖에 없게 되었지요. 이와 함께 인문학 자체의 정체성을 그 원인으로 들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에게 존재 의의와 바람직한 삶의 가치를 제시해주는 인문학에 대한 재조명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인문학이 실용성이 없는, 돈벌이가 안되는 관념 중심의 학문이 아니라 인간의 삶 자체에 대해 보다 근본적인 사고와 자각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기초 학문이라는 점을 인식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학계와 학교 현장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과학과 실용주의 학문만을 중시하는 교육 풍토를 극복하고 인문학 교육이 정상화될 수 있는 정책적 뒷 받침이 마련되어야 하구요. 다음으로 인문학에 대한 정부의 재정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고 봅니다. 실용 주의 학문에 치중된 정부 지원은 인문학 발전의 현실적 저해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되볼아 볼때 인문학이 발달하지 않은 나라들이 강대국이 되는 경우는 드물 었습니다. 영국도 미국도 찬란한 인문학의 기반위에 발전이 이루어져 왔다는 것을 각성해 봐야 할 때 인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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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23.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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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스턴 처칠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질문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BBC는 2002년 ‘가장 위대한 영국인은 누구인가?’라는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고 합니다..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영국과 영국인. 수많은 위인들이 후보에 올랐지요. 인도와 바꿀 수 없다는 대문호 셰익스피어, 물리학의 천재 뉴튼, 진화론으로 인류의 뿌리를 밝혀낸 다윈, 위대한 대영제국을 건설한 엘리자베스 1세, 세계 해전사를 새로 쓴 넬슨 제독 등등. 이렇게 만만치 않은 후보들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한 인물은 정치가인 윈스턴 처칠입니다.1939년, 드디어 인류 최대의 비극인 제2차 대전이 시작됐을때 . 영국은 당황했습니다.. 내각은 총사퇴를 하고 새로운 전시 내각이 꾸며졌습니다. 그 내각의 총리로 임명된 사람이 바로 처칠이었습니다 이때가 1940년으로 처칠의 나이 65세 때입니다.히틀러는 처칠에게 굴욕적인 강화 조약을 제안했습니다. 평화를 원하는 파와 전쟁을 원하는 파, 양측의 대립과 반목이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처칠은 1940년 5월10일, 영국의회에서 연설을 시작했는데요. 역사적인 연설 이후 영국민은 단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처칠은 몸소 이 단결된 힘을 하나로 모으는 작업의 최전선에 나섰다고 합니다. 우선 영국왕실과 정부요인을 외국으로 피신시키려는 계획을 파기했고 그리고 대영 제국박물관의 수많은 보물과 문화재를 캐나다로 옮기려는 계획도 백지화 시켰다고 합니다. 모두가 동등한 입장에서 독일의 공습에 노출된 것이다. 그것은 영국민에게 용기와 단결된 힘을 모아주었다고 합니다.임진왜란 때 경복궁을 버리고 평양, 신의주로 피신을 간 선조 임금과는 비교되는 장면 이기도 하지요. 이것이 바로 그를 영국의 가장 위대한 인물로 만든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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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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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사상가 묵자의 사상에 대한 질문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묵자의 사상은 경제적인 측면을 강조한 면에서 공자나 맹자와는 약간 다릅니다. 유가의 덕치의 이념 대신에 생산에 참여하는 모든 만민 들의 철저한 공동 연대(겸애)와 그를 통한 상호 이익의 증진(교리)을 주장하였습니다. 묵자가 바라본 당시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바로 생산 활동에 직접적으로 종사하고 있는 일반 백성들이 기본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백성들이 직접 생산 활동을 하면서도 “배고픈 자가 먹지를 못하고, 추운 자가 옷을 입지 못하고, 노역을 하고 난 자가 쉬지 못한다. (민유삼환 : 기자불식, 한자불의, 노자불식『묵자』「비악상」)"는 사회적 모순이었다고 하지요. 이와 같이 생산에 종사하는 백성들의 ‘3환’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선 만민 들은 ‘겸애․교리’할 것을 묵자는 주장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민생 문제의 해결에 본질적인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는 묵자의 사상은 ‘비례비례’, ‘비악비악’, ‘절용절용’, ‘절장절장’ 등을 말하고 있습니다. 묵자는 이와 같이 민생의 해결이라는 공리주의적인 입장에서 만민은 모두 생산에 종사할 것을 역설하지요. 특히 인간의 본질을 노동하는 존재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당시의 다른 제자 철학사상과 묵가 사상을 구분짓는 본질적 특성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묵자가 보는 사회적 ‘의의’는 인간 모두가 노동을 통하여 자기 소유를 확보하고 서로 물질적인 이익을 도와주는, 만민 평등의 ‘겸애’ 관점에서 서로가 물질적으로 돕고 사는 ‘교리’의 현실적 실현에 있는 것입니다.
학문 /
철학
23.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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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역사에서 동시간대 최대 라이벌이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바로 후기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폴 고갱과 빈센트 반 고흐가 있다고 할수 있지요.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화가 고흐, 세상에서 제일 억울한 화가 고갱 이라고 하지요. 둘은 남 프랑스 아를에서 화가 공동체를 이루면서 한 집에서 생활하지만 서로 상반되는 점이 많아 결별의 수순을 밟지요. 그들은 예술가의 감정을 담아내는 주관적 색채를 선호했다고 합니다. 고갱은 강렬한 색채로 상징적이면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그려 내면서 자신의 내면을 담아냈고, 고흐는 생동감 넘치는 그림에 밝고 순수한 색채로 자신을 표현했습니다. 이 두사람은 동시대를 살았던 천재 라이벌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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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23.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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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에 나오는 바벨탑은 실존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스미소니언은 지난 2017년 4월 21일 홈페이지에 공개한 동영상에서 “성서학자들은 오랫동안 바벨탑이 실제 존재했는지에 대해 논쟁해왔다”면서 “이전에 한 번도 알려지지 않았던 주목할만한 석판이 이 의문을 풀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습니다.적어도 지금으로부터 100년 이전에 발견된 이 석판은 약 B.C. 600년 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노르웨이 사업가인 마틴 쇼엔(Martin Schøyen)의 개인 소장품으로, 이 석판은 개인이 소장하고 있어, 언어학자들이 지금까지 석판의 내용에 대해 연구하지 못했었다고 합니다. 조지 박사는 석판에 새겨진 글을 해석해 탑의 건축에 대한 내용이 구약성경의 이야기와 동일하다는 것도 발견했다고 합니다. 이로서 바벨탑은 실제로 존재 했었다는 것이 입증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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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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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사관들은 어떻게 권력에 독립되어서 일할수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보통 사관은 춘추관의 관원과 예문관 한림이 겸직하는데 실력과 가문이 두루 좋은 인재를 뽑았다고 합나다. 젊은 사관들은 자부심과 사명감이 투철해 자연히 왕과 권력자들에게는 껄끄러운 존재였으며 수난도 많이 당했다고 하지요. 하지만 후기 들어서면서부터는 사관도 당색에 물들어 사관들의 평가가 편파성을 띄는 경우도 생기게 되는데여. 승정원일기를 작성하는 승정원의 정7품 주서(注書), 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 주서의 자리가 비었을 때 임명하는 임시직)도 넓은 의미에서 사관이라고 볼 수 있지요. 다만 승정원일기 특성상 '사신은 논한다'로 시작하는 사관으로서 평가는 하지 않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관의 기록인 사초는 실록 편찬 전까지는 그 누구도 열람할 수가 없다고 하지요. 심지어 왕이라고 해도. 딱 한번, 연산군이 무오사화 때 이를 읽어보고 사관들을 대거 숙청하였던 관계로 사초를 열람하는 것은 '폭군이나 하는 행위'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때문에 연산군 이후에는 실록 얘기를 꺼내기만 해도, '연산이다. 연산이 했던 짓이다!' 라며 치를 떠니 감히 임금들이 행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그 연산군도 사초를 자신이 직접 두눈으로 읽어본 것은 아니고 사초의 내용을 간접적으로 확인해본게 다였다고 합나다.더불어 사관들조차도 기록을 적은 왕이 승하(昇遐)한 후에야 실록 편찬의 목적으로 열람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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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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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
1928
1929
1930
1931
1932
1933
1934
19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