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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첫 금메달을 딴 선수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의 첫 올림픽 금메달은 사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 선수가 딴 금메달이 최초지만 당시에는 한국이라는 나라는 존재 할 수 없었기에 손기정 선수가 딴 금메달은 공식적으로는 일본의 것 이였습니다. 대한 민국이 광복후에 처음으로 딴 올림픽 금메달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때 레슬링 자유형 62키로급에서 양정모 선수가 딴 금메달이 처음 이였습니다.
학문 /
역사
22.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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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에서 따는 금메달은 진짜 금일까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현재 올림픽 규정상 현재 금메달은 99.9% 이상이 순은을 이루고 있고, 도금 시 최소 6g 이상의 순금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금메달은 사실 은메달에 가까운 것이지요. 하지만 은메달은 100% 다 은이라고 합니다.
학문 /
미술
22.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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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이 좋아하는 우리나라 음식은?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세계인이 좋아하는 우리나라의 음식 1,2,3위는 차례로 1. 비빔밥 2. 삼계탕 3. 소갈비구이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무래도 중국인들이 많이 우리나라에 찾다 보니 이런 결과가 나온 것 같은데 아마 미국인들이나 서양인들의 입맛으로만 따지만 아마도 소갈비가 1위를 하지 않았을 까 합니다.
학문 /
음악
22.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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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혁명 보스턴 차 사건과 관련된 것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은 영국의 지나친 세금 징수에 반발한 북아메리카의 식민지 주민들이 인디언으로 위장한후 1773년 12월 16일 보스턴 항에 정박한 배에 실려 있던 홍차 상자들을 바다에 버린 사건이고 이를 계기로 미국과 영국의 독립 전쟁이 시작된 것이지요. 이 시기에 조선은 영조 49년 이였고 여전히 조선은 붕당 정치로 인해 당파간에 싸움만 벌리고 있었던 때 였습니다. 이 시기에 프랑스는 이미 루이 14세 때부터 빈민과 평민 계층에 대한 압박이 일상화되어 있었고 베르사유 궁전의 건축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 왕실의 사치와 낭비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도를 더해 갔고, 더욱이 계속되는 주변 강대국과의 전쟁, 북아메리카 대륙에서의 무리한 군사 행동은 국가의 재정을 더욱 악화시켰구요. 1774년에 국가 재정의 33% 이상이 군비 증강을 위해 소비되었고, 약 3%가 부채에 따른 이자 지불에, 10%는 왕실의 경비로 지출되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곡물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으며, 전염병이 극성을 부려 수많은 가축들이 죽어 나갔다. 프랑스의 농촌 경제는 완전히 몰락하여 파산 지경에 이르렀던 시점 이였지요. 이 시기에 영국도 프랑스와의 전쟁 등로 인해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시기여서 더더욱 미국 같은 식민지에서 더 많은 세금을 거둬야만 하는 상황 이였지요. 그래서 결국 미국과의 전쟁이 일어나게 된 것 이구요.
학문 /
역사
22.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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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역사를 현재 기준으로만 판단 하는 것은 사실 무리가 있긴 합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일본이 치욕을 견디면서 메이지 유신을 하면서 미국의 신문명을 받아들였고 중국이 아편 전쟁의 패전으로 영국과 불평등 조약을 맺는 것을 보면서 우리도 변화의 몸부림을 했어야 했는데 우리는 너무도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변화에 대응한 결과 결국 한일 합방이라는 치욕을 겪게 되지요. 결국 흥선 대원군의 쇄국 정책은 그때도 지금도 잘못된 판단으로 보여집니다.
학문 /
역사
22.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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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고통없이는 얻는것도 없다 라고 말한 학자는 누구일까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No pains , No gains라고 처음 말한 사람은 아마도 영국의 시인 Robert Herrick(1591~1674)가 그의 시집 "Hesperides"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하지요. NO PAINS, NO GAINS. 사실 이런 비슷한 말들은 영어 표현에 굉장히 많습니다. No sweat, no sweet, No cross, no crown, No gain without pain 등도 전부다 비슷한 표현들이지요. 모든 성공에는 댓가 가 따른다는 말이 겠지요.
학문 /
철학
22.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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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때, 호패법 폐지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폐지할만한 부작용이 있었던것인지?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호패법의 취지는 백성들의 거주 안전을 도모하고 국가 입장에서는 징세를 안정적으로 취해 국가와 백성의 살을 둘 다 이롭게 하자는 취지 였을 것 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임진왜란 이나 병자호란 등으로 생활이 어려워진 백성들은 살고 있는 곳에서 더이상 살기가 힘들어져 다른 곳으로 계속해서 옮겨 다니며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런 백성들의 거주의 자유를 법으로 막는 셈이나 다름 없었던 것이죠. 지금으로 따지면 서울 살다가 부산으로 이사가면 부산에서 이전 신고만 하면 되는데 당시에는 신고가 아니라 허가를 받아야 하는 방식이다 보니 백성 입장에서는 여간 불편하고 불합리한 제도 였을 겁니다.
학문 /
역사
22.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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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시인은 많은시를 남겼는데요 이시인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독립군이 총칼을 들고 일제와 싸웠다면 윤동주 시인은 펜으로 일제와 싸웠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저항시인 이였습니다. 그는 1917년 12월 30일 중화민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의 유복한 집안에서 개신교 장로이자 소학교 교사인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사이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지요. 항일 감정으로 일본을 일본이라 부르지 않고 왈본(왈자패일본)이라고 부를 정도로 일본을 싫어했지요. 이 때문인지 윤동주는 18살인 1935년 평양에서도 일본 순사들과 자주 다툼을 벌였고 남한으로 와서 숭실학교로를 다녔으나 일제가 신사 참배운동을 강요하자 문익환 등과 함께 동맹 자퇴를 감행합니다. 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 서울에 있는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에 진학하기로 하지요. 연희전문학교는 민족주의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조선어를 가르치고 태극기도 비밀리에 곳곳에 붙어 있었다고 하지요. 연희전문대를 졸업하고 학문에 대한 열의로 유학을 결정, 1942년 도쿄 릭교대학 영문과를 다니다가 도쿄의 분위기로 인해 교토 도시샤대 문과로 편입 하였구요. 같은 기독교 재단의 릿쿄대학을 다니다 윤동주는 교련수업을 거부하다 고초를 당했다고 알려져 있고 그것에 학교를 옮긴 계기가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선인 유학생으로 지낸 고종사촌 송몽규가 '재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으로 일본고등경찰 체포되어 시모카모 경찰서로 압송됐고, 사흘 뒤 윤동주 자신도 고희욱과 함께 고오로기 사다오(興梠定) 형사에게 체포되어 취조를 받고 12월에 송몽규, 고희욱과 함께 검찰국으로 넘겨졌다가 1944년 3월 31일 교토지방재판소 제2형사부에서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로 수감되기도 하구요. 약 1년 7개월동안 수감생활을 견뎌오던 윤동주는 건강악화로 인해 1945년 2월 16일, 향년 27세의 나이에 큐슈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뇌일혈로 요절하였다고 합니다. 불과 광복6개월 전의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죽기전에 일본 형무소에서 이름 모를 주사를 많이 맞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2000년대 미국국립도서관 기밀해제 문서 중에서 1948년 일본전범재판 관련 문서에 당시 규수제국대학이 연구 구하고 있던 대체혈액 실험의 일환으로, 후쿠오카 형무소 재소자들을 상대로 생리식염수 대체용액을 수혈하는 생체실험을 했다는 증언으로 확인 가능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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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2.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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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악은 무엇을 뜻하는 음악용어 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음악은 사람의 목소리로 나타내는 성악과 악기로 나타내는 기악으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성악은 보통 음역대에 따라 소프라노, 메조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등으로 구분 하지요. 16세기 이전의 음악은 성악이 그 중심이었고, 17세기 이후의 바로크시기에 이르러서도 대체로 성악과 기악은 양적으로 동등하였다고 하지요. 기악이 성악을 능가하게 된 것은 18세기 후반 부터이며, 현대까지도 그 경향이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학문 /
음악
22.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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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받고 노예생활에 처해있던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의 속박에서 벗어나 가나안으로 이끌게된 모세 가나안땅은 오늘날 어디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애굽)의 노예가 된 배경은 처음 야곱의 아들 이었던 요셉이 형들의 시기를 받아 이집트에 팔려간 것이 그 발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이집트 총리로 등용되는, 엄청난 신분 상승을 이루고 파라오 왕의 을 해석해 긴 흉년을 잘 대비한 공으로 이집트 서열 2위의 자리에 오르고 이집트와 가나안 일대에 극심한 흉년이 들었을 때 아버지 야곱을 비롯해 가족들을 이집트의 고센(Goshen)으로 이주시켜 살게 했습니다. 고센은 이집트 나일강 삼각주 동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목축하기에 적합한 땅이었고 라암세스(Rameses)라고도 불렸습니다. 처음에 70여명으로 시작한 이스라엘 이주민들은 400년 후에 약 200만명정도로 인구가 늘어났습니다. 이집트왕 파라오(람세스2세로 추정됨) 는 이스라엘 민족을 힘들고 위험한 건설현장에 강제 동원하고 노예 처럼 취급했습니다. 그럭저럭 잘 살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은 어느새 노예로 전락한 신세가 되었고 이것은 하나님의 예언에 따라 이루어진 역사중의 하나였습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유대민족의 시조’ 라 할 수 있는 아브라람에게 이 일에 대해 예언한 바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창세기 15:13)” 이렇듯 학정을 일삼는 파라오로 인해 비참한 삶을 영위하는 이스라엘 노예들을 돕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선택하여 파라오와 담판을 짓게 하시지요. 하지만 이집트 국왕 파라오가 노예들을 순순히 풀어줄 리 없었지요.당시에는 전쟁의 승패와 곡물의 수확량, 각종 공사의 추진 속도 등이 모두 인력에 비례했으니까요. 국력이나 다름없는 노예들을 아무 대가 없이 놓아주는 게 비상식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파라오의 마음을 꺾으려고 이집트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는데 이집트의 강과 호수가 피로 물들고, 개구리와 이, 파리가 창궐하는가 하면, 전염병으로 가축들이 죽어나가고, 악성 종기가 퍼지고, 가축과 사람들이 우박에 맞아 죽었고 삼 일간 이집트 전역에는 흑암이 뒤덮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파라오는 고집을 꺾지 않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을 위해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결정하시었지요. 유대력 정월 14일을 그 시행일로 정하시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죽음의 재앙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는데 그게 가나안으로 탈출 즉 엑소더스(출애굽기) 입니다. 가나안은 오늘날 레바논, 이스라엘, 요르단 북부, 팔레스타인 시리아 서부 일부 지역을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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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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