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 양자를 들일때 정해진 기준이 존재하였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시대 양반들은 보통 아들이 없는 집에서 자신의 대를 잇기 위한 목적으로 동성동본(同姓同本) 구성원 중에 항렬이 맞는 남자를 자식으로 맞아 들이고는 했습니다. 동성 동본이라 함은 적어도 자신과 어느 정도 인척관계가 있는 가문의 자식을 받아 들이고 전혀 상관 없는 집안의 자식은 양자로 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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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역사속 초상화는 인물의 표정이 다 무표정인 이유가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의 초상화는 서양의 초상화와는 달리 무엇인가를 기념 하고 즐거운 기억을 남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보통 살아 생전의 모습으로 제삿상에 올리는 지금 오르 따지면 상중에 쓰이는 사진 역할을 한 것 입니다.그래서 대부분 무표정 하거나 엄숙한 분위기의 그림을 그리게 된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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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손톱 발톱은 어떻게 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손톱과 발톱은 물론 자르고 다듬었지만 그것을 모아서 한 군데 모아 놓고 나중에 자신이 죽을 때 그 모은것을 시신과 같이 묻었다고 합니다. 신체 발부 수지 부모 라고 하는 말은 그냥 나온 말이 아닌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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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종친들은 어떤 삶을 살았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종친들은 권력에 전면에 나서는 경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종친은 잘못 나서면 역모에 가담한다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하기 쉽기에 종친들은 정치는 멀리하고 그들의 생활은 왕의 사사로운 재물인 내탕금등으로 지원을 해주었습니다. 종친이 물론 정치에 간혹 간섭 하는 경우도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양녕 대군 입니다. 양녕 대군은 세종의 형으로서 세종에게 많은 조언을 해주었고 그 이후에도 단종, 세조 대에 까지 왕들의 숙부로서 많은 영향력을 행사 했다고 합니다. 좀 특이한 경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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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도전의 가장 큰 업적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의 성리학의 기틀을 마련 한 것 입니다. 물론 이과정에서 불교를 아주 혐오하는 < 불씨 잡변> 등과 같은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또한 조선경국전을 써서 조선 시대의 법률적 체계를 잡기도 했습니다. 또한 재상 정치를 강조해 왕권 위주의 정치 보다는 재상및 신하가 이끌어 가는 나라라는 당시에는 약간 획기적인 생각으로 정치를 하고자 하는 초기 민주정치, 재상 정치에 대한 생각도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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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전염병이 생기면 통행을 금지시켰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시대 세종 떄에 코로나와 같은 전염병이 창궐한 적이 있습니다. 세종은 “7년 전의 전철을 밟으면 안된다”고 신신당부하면서 “백성들을 분산 수용하고 질병을 얻은 자는 다른 사람과 섞여 살게 하지 마라”는 지시를 내렸고 세종은 분산 수용소의 관리를 중앙 및 서울의 5개 관청 공무원들에게 맡겼다고 합니다.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기 위함이었는데 그러면서 세종은 “백성들을 나눠 관리하도록 하는데, 만약 백성 한사람이라도 죽게되면 관리책임자는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고 전해 집니다. 죽을 각오로 백성들을 관리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이렇게 세종은 왕임에도 전염병 발생시 백성들을 격리 하는 등 질병 관리 대책 본부장 같은 일도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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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밀사는 헤이그에서 아무도 만나지 못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종의 밀명을 받고 이준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참가, 일제의 조선 침탈과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세계에 알리고자 했으나 참가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입장을 거부 당하고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머나먼 이국 땅에서 자결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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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시대 정치 관련 책에 대해 질문이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위.진.남북조 >분열과 역동의 시대, 생각하는 힘 세계사컬렉션 12, 라는 책이 아마다 당시 중국의 정치등관련 한 책이라고 보여 집니다. 혹은 <중국의 역사(위진남북조)> 라는 가와카스 요시오 저자(글) 임대희 번역 도 있으니 인터넷에서 미리 한번 검색 해 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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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노비의 수는 어느 정도였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 가장 노비가 많을 시기에는 전체 인구의 약 40%가 노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렇게 노비가 많았던 것은 아닙니다. 국가에서는 노비의 숫자를 줄이고 양인들의 숫자를 늘려야 세금도 많이 걷을 수 있기에 노비를 줄이고자 했고 귀족, 양반들의 입장에서는 노비들이 많아야 자기들이 편하기에 노비를 늘리고자 했습니다. 당시 인구가 약 1200만명 정도로 본다면 그중 40% 인 약 400-500만명 정도가 노비 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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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족과 말갈족은 어떻게 다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거란족은 4세기 이래 동몽골(東蒙古)를 중심으로 활약한 유목민족으로 몽골족과 퉁구스족의 혼혈족이라는 설도 있으나, 현재로서는 몽골계의 한 종족으로 추측됩니다. '거란'이라는 용어는 모용연(慕容燕)에 의해 격파된 선비족(鮮卑族)이 우문(宇文)·해(奚)·거란으로 나뉘어 송막(松漠) 지방으로 피신한 4세기 전반부터 비로소 사서(史書)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주변 집단에 대한 약탈과 방어의 필요가 있을 때만 서로 잠정적으로 동맹했으며, 내부적으로는 끊임없이 갈등과 충돌을 일으켰기 때문에 초 부족적(超部族的)인 군주를 정점으로 하는 정치 질서를 형성하지 못하였습니다. 말갈족은 여진족과 동류(同類), 전신(前身)이며 이전 여진을 부르던 명칭입니다. 사실 말갈족과 여진족은 같은 계열 입니다. 발해 멸망 이후 거란은 말갈을 통틀어 여진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말갈은 만주와 한반도 북부 그리고 한반도 남부 강원도에 살던 퉁구스계 민족으로 초기부터 고구려 한민족에 정복되어 오랜 시기 한민족에 동화되었고 주나라 때에는 주로 숙신이라는 명칭으로 불렸으며 한나라 때에는 읍루라 불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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