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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민화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건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민화는 주로 조선시대 무명 화가들이 정통 회화를 모방하여 그린 그림을 일컫는다고 합니다. 대체로 전문적인 회화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자유로운 기법으로 그렸는데요. 그 내용은 주로 일반적으로 민속에 얽힌 관습적인 그림이나 오랜 역사를 통하여 사회의 요구에 따라 같은 주제를 되풀이하여 그린 생활화가 주제가 됩니다. 대체로 비전문가의 작품이지만 직업화가가 그린 것도 있습니다. 무속·도교·불교·유교 등 종교 관련 그림이나 장식용 그림이 많다고 합니다. 민화에는 순수함·소박함·단순함·솔직함·직접성·무명성·대중성·동일 주제의 반복과 실용성·비창조성·생활 습속과의 연계성 등의 특성이 잘 나타나 있어 그 가치가 있다고 생각 됩니다.
학문 /
미술
23.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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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용했던 비녀는 신분이나 계급에 따라 종류가 달랐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네에 예전에는 신분에 따라 각기 다른 비녀를 사용했는데 비녀는 신분에 따라 재료와 모양이 많이 달랐는데, 금,은,진주, 비취,산호 비녀는 주로 상류층에서 사용했으며, 일반 서민은 나무,뿔,백동,놋쇠 비녀를 주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학문 /
역사
23.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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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사람들은 날이 더워도 한복을 껴입어야 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아닙니다. 날씨가 더우면 양반들과는 달리 대다수의 평민들은 계량복 혹은 반바지 등을 입었으며 한복의 기본 구성인 치마와 저고리, 바지 등은 변치 않고 오랜 세월 동안 기본 골격을 유지했습니다. 한복에 나타나는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기본적으로 활동성을 중시하며 딱 붙는 옷이 아닙니다. 또한 천 자체를 보면 직선형이지만 몸에 입을 경우 곡선이 살아나게 도와주는 미적 특징도 나타나는데 이는 주머니가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학문 /
역사
23.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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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라상의 음식은 일부러 넉넉히 만들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궁중에서만이 아니라 윗사람이 먹던것을 남기면 아랫사람이 다시 받아서 먹던 것을 이르는 말로 상물림이라고 합니다.그래서 왕에서부터 양반들은 모두 이렇게 상물림을 하였습니다.왕이 남긴 음식은 나인 들이 먹고 양반들이 남긴 음식은 하인들이 먹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왕이 남긴 음식이 없이 다 먹었다고 나인들이 굶는 건 아닙니다. 하인들도 마찬가지이구요. 수라상 음식을 넉넉 하게 한것은 임금의 건강과 양양의 균형을 위한 것이지 일부러 남기게 해서 궁녀들이 먹으려고 한것은 아닙니다.
학문 /
역사
23.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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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평균 연봉은 대략 어느정도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경제·금융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 남자 평균 월급은 360만원이고 연봉 기준 약 5천만원 이고 여자 평균 월급은 236만원 이고 연봉 기준 약 3200만원 입니다. 약 1.5배 차이가 나고 있습니다. 남자의 경우 40대를 정점으로 50대까지는 400만원 대의 월급을 받고 있습니다. 여자의 경우 30대를 정점으로 감소하고 있어 육아 전담, 경력 단절 등으로 인한 평균 월급의 차이를 체감할 수 있습니다.
경제 /
대출
23.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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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우라치 암살미수사건에서 개신교인을 지목한 이유가 뭔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 사건을 계기로 안명근이 신민회(新民會) 회원임을 알아차렸다고 합니다. 1911년 1월 전국 경찰에 명해 윤치호·양기탁·이승훈·유동열(柳東說)·김구(金九)·김홍량(金鴻亮)·최명식(崔明植)·도인권(都寅權)·안태국(安泰國) 등 신민회 민족지도자 600인을 검거하였습니다. 당시 신민회의 지방조직은 평안북도와 평안남도 조직으로 나뉜다고 합니다. 평안남도의 조직은 평양을 중심으로 하여 최광옥-안태국(安泰國)-장응진(張膺震)으로 이어지는, 교육사업에 종사하던 인맥에 의해 결성되었다고 하며 그 구성원은 신민회의 표면단체인 청년학우회, 동제회(同濟會) 등의 회원이 중심이었다고 합니다. . 반면 평안북도의 조직은 분회까지 갖추었으며 평안남도의 조직에 비해 더 컸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래서 평안도 지역이 그 타겟이 된 것입니다.
학문 /
역사
23.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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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축의금 문화가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결혼식 축의금은 내지 않고 간단한 음식이나 선물로 대신하고 대신 장례식 부조금만 냈던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결혼식보다 장례식에 훨씬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시신을 염습하고 운구하며 장지를 마련하는 데는 적지 않은 비용이 들기 때문 입니다. 빌려 쓰는 것도 한계가 있기 때문인데 수의(壽衣)를 빌려 입힐 수는 없지 않으니까요. 반면 결혼식은 비용이 많이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처럼 기둥 뿌리를 뽑아서 거하게 혼수를 마련하는 풍습도 별로 오래된 것이 아닙니다. 필요한 물건은 전부 빌리면 되고, 손님 접대나 신경 쓰면 그만 인것 입니다. 친지와 이웃들은 음식을 해 오거나 일손을 보탬으로써 손님 접대를 도왔다고 합니다.
학문 /
역사
23.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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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에 독립군을 재정비하면서 3부로 만든 배경과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한 독립군은 통의부가 이념과 노선의 대립으로 참의부와 정의부로 분리되고, 대한 독립 군단이 신민부를 창립함으로써 3부가 성립되었습니다. 3부는 지역을 관할하는 정부로서 행정과 군사 기능을 갖고 있었습니다. 3부는 동포 사회를 바탕으로 민정 기관과 군정 기관을 갖춘 일종의 자치 정부로서, 주민들에게 세금을 거두고 교육 사업 벌였으며 군사를 양성했는데 참의부는 1923년 조직된 임시 정부 소속의 군정부로 남만주 지역의 압록강 연안 일대를 근거지로 활동했고, 1924년에 조직된 정의부는 하얼빈 이남의 지린(길림)을 비롯해 남만주의 북부 지역을 근거지로 활동했습니다. 이렇게 3개의 정부로 나눈 이유는 한군데를 갑자기 기습 당할 경우 힘을 나누어서 다른 한쪽이 서로를 도와 주는 기능 을 할 수 있어서 였다고 보여 집니다.
학문 /
역사
23.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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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에서 각 지역마다 사병을 거느린 호족이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대 시대에는 중앙 집권적인 세력이 약해 지면 지방 세력이 강해지는데 특히 신라 후기에는 중앙 조정의 권력 약화, 기근 등 여러 혼란을 틈타 전국 각지에서 친족 집단 중심의 호족 세력이 세를 불려나갔고 이들 가운데 일부는 신라의 지방 관료들과 결탁하여 신라 조정에 반란을 일으키는 등 후삼국시대 주역으로 떠 ㅇㄹ랐습니다. 통일 전쟁에서 호족들 중 고려에 적대하거나 후백제의 편에 선 호족들은 고려가 후백제를 무너뜨리고 후삼국 통일을 끝맺음 하면서 연거푸 몰락한 반면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우거나 귀부한 호족들은 결혼과 등용 등 포용 정책의 혜택에 힘 입어 고려 초기 국가의 주된 지배층을 이루게 됩니다.
학문 /
역사
23.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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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도박 문화가 발달한 나라였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아마도 조선 초 중기가 아니라 조선 후반에 와서 일시적인 현상 이였다고 보여 집니다. 그리고 서양 사람들이 우리 문화를 알게 된것도 조선 후기 부터 이니까요. 조선 후기 당시 시대 상황은 이양법의 발달로 경작이 늘어나고 화폐 경제가 발달해서 현금 사용이 활발해 지면서 사람들이 마땅한 놀이 거리가 없어서 투전이나 화투등을 많이 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이것은 일시적인 현상이며 현대로 넘어 오면서 이러한 노름 문화는 사라지게 됩니다.
학문 /
역사
23.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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