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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시에도 어떠한 규칙 같은게 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전쟁시에도 지켜야할 국제법이 존재합니다. 바로 전시 국제법인데요. 국가 간의 개전선언 및 전시 행위와 관련해 적용되는 법을 말하며 전쟁법이라고도 합니다. 국제공법이구요. 내용은 크게 전쟁 선포, 항복 수락, 포로 대우, 군사적 필요, 분별 및 비례, 사용 가능한 전쟁 무기의 제약 등에 대한 규정으로 되어있지요.우리가 알고 있는 1899년 해이그 평화회의와 1949년 제네바 회의가 바로 그러한 법들을 논의하고 비준한 회의인데여. 전쟁 포로를 적대 행위로부터 보호하는 한다던가 아니면 전시 민간인 보호 절차의 규정이라던가 하는 내용인데여. 그러나 아무리 법이 있더라도 그 집행을 위한 기관이나 절차를 실행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실제 전쟁에서는 잘 지켜진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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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2.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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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관점에서 신부와 목사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목사님과 신부님의 차이를 아주 간단히 설명 드리면 목사님은 기독교(개신교)의 목회자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신부님은 카톨릭(천주교)의 성직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신부님은 결혼을 못하는 대신에 술 담배등은 할 수 있고 목사님은 결혼은 할수 있으나 술 담배등은 금기시 되어 있지요. 하지만 공통점은 두 종교에서 전부 다 예수님을 섬긴다는 점에서는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두 종교 다 같은 뿌리에서 생겨 나왔다고 할수 있습니다. 16세기 유럽에서 성직자들이 타락하고 면죄부 판매가 이루어지는 등 타락한 카톨릭 교회를 개혁하고자 했던 마틴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 이후로 카톨릭(구교) 과 기독교(신교) 로 나누어 졌다고 할수 있지요. 너무도 장황한 이야기가 될거 같아서 이정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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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22.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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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문법 가르쳐 주실 수 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일단 질문 하신 내용에 대해서 설명을 드릴게여. 위 예문에서 which we we are to make the decision 은 완전구문이 아닙니다. 완전 구문이 되려면 we are to make the decision (우리가 결정을 내려야만 해) 라고 주어 동사가 완전히 나와야 하지요. 앞에 which 가 나왔다는 말은 그 앞에 무엇인가 명사, 선행사가 있다는 것 입니다. 예를 들어 the fact which we are to make the decision bothers me. ( 우리가 결정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게해) 이런 종류의 문장이 와야 완전문이 될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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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2.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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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터어키(=튀르키에)는돌궐족이그들의 전신이라는데요 그럼 거란족은 오늘날 어느나라족속의 전신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거란족은 5세기 중엽부터 요하 상류 남쪽에서 유목생활을 하고 있던 여러 부족으로 이루어진 민족입니다. 중국의 북위때부터 이름이 알려졌으며, 고구려의 전성기인 장수왕 때에는 그 일부가 고구려에 복속되기도 하였구요. 8세기에는 당나라의 위구르에 복속된 적도 있었지만 당나라 말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힘을 키우기도 했지요. 하지만 거란족은 중원민족중 사라진 존재로 명대이후에는 사서에서 이상하게도 사라졌습니다.거란족은 료를 세우고 금에 의해 멸망한후 점치적으로 여진화로인해 거란문자도 없어지게 되지요. 거란은 크게 양대성씨가 있었는데 바로 야율과 소씨였습니다. 이 두성씨가 이척씨와 석말씨로 개칭되고 금나라의 중후기에는 금의 귀족들도 거란인들도 동화되구요. 거란족은 한인과 몽고족에 편입되고 거란인에 의해 한때 서료국을 세우기도 했지만 후에 몽고에 의해 멸망되고 거란족들은 철저히 소멸합니다. 서료의 거란족은 돌궐어를 쓰며 이슬람민족에 복속되어 아랍민족의 일부로 변하게 된것이고 물론 일부는 중국인의 소수민족으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지금도 거란족의 후손을 찾는일이 진행되고 있고 대만의 국부인 장개석도 거란족의 후손이라는 말도 있지만 이미 문자가 사라진 산황에서 정확한 역사의 흔적을 찾기는 어려울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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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2.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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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살아야만 하는 인문학적 이유는 무엇일까요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오랜 세월이 지나면서도 우리 인간이 철학적으로 고민해 온 문제 중 하나가 왜 사는가 일것 입니다. 무엇 때문에 세상의 시련을 견뎌내면서 아둥바둥 살아가야만 하는 걸까요? 수천년간의 인간 역사에 있어이 문제는 여전히 정확한 답은 없는것 같습니다. 다만,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자신을 제대로 찾아가려고 노력하는 일종의 행복찾기 여행일 수 있습니다. 인문학중 하나인 철학적으로 봤을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살아가는 최종 목적은 '행복'이라고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인생을 사는 것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목적임이 분명하다고 생각됩니다. 개개인이 갖는 행복의 기준은 다르지만 어떤 하나에서 갖는 만족감이 극대화됐을 때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나다. 그것은 돈이나 명예 혹은 권럭이 될 수도 있고 자기만의 소소한 만족같은 소위 소확행이 될수도 있겠지요. 이글을 이렇게 쓰고 있는 이유도 누군가에게 제가 쓴글이 조금이라도 궁금증 해결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희망을 가지고 글을 쓰는 걸 보니 제 자신도 일종의 행복찾기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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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22.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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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레스트산을 등반하는 이유?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실 이 질문에 정답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 주관적인 생각임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많은이들이 산악인들에게 자주 하는 질문이 "산에 왜 가나요? "어떤 사람들은 “그토록 위험한 에베레스트 같은 산을 왜 오르느냐”고 진지하게 묻습니다. ‘죽음의 지대’라 스스로 일컫는 험난한 고봉에 제 발로 올라가서 다시 살아 내려오려고 처절하게 애쓰는 산악인들의 모순된 행위를 이해할 수가 없다는게 일반적인 의견이지요. 저는 전문 산악인이 아니기에 그분들의 입장을 100% 이해 할수는 없기에 전문 산악인의 말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전설적인 등반가 라인홀트 메스너는 “등반은 산의 불확실성을 극복하는 행위이고 그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인류 최초로 8000m급 14좌를 완등한 산악인이면서 그 일로 IOC에서 수여하려던 올림픽 메달을 거절한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는 “등반은 스포츠 경기와 다르다. 내가 오르려고 한 것은 14개의 정상이 아니라 그 방법”이라고 말했습니다.바로 이 부분이 시사하는 것이 우리가 찾고자 하는 답에 가까운것 같습니다. 등반활동을 스포츠 경기처럼 숫자로 평가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이 행위가 지향하는 바는 마치 화가가 그림을 그리듯, 혹은 작가가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써나가기위해서 몸부림 치듯, 높은 산을 마치 그림 그리는 종이로 삼아 혹은 원고지로 삼아 치열하게 자기의 길을 찾는 모습은 마치 예술가의 창조적 행위와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통해 등반가들은 무엇 하고도 바꿀 수 없는 성취와 성찰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오르는 길이 험할수록 성취감은 아마도 더 커질 것 입니다. 우리가 등반가 들에게 산에 왜 올라가느냐 하는 질문은 마치 이름 없는 화가에게 "돈도 별로 안되는 그림을 왜그려?" 라는것과 같고 또한 이름 없는 무명작가에게 " 돈도 안되는데 소설은 왜써?" 라고 질문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인류 발전의 원동력은 끊임없는 도전을 통해 많은 개인들이 자신이 간절히 원했던 그 무엇인가를 찾고자 했던 과정이니까요. 이상 제 개인적은 의견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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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2.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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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에 가야를 포함하지 않는 이유가 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삼국은 일반적으로 고구려, 신라, 백제를 일컫고,가야는 주로 삼국의 주변국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가야는 한반도 남부지방의 낙동강유역과 남강, 황강 등과 남해안의 바다를 끼고 성장한 각 지역의 소국들입니다.물론 엄밀히 따지자면 삼국시대라는 용어도 그때 상황에 가야를 포함한 사국시대, 가야를 독자적인 지역국가로 보아 다국시대라고 할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러한 용어 역시 문제점이 많습니다.가야를 고구려,백제,신라와 동일하게 취급한다면 아마도 비슷한 시기에 만주, 북한 지역에 존재하며 비교적 강대국이였던 동예, 옥저, 그리고백제의 전신인 마한부족 중의 부족국가라 할수 있는 목지국 등등 수많은 부족국가들도 전부 합쳐서 춘추 전국 시대라고 할수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하고 나머지 국가들은 고구려, 백제 , 신라에 복속되고 흡수되었기에이러한 이유로 삼국시대의 한 테두리 내에서 가야사를 연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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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2.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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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에서 우리나라처럼 설 명절을 세는 나라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음력 1월 1일은 우리나라의 최대 명절이긴 하지만 그 유래는 중국에서 비롯 됬습니다. 중국은 우리처럼 음력 1월 1일 설을 보냅니다. 중국의 연휴중 가장 큰 명절이 바로 우리 설날과 같은 ‘춘절(春节)’인데요, 춘절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불꽃놀이’이구요. 중국인들에게 불꽃놀이는 액운을 가져오는 귀신을 쫓고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홍바오 혹은 야쑤웨이첸 이라고 해서 우리한테 세뱃돈에 해당되는 돈을 붉은 색 봉투에 담아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주는 데여. 우리처럼 설날 아침 세배하고 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저녁 식사하고 아이들에게 세배돈을 줍니다.아시아에서도 일본은 양력 1월1일을 새해라고 보지만 중국 문화권이라고 할수 있는 홍콩,대만,싱가폴,말레이지아 등등 중국인들이 주로 살고 있는 국가들은 그 형태는 약간씩 다르지만 전부다 제각기 춘절을 보낸다고 보시면 됩니다. 궁금증이 어느 정도 해결 되셨으면 좋겠네요.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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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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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게임의 유래는 어떻게되며 장기는 누구에의해 만들어졌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장기를 저도 어릴적에 동네 친구들과 참 많이 두었는데 요즘은 잘 볼수가 없어서 안타깝네여. 장기의 유래는 원래 인도의 승려들이 수도생활 중에 잠깐 휴식시간을 내서 행하던 놀이로서 그것이 중국으로 전파되었다고 합니다. 누가 만들었는지 정확한 발명자는 알수 없구요. 특히,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에 성행되었다하며, 송나라 사마광(司馬光)이 쓴 기록을 보면 오늘날 우리가 쓰는 장기와 비슷했다는 것을 알수 있는데 현재 우리 나라에서 사용하는 장기는 후주(後周)의 무제(武帝, 951∼953) 경에 만들어 졌다고 하니, 고려시대 초 정도가 우리나라의 장기의 기원이 될수 있을 듯 합니다. .즉, 장기의 역사는 약 1,000여 년이 된다고 볼수 있지요. 그것은 고려사 악지(樂志) 속악조(俗樂條)의 예성강곡 이나 연려실기술 같은 문헌에 장기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가 있습니다.그러므로 장기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그리고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전파된 것이 거의 정설이라고 볼수 있을것 같습니다. 궁금증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됬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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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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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이전의 삼한에 대하여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삼한시대를 언급하기 앞서 우선 고조선 시대와 삼국시대이전의 시대즉,기원전 2세기~1세기경의 시대를 원삼국시대 라고 하고 이당시에는 지금의 북한과 중국영토 일부에걸쳐 아주 많은 국가들이 있었는데 이 국가들은 철기 기술을 바탕으로 성정했고 이 국가들이 바로 고구려, 옥저,동예이지요. 그리고 남한에는 지금의 전라 충청 지방을 근거로 총54개의 부족연맹체인 마한, 지금의 경상북도 지역을 근거로 12개의 소부족 연맹체인 진한, 그리고 전라남도와 경상남도 일부 지역을 근거로한 12개 소부족 연맹체인 변한으로 나눌수 있습니다. 이들은 제대로 된 나라라고 하기보다는 성읍국가나 부족 연맹체에 가까운 형태였습니다. 예를 들어 신라도 처음에는 경주지역을 중심으로하는 이들 진한지역의 소부족 중의 하나인 사로국(신라의옛이름)에서 시작해 점차 주변부족을 통합해 경상도 지역을 대표하는 신라가 된것 입니다. 백제 역시 마한의 여러 부족, 대표적으로 목지국 같은 부족들을 복속시키며 전라도 지역을 대표하는 국가로 성장하였구요. 교과서에는 마한이 지금의 천안,익산,나주 등에 존재했다고 기록되어있는데 이는 아마도 백제에 밀려 점차 남쪽으로 그 세력이 밀려나면서 그렇게 기록된걸로 추정됩니다. 그래서 정리하자면 마한,진한,변한이 각각 백제와 신라로 통합되었고 옥저와 낙랑,동예등은 고구려로 흡수되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로 발전되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삼한의 문화를 살펴보면, 삼한에서는 음력 5월에 씨를 뿌리고 10월 농사가 끝난 다음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 제사는 농사와 관련 있는 만큼, 이는 바로 ‘농업신’에게 올렸고 또한 제사를 지내고 나서 군무를 추는데, 땅을 밟는 동작은 지신(地神)을 즐겁게 하고 땅의 생명력을 높여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이자 일종의 축제로 거행되어 구성원 간에 결속을 다지는 동시에 정치 권력의 한계를 보완하는 것으로 간주되고요. 또한 천군(天君)이 있어 제사를 주관하고 소도(蘇塗) 를 설치했는데소도에는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았다고 합니다. 지금의 서낭당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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